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10)

'한반도 첫 수도 고창!' 

필자가 고향 고창의 눈물 나도록 찬란한 역사문화를 한마디로 어떻게 말할까 평생토록 고민하다가 만든 고창의 브랜드다. 브랜드가 성공하려면 보는 순간 가슴이 울리거나 호기심을 일으켜야 한다. 어느 날 전국 시장군수회의 때 자기소개를 하면서, "한반도 첫 수도 고창군수"라고 했더니 휴식시간에 제 주위에 뜻을 묻는 사람들이 몰렸다. 일단 궁금증을 품게 한 것은 성공이었다.

'한반도 첫 수도 고창'을 두고 긍정적인 군민들은 고향이 자랑스럽다고 열을 내며 입소문을 내기도 하고, 딴지걸기를 즐기는 분들은 국사책에 없는 소리라고 생뚱맞다고도 한다. 도시 브랜드이기에 역사적 사실에 꼭 부합할 필요는 없지만, 고향산천을 가슴으로 들여다 보면 전북 해안지역이 일찍부터 한반도의 문명수도였던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

독특한 고창식 고인돌 3,000개를 만들려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살았을까? 

고대부터 우리 전북은 해양국가 마한과 해상왕국 백제의 중심지였다. 일찍이 고인돌시대 한반도의 문명발상지였던 고창은 마한시대에는 익산, 나주 등과 함께 사실상 마한의 수도 역할을 했다. 백제시대에도 전북 서해안 고창 부안 정읍 일대는 백제 5방 중 핵심인 중방성의 요충이었다.

세계 고인돌의 약 7할을 차지하는 한국, 그중에서도 가장 다양하고 독특한 고창식 고인돌 3,000개를 만들려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살았을까? 고인돌 시대에 고창지역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 곧 문명수도임을 웅변하는 문화유산이 고창 고인돌이다. 이어서 마한시대에 마한 54소국 중에서 모로비리국이 고창지역이라고 비정하는 데는 학설이 일치한다.

모로비리는 백제식 지명 모양부리현과도 부합한다. 도산리 천제단 고인돌 주변에 번성했던 모로비리국은 익산지역 건마국과 함께 마한의 수도격이었다. 모로비리국의 모로는 머리, 몰, 말, 마루 등처럼 크고 높은 곳, 산,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비리는 벌판, 벌을 나타내며 백제어에서 부리, 신라어에서 벌, 불 등으로 변천하며 고을이란 뜻이다. 고을을 뜻하는 유럽도시의 스카부르, 에딘버러, 함부르크 등의 도시명 어미 부르, 버러, 부르크, 뷔리휘 등도 우리말 비리가 라틴어계통에 전래된 흔적이 분명하다. 

마한 54소국 이름 중 비리가 붙은 국명이 8개로 가장 많은 것을 보면 비리가 소국을 나타낸 대표적 용어로 볼 수 있다. 어원으로 보아도 모로비리국은 머리나라 곧 수도란 뜻이다. 익산 건마국, 금마도 큰 나라, 머리나라 수도란 의미다. 고대국가 왕도의 구성 요소로 궁성, 왕릉, 신앙체계, 주거지, 방어체계 등을 든다. 고창 모로비리국 옛터에서 이것들이 모두 확인되었다.

신라 왕릉보다도 훨씬 크며, 마한시대 고분 중에서 가장 큰 규모

옛적부터 고창의 살기 좋은 마을, 양택 3향을 꼽을 때 1도산, 2독실, 3갑평이란 말이 전승되어왔다. 묘하게도 이 지역 일대가 마한의 수도 모로비리국 핵심 터전이었음이 고고학적 발굴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고창 고인돌 박물관 주위와 만동유적 일대에서 마한시대 대규모 주거지와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마한연구사의 일대사건으로 평가되는 봉덕리 1호분(모로비리국왕릉추정) 발굴조사 결과 마한시대 지배층 묘로 확인되며 국보급 유물이 무더기로 햇빛을 본다. 여기서 출토된 금동신발, 중국제청자, 일본제토기 등 마한시대 최고급 유물들을 살펴보면 마한이 한중일 교역 중심의 해양국가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지표조사된 고분 4기 중 발굴 조사한 1호분은 가로 세로 50미터, 70미터, 3호분은 70미터, 85미터로 거의 축구장 하나 크기다.

신라 왕릉보다도 훨씬 크며, 마한시대 고분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서 역시 수도임을 웅변한다. 이어서 마한왕자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설화와 함께 고성이 있다하여 고성봉(古城峰)으로 기록된 태봉(胎峰)에서 모로비리국 방어성인 마한시대 축조 토성을 발굴조사하여 모로비리국의 실체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였다. 역사는 달빛을 받으면 야사가 되고, 햇빛을 받으면 정사가 된다 했던가. 다행히 고창지역에는 마한의 수도임을 말해주는 설화와 땅 이름도 함께 전승되어왔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를 과장하고 패자를 비틀어 놓은 승자의 기록임을 잘 살펴서 읽어야 한다. 그러기에 고대사 연구에는 때로는 사화(史話)나 설화가 왜곡된 기록보다 실체에 더 가까울 수가 있다. 선운산 자락에 신선이 살아서 기돗발 좋다는 삼천굴이라는 신비한 바윗굴이 있다. 여기서 삼천명의 선인들이 수도하고 삼한을 세웠고, 이 선선들이 복분자와 복분자주를 제물로 올리고 즐겨 먹었다는 복분자 설화도 전승된다. 지금도 산봉우리 이름이 선인봉이고 신선봉이다. 산줄기가 선인들이 삼한을 세우고 기뻐서 춤추는 듯 부드럽다 하여 신선이 춤추는 소맷자락이라는 선인무수혈(仙人舞袖穴)이다. 선운사 대웅전에서 마주 보이는 고봉밥같은 봉우리 뒤안의 삼천굴이다.

봉덕리 왕릉 장구무덤 뒷켠 태봉은 모로비리국 왕자의 태를 묻은 봉우리라서 태봉이다. 태봉 남쪽 동네이름이 마한 토성이 있다하여 고성촌이라 전승되었고, 발굴조사결과 과연 한국 최고의 마한시대 토성이 확인된 것이다. 고유의 땅이름 옛지명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해준 순간이었다. 고창 앞 칠산바다에 있는 왕등도는 마한왕이 올랐다하여 왕등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봉덕리 왕릉이나 공음 칠암리 전방후원분 출토유물을 보면 마한시대 칠산바다를 통해 중국과 일본을 이웃집 다니듯 교역하던 해양국가 마한을 엿볼 수 있다. 한중일 교역 무대인 동아시아 지중해의 중심세력이 마한이었음을 말해준다. 

지역의 역사를 뜨겁게 사랑한다면, 고을은 반드시 소멸하지 않는다

마한시대가 졌다고 문명수도가 하루아침에 꺼질수야 없지 않겠는가? 고려사에 전하는 백제가요 5개 중에 고창, 정읍이 3개나 된다. 선운산가, 방등산가, 정읍사가 그것이다. 백제 중방성의 요충인 전북 서해안 고창 정읍 부안지역은 여전히 백제문화의 중심, 문명수도였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한다. 자랑스런 역사를 기억해야만 자랑스런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치욕의 역사를 처절하게 기억해야만 치욕의 역사 반복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다 잃어버리고 빼앗긴다. 역사도 그렇다.

'한반도 첫 수도 고창, 높을 고창'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다 지워져 버린다. '도전과 응전'이란 역사관으로 세계사를 꿰뚫어 본 역사학자 토인비는 "한 민족을 멸망시키는 지름길은 역사를 말살하는 것"이라 했다. 지역도 마찬가지다. 우리 전북, 고창이라는 공동체 역사의 주체들이 주인의식과 자긍심을 가지고 지역의 역사를 뜨겁게 사랑한다면, 고을은 반드시 소멸하지 않는다.

지역소멸 대책이라며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나무 베고, 집 짓고 길 닦기 바쁘다. 역사 지우기에 혈안이다. 내 고향이 일찍이 한반도 문명수도였음을 알게만 하게되면 필경 고향을 사랑하게 되리라. 오늘날 다시 우리 손으로 문명수도를 꿈꾸자는 마음들이 뜨겁게 응집하기만 한다면 지역은 다시 치솟을 것이다. 역사는 불멸의 저력을 갖고 있으므로. 

/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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