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9)

10월 9일은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자는 한글날이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라고 평가하는 한글인 훈민정음이 반포된지 577주년이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독립국, 선진국 한국에서 맞이하는 한글날은 공휴일이나 연휴 정도로 인식하는 국민이 대다수이고, 지도층의 한글사랑은 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길거리 간판을 보면 국적 없는 외국어와 외래어 일색으로 이게 대한민국 거리인가 의심스럽다. 정부의 공식 정책자료나 사업명, 홍보물에도 무분별한 외국어와 외래어 투성이다. 심지어 제 아내마저 '와이프'라고 부르는 게 일상화되는 등 우리 말과 글의 오염이 위험수준이다. 말과 글, 역사는 겨레의 혼이고 얼이다. 나라가 깨져도 말과 글이 있으면 겨레의 동질성이 이어진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한글 사용 금지, 일본어 강요 정책을 시행하고, 총독부가 날조한 조선사를 가르친 것이다. 광복된지 80여년 된 한국, 세계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 한글날에 스스로 얼빠지고 얼이 썩은 대한민국의 단면을 다시 본다.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 스스로 얼빠지고 얼이 썩어서야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케이팝과 한류의 공헌 덕분에 지구촌 젊은이가 우리말로 노래하고, 한글 디자인 옷을 뽐내서 입고 다니며 한글 배우기 열풍이 불고 있다. 문자가 없는 나라에서는 한글을 공식문자로 도입하며 신나게 쓰고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본디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로 천지인 우주원리로 설계되어 창제 과정이 확실히 밝혀진 우수한 문자체계다. 유네스코에서 문맹 퇴치 유공자에게 주는 상이 '세종대왕상'이다. 가장 배우고 익히기 쉬워서 한국이 문맹률 최저 국가이고,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을 기리는 뜻에서다.
영국의 역사학자 존 맨은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고 극찬한다. 한국을 뼛속까지 사랑한 노벨상 수상작가 펄벅 여사는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같은 나라라고 극찬했다. 그녀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배경의 한국을 그린 소설 <살아있는 갈대> 서문에서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간결한 문자다"고 호평했다.
판소리계에서 우리 문화의 근원을 꿰뚫은 연구로 일가를 이룬 배일동 명창은 한글이 아니고서는 우리소리의 멋을 부릴 수 없다고 한다. 겨레의 지혜경전인 천부경 천지인 음양 원리를 따라 자음과 모음이 결합하여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이루어진 우리 한글만이 판소리나 우리소리의 3박자 율동과 궁상각치우 음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글의 철학적 과학적 우수성은 이미 국제적으로 공인되었고, 외국 전문가들도 극찬하는데, 정작 매일 쓰는 한국인만 감사할 줄 모른다.
건재 정인승, '민족 혼' 불어넣는 교육...한갑수, '바른말 고운말' 운동 큰 족적
어떻게 지켜온 우리 한글인가? 한옥, 한식, 한지, 판소리 등 한류와 한스타일의 종가집 격인 우리 전북은 한글 수호와 한글 사랑 역사에서도 주류였다. 장수출신 한글학자 건재 정인승(1897~1986) 선생은 당시 남고창 북오산이라는 별칭처럼 남한 최고의 민족학교인 고창고보에 교사로 재직하며 말이 곧 민족이란 인식 하에 민족 혼을 불어넣는 교육을 했다.
뒤이어 조선어연구회에서 우리말사전을 편찬하시다가,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내란죄로 감옥살이를 했다. 일제 강점기는 한국어 사용이 불법이었고 한글연구는 극악 범죄인 내란죄였다. 그는 해방후 중고교 <우리말 말본>, <한글큰사전>등을 편찬하였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독립운동가이며 한글학자 정인승이 11년간 고창고보에서 한글사랑 독립운동을 한 덕분에, 한글학계의 거목 한갑수가 그 맥을 이을 수 있었다.
경기도 가평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13세 소년은 민족교육 학교를 찾아 머나먼 전북 고창고보에 유학을 왔다가, 스승 정인승을 만나 한글 학자 한갑수(1913~ 2004)란 이름으로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한글학회 이사장과 초대 한글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방송과 강의를 통해 바른말 고운말 운동을 펼치고, <바른말 고운말사전>을 편찬하며 한글 지키기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갑수는 고창고보 총동창회장으로 상당기간 봉사하기도 하며 전북 고창을 고향으로 여기고 평생토록 살뜰히 고창일을 챙겼다. 전북이 낳고 기른 한글 애국자 정인승과 한갑수는 한류와 한스타일의 본류인 전북이 한류 세계화ㆍ산업화 과정에서 한글 문화 자산으로 전북 몫을 챙길 당위성의 근거이다.
국적 없는 '와이프' 버리고, 집안에 빛나는 '태양인 아내' 모셔보면 어떨까?

우리말 '아내/안해'는 집안의 태양이란 존귀한 뜻이다. 마누라도 궁중 존칭인 마마와 같은 극존칭이다. 아이/아해는 집안의 어린 태양이란 밝고 고운 뜻이다. 우리 말에는 겨레의 혼과 얼, 간절한 기도의 힘이 어려있다. '와이프'는 결혼한 여성 배우자란 의미의 토막 영어다. 한글날을 맞이하여 국적 없는 '와이프'를 버리고, 집안에 빛나는 태양인 아내를 모셔보면 어떨까?
정부나 고위공직자가 무시로 외래어를 남발하면 국어 기본법령이나 관련 조례의 취지에도 어긋난다. 필자는 군수시절 "고창군 우리말 바로 쓰기 조례"를 제정하여 민족 혼을 지켜온 고창지역 전통을 이어 공공기관 한글사랑 운동을 솔선하려 했다. 물론 영어나 한문도 꼭 배우고 잘 써야 한다. 주객전도가 문제다. 최근 한글사랑 단체들이 광화문 한글 현판달기 운동을 시작했다. 고창 출신 서울 강서구 4선의원을 지낸 신창욱 전 의원은 한글지킴이를 사명으로 알고 열정을 쏟고 있다. 전북농협 김장근 전본부장은 한자투성이인 주요 명산 표지판을 한글로 바꾸자는 알찬 제안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이른바 지도층, 공공기관의 수장들이 한글 바로 쓰기에 앞장설 일이다. 공공기관 공문서, 상징물의 무원칙한 외국어, 외래어 표기도 어서 바로잡아야 한다. 공무원 시험에서 국어의 비중을 영어보다 대폭 높여야 한다. 우리 말과 글, 한글에 감사하며, 한류의 중심에 한글을 세우기 위해 치열하게 반성하고 고뇌 하는 한글날이 되면 참 좋겠다.
/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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