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뚜르 드 몽블랑 스위스’ 여행기⑧
‘길을 걷는 도사’, ‘길 위의 백과사전’이라는 닉네임을 지닌 신정일 씨가 이번엔 먼 프랑스와 스위스 등 유럽 여행길에 나섰다. 알프스산맥의 대자연을 걸으며 조그마한 들풀과 꽃 하나도 스쳐 지나지 않고 매일 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들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이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신정일 씨(길 전도사)가 먼 이국 땅에서 전해온 아름다운 대자연의 모습과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들을 차례로 묶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알프스 몽블랑을 답사하는 여행에서 돌아온 지 며칠. 이제야 집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자다가 일어나면 하얀 설산이 눈앞에 일렁이고, 노랗고 파란 꽃들이 가슴 안으로 밀려오는 듯 하더니, 지금은 떠나기 전 원래의 나로 돌아온 듯 하다.
어쩌다 보니 여행이 일이고, 여행이 놀이인 삶을 살았다. 이것은 불행인가, 아니면 행복인지 모르지만, 매일 매일 이렇게 저렇게 떠나는 여행이 인생이고, 인생이 여행인 것이다.

어떤 때는 아무 느낌도 없이 떠나서 백치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오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불과 며칠 여행에서 5년, 10년의 삶을 살고 나서 얻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돌아오기도 한다. 그만큼 여행은 어떤 사람하고 어떤 계절에 어느 곳을 가느냐가 여행의 질을 좌우하고 삶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몽블랑에서 노닐다가 돌아와 다시 몽블랑에서 보낸 시간을 추억하니, 몽블랑의 봉우리들을 휘감던 구름들과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영감을 얻은 실스 마리아, 그리고 토마스 만이 7년을 머물렀던 다보스 요양원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여행을 떠나 이틀만 지나면, 인간은(아직 생활에 그 뿌리를 굳게 박지 못한 젊은 사람에게는 특히 그러하지만), 자기가 여느 때의 의무, 이해관계, 근심, 희망이라고 부르던 모든 것으로부터, 즉 일상생활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그것도 역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꿈꾸던 그 이상으로 멀어지고 만다. 인간과 고향과의 사이를 돌고 날면서 퍼져가는 공간은 보통, 시간만이 갖고 있다고 믿어지는 힘을 나타낸다.
즉,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시시각각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변화는 시간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와 매우 비슷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그 이상의 것이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갖가지 관계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로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옮겨 놓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공간은 고루(固陋)한 속인(俗人)까지도 순식간에 방랑자와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시간은 망각의 물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기도 그러한 종류의 음료수인 것이다. 그리고 그 효력은 시간의 흐름만큼 철저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만큼 효력은 빠르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의 도입부에 실린 글이다. 옛날이야 그렇지 않았지만, 여행을 떠나는 순간, 퇴폐적으로 말하면 노숙자이고, 좋게 말하면 격식을 하나도 따지지 않는 일종의 자유주의자다.
그렇게 여행을 다니다가 보니, 그곳이 어느 곳이건, 누구와 함께 가든 긴장할 필요가 없고, 계산에 무디다고 할까? 더더구나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나 자고, 바라보는 모든 것에 경탄하자’ 는 3가지 철칙을 가지고 다니다가 보니 웬만하면 그냥 지나가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 쉬운가?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흐른 다음에야 이만큼이라도 되었으니 산다는 것, 여행하듯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기다림은 길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짧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다리는 동안엔 시간을 이용하거나, 적극적으로 살지 않아도 기다림이 시간의 모든 공간을 소모해 버리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이 시간의 흐름을 세밀하게 묘사한 소설 <마의 산>에서 한 말이다. 좀 더 마음을 내려 놓고, 휘적휘적 이 세상을 떠돌다가 돌아가리라 마음먹는다. 오늘 밤 떠나는 보성과 고흥지역의 남파랑 길에선 어떤 새로운 사물을 만나고 돌아올 것인가?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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