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뚜르 드 몽블랑 스위스’ 여행기①

'길 위의 철학자', ‘길을 걷는 도사’, ‘길 위의 백과사전’이라는 닉네임을 지닌 신정일 씨가 이번엔 먼 프랑스와 스위스 등 유럽 여행길에 나섰다. 알프스산맥의 대자연을 걸으며 조그마한 들풀과 꽃 하나도 스쳐 지나지 않고 매일 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들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이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신정일 씨(길 전도사)가 먼 이국 땅에서 전해온 아름다운 대자연의 모습과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들을 차례로 묶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미지의 세계, '몽블랑'을 향해 떠나며

내일(6월 8일) 떠난다. 19일에 돌아오는 <뚜르 드 몽블랑 스위스> 코스. 어떤 풍경이,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릴지 모르는 그 설렘을 안고 떠날 것이다. 열일곱 그 신산했던 시절에 처음 알았던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영감을 얻었던 곳이며, 토마스만의 <마의 산>의 무대, 그리고 헤르만헤세의 친구가 헤르만헤세의 집을 지어준 곳을 비롯해 알프스의 풍광을 보기 위해 떠나는 설레는 여행이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우리의 인생이란 무엇일까? 대양에서 헤엄치는 하나의 배, 모든 사람은 그것이 언젠가 뒤집힐 것이라는 데 대해 확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웃에 충실해 왔던 두 개의 선하고 낡은 보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너의 손길은 내가 전복당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막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항해를 계속하도록 하자. 서로 상대방을 위하여 ’한층 오래도록,‘ 오래도록,! 우리는 서로 서로 그렇게 많이 그리워해야 한다! 특히, 조용한 바다의 좋은 바람, 무엇보다도 태양을, 내 스스로 원했던 것은 또한 너를 위해 원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감사가 그러한 ’바람‘ 속에서만 표현되었다는 것, 그리고 바람이나 날씨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미안해 하고 있다.“

니체가 1881년 11월 14일에 프란츠 오버벡에게 보낸 편지이다. 1881년 7월부터 10월까지 니체는 스위스의 엥가딘 작은 마을 질스마리아에 머물러 있었다. 8월 어느 날이었다. 슬봐 푸라나의 호숫가 숲속을 산책하던 니체는 한 순간 강렬한 영감에 사로잡혔다.

'차라투스트라'의 근본 사상을 상상하다

”인생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의미도 없이, 목표도 없이, 무(無)에의 피날레도 없이, 그러나 불가피하게 회귀(回歸)한다. 영원 회귀, 이것이 니힐리즘의 극한적인 형태다. 곧 무의 영원이다.“  

니체가 명명한 영원 회귀 사상이다. 이 사상이 떠올랐던 순간으로부터 18개월이 지난 1883년 제네바 근처의 라파로에서 열흘 간에 걸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단숨에 써 내려갔다. 그 중 '즐거운 지식' 제 4부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아직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직 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자기의 희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감히 그 자신에게 표현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 한 결코 참되게 이 책을 읽을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나 역시 내가 지난날 자신에게 원하는 것, 올해 나의 머리에 스치는 첫 번째 생각, 즉 어떤 사상이 앞으로의 나의 생활에 토대가 되며 보증이 되며, 달콤함이 될 것인가를 말하려고 한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법을 더욱더 배우고자 한다.

그런 연유로 나는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운명애(運命愛),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나는 추한 것과 싸우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비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비난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조차 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대체로 언젠가 나는 긍정만 표시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1부 집필이 끝나는 날 그가 존경했다가 떠났던 바그너가 죽었다. 2부도 열흘, 3부도 열흘 4부는 두 달 간에 걸쳐 집필했다고 한다. <만인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두고 독일의 세계적인 철학자로 니체 해설가이기도 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각자를, 만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는, 다시 말하면 미리 그리고 동시에 변화하지 않는 한 결코 참되게 이 책을 읽을 권리를 갖지 못한다. 곧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만인 중의 어느 누구를 위한 책도 아니다. 만인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한 책도 아닌 책, 따라서 결코 직접적으로는 읽을 수 없고, 또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 책이다.“

니체는 1885년까지 4부까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성한 뒤, <선악의 피안,>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등 대부분의 책을 다 쓰고 1889년 1월에 발광하여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질곡에 찬 생을 마감했다. 고독과 질시와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서 살다가 생애의 막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니체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으로 나누며 니체는 신화가 되었으니, 현세의 삶이 중요한가? 내세의 삶이 중요한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 살다가 간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단 한 번 살기 때문에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니체가 강조한 ‘모든 결정적인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난다‘는 것과, '필연적인 것을 더 아름답게 보는 법'이라는 것, 그리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고 싶은' 그것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안 일어난다. 마음 내려놓고 떠나자. 스위스 몽블랑에서, 헤르만헤세가 글을 썼던 그 공간, 토마스만의 <마의 산>의 무대에서 나를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하다가 돌아오자. 

먼 길 떠난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까운 곳에 마실 가듯 간다고 생각하고 떠나서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되어 노닐다가 돌아오자.(계속)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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