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논어(論語)에 “배우고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말처럼 배움의 즐거움은 그 어떤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게 즐겁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터득한 일부 사람들에게 한정되는 말일 것이다. 

그 배움의 즐거움을 양명의 제자인 왕심재(王心齋, 1483~1540)는 <낙학가(樂學歌)>로 이렇게 남겼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저절로 즐거운데, 자연히 사욕이 얽어맬 것이다. 사욕이 일단 싹이 텃을 때, 양지는 그래도 자각을 한다. 한번 깨달으면 곧 사라져 없어지며 인간의 마음은 옛날대로 즐겁다. 즐거움은 이 배움을 즐기는 것이고, 배움은 이 즐거움을 배우는 것이다.

즐겁지 않으면 배움이 아니다. 배우지 않으면 즐거움이 아니다. 즐겁게 되면 곧 그런 뒤에 배우고, 배우면 곧 그런 뒤에 즐겁다. 즐거움이 배움이고, 배움이 즐거움이다. 아아, 천하의 즐거움을 배움이라고 말하면 어떠한가! 천하의 배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면 어떠한가!”

즐거움의 대상이 어디 배움뿐이겠는가? 소비가 미덕인 사람은 소비를 통해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이 있고, 봉사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며,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또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은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나는 걸으면서 세상을 보고, 읽고, 쓰는 것을 즐거운 일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데... 당신은 어느 것을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며 살아가는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잠시 살다가 간다. 겸손하게, 성실하게, 우리에게 이 세상이 부여한 삶을 잘 살아야하는 이유다.

문득 경기전 작은 문 사이로 단풍이 곱다. 이 단풍은 며칠이나 고울까? 한잎 두잎 지는 나뭇잎 사이로 세월은 훌쩍 지나갈 텐데.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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