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섬진강 살류 진안군 마령면의 굴 속에 세워진 누각 수선루는 조선 숙종 12년(1686) 연안 송씨 4형제가 조상의 덕을 기리고 도의를 연마하기 위해 지은 2층 목조 건축물이다. 고종 21년(1884)에 송석노가 고쳐 세웠으며, 고종 25년(1888)에 송병선이 다시 고쳐 오늘에 이른다. 정자 앞에는 섬진강 상류천이 굽이돌아 좋은 경치를 이루는 산의 바위굴 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수선루는 신선이 낮잠을 즐기며 유유자적한다는 뜻으로, 연안 송씨 4형제가 80세가 넘도록 아침 저녁으로 정자를 오르내리며 바둑도 두고 시도 읊는 모습이 옛날 4호의 네 신선이 놀았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하여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고종 25인 1888년과 1892년에 중수된 정자로 자연암반으로 형성된 동굴에 위치해 비정형적인 틈 사이에 끼워져 있다.상부는 휜 창방(기둥머리를 좌우로 연결하는 부재)을 사용했으며, 방 내부는 연등천장(椽燈天障 별도로 천장을 만들지 않고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켜 만든 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중기 시대와 달리 파격적으로 시도됐던 건축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수선루는 누정(樓亭) 건축으로써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고 지형을 이용해 암굴에 건축했으며, 지붕의 전면은 기와로 하고 후면은 돌너와로 마감해 지역의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라 안에 유일하게 암굴레 조성된 누정의 기능과 형태에서 벗어나 있는 독특한 외관과 특색 등이 전통적인 누정건축의 한 부류로 평가받고 있어서 202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자연과 조화...송 판서 굴 앞산 정면에 각시굴 남아 그때의 이야기 전해줄 따름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고, 지형을 이용하여 암굴에 건축했으며, 지붕의 전면은 기와로 하고 후면은 돌 너와로 마감해서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수선루가 보물로 지정된 이유였는데, 이곳에 모셔진 송보산이라는 사람인데, 그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정여립이 의문사한 진안의 죽도를 바라보는 산 천반산이다.

천반산의 명물 송판서굴은 천반산 아래에 있는데, 바위굴 2개가 15미터쯤의 거리를 두고 서북쪽을 향하여 쌍굴을 형성하고 있는 이 굴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굴로서 큰 굴의 길이가 7미터쯤 되고 작은굴은 5미터쯤 되며 10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쉴 만한 넓이다. 이 굴의 중간쯤의 바위틈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약수라고 전해지는 한 줄기 물길이 있다.

이 굴 이름의 유래가 된 인물인 송 판서는 호는 보신이며 아호는 퇴휴제로서 연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438년(세종 20)에 도승지에 올랐고 1449년에 예조판서에 올랐는데, 그는 1456년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하직하고 처가인 장수군 계남면 방아재로 낙향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이조판서를 지내다가 먼저 낙향한 김남택과 한 마을에 살면서 낙산낙수를 즐기며 도학과 제자백가를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484년에 죽었다.

그후 송판서는 이 고장 선비들의 추앙을 받아 장수 월강사와 진안 마령의 구산사에 모셔졌다. 그런데 낙향한 송 판서가 은둔할 곳을 찾던 중에 도인의 안내를 받아 이 굴을 발견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송 판서가 이곳에 머물러 있는 날마다 하루 세끼 식사를 누군가 몰래 갖다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난 후 송판서는 어느 여인이 식사를 가지고 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송 판서가 그 여인을 붙들고 이유를 묻자 여인은 “천리 밖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할 뿐 더 이상 한마디 말도 없이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지금도 송 판서 굴 앞산 정면에 각시굴이 남아 그때의 이야기를 전해줄 따름이다.

그 뒤 이 굴은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이 대동계원들을 거느리고 병마를 훈련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진안 수선루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불과 몇 년 안 된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뿐, 찾는 사람들이 없었는고, 섬진강을 처음 걸을 때만해도 그곳으로 난 길이 없어 무심코 지나쳤는데, 어느 날 문득 그곳으로 가서 보니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정자 중에 가장 특이한 정자가 수선루였다. 중국에는 커다란 바위벽에 암굴이 많고 그곳에 정자를 지운 곳이 많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암굴에다 그 지형에 맞게 지은 정자가 수선루였다.

섬진강 따라 1㎞ 남짓 거슬러 올라간 천변 산기슭 암굴에 위치...보물 승격

마침 마령면에서 농어촌공사에서 마련한 강연이 있어 그 정자를 소개하며 보물로 지정하도록 문화재청에 올리라고 하자 진안군 의회 조존열 의원이 가능하겠느냐고 해서 가능하다고 했고, 결국 보물로 승격된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고 있는 이 수선루는 마령면 강정리 월운 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약 1㎞ 남짓 거슬러 올라간 천변의 산기슭 암굴에 위치해 있는 정자로 숙종 12년인 1686년에 연안 송씨 4형제 송진유(宋眞儒), 송명유(宋明儒), 송철유(宋哲儒), 송서유(宋瑞儒) 등이 건립한 정자다. 그 뒤 고종 21년인 1884년에 후손 송석노(宋錫魯)가 중수하였고 1고종 25년인 1888년 연재 송병선(宋秉璿) 등이 재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안 군지』에 송병선이 지은 「수선루 중수기」가 게재되어 있으며 진안 수선루 사변(四邊)에는 ‘연안송씨수선루통문(延安宋氏睡仙樓洞門)’ 이라는 아홉 자가 새겨져 있다. 이 정자 이름인‘수선루’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崔啓翁)이 연안 송씨 네 형제가 갈건 포의(葛巾布衣)하며, 팔순이 되도록 조석으로 다니며 풍류함이 진나라 말년에 전란을 피하여 협서성의 상산(商山)에 은거한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용리 선생(用里先生), 기리수(綺里秀) 등의 기상과 같다 하여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정자는 자연 암굴을 이용하여 이층으로 세워져 있고 이층 중앙에 ‘수선루(睡仙樓)'라는 현판이 있으며 1층의 문을 통하여 오르게 되어 있고, 암굴 아래로 흐르는 물이 샘을 이르고 있으며 정자에 올라가서 보면 섬진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방안의 벽에는 여러 형태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진안 수선루는 2019년 12월 30일 보물 제2055호로 지정되었다.

수선루 입구에 있는 구산서원은 순조 28년인 1828년(에 송보산(宋寶山)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되었다가 고종 5년인 1668년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49년에 다시 설단(設壇)되어 봉사하다가 1967년에 이르러 중건되었고 1967년에 진안유림의 발의로 김문기(金文起)와 송림(宋琳)이 추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저작권자 © 전북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