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출신 ‘1세대 인권 변호사’ 한승헌 선생이 20일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서초구 강남성모병원에 차려졌으며 장지는 광주 5·18 민주묘지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민변의 원로 회원인 한 변호사가 20일 밤 9시께 작고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1934년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나 전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7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검사로 임관했다. 그 후 5년 간 통영지청·법무부 검찰국·서울지검 등에서 근무했고, 1965년 검찰을 떠나 변호사로 개업한 뒤 엄혹한 독재 정권에 맞서 동백림 사건(1967), 통일혁명당 사건(1968), 민청학련 사건(1974), 인혁당 사건(1975),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1980) 등을 변론하며 ‘시국사건 1호 변호사’, '1세대 인권변호사'로 불렸다.
'민주화’라는 시대 요구에 몸소 응답
독재정권 서슬이 퍼렇던 1970년부터 1980년대, 당시 ‘민주화’라는 시대 요구에 몸소 응답했던 고인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며 김대중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역임하고 노무현 정부에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전북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고인의 생전 이력과 저서에서에서도 변호사로 누릴 수 있는 안온한 삶을 스스로 뒤로 물렸음이 묻어난다. 대신 그 자리를 궂은 일과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일들로 채웠다. 법정 싸움과 거리 투쟁 등으로 두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고인은 특히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조작 사건부터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 한국 현대사를 얼룩지게 한 시국사건들의 한 복판에 섰다. 양심수와 시국사범 변호에 발 벗고 나섰다. 이후에도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의 변론을 맡았다.
변호한 시국 사건이 100건이 넘는 가운데 어느 하나 가벼운 사건이 없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개인적으로는 어떤 사건이 제일 잊지 못할 사건으로 꼽는지’ 묻는 질문에 고인은 생전에 이렇게 술회했다.
“그게 이제 굳이 하나만 사건을 추려서 말씀을 드린다면 글쎄... 1974년 봄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항한 우리나라의 청년 학생들이 엄청난 저항,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있었어요. 특히 민청학련의 배후로 조작된 인민 혁명당 사건, 소위 인혁당 사건의 여러 분들, 대법원 판결 불과 몇 시간 뒤에 바로 처형이 되는데 그런 처형된 피고 중에 한 젊은이는 제가 담당했던 그런 분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잊을 수가 없죠. 특히 제가 담당했던 그 젊은이가 서울구치소에 1975년 4월 9일 새벽에 형 집행당해서 끌려갈 때 사실은 저 자신도 반공법으로 구속돼서 서울구치소에서 그런지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었죠. 그러니까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변호사도 구속 상태이고 의뢰인도 구속 상태인 당시의 기막힌 상황을 당시 선생은 이렇게 부연 설명했다.
“이게 뭐냐 하고 그 안에서 알아봤더니 대법원 판결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되고 그리고 열 몇 시간 만에 바로 새벽에 형 집행을 한 것이죠. 무슨 재심 기회도 주지 않고 가족과 접견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러니까 당시에 박정희 정권은 정말 천인공노할 야만적인... 학생이 희생이 된 거죠. 시체도 내놓으라고 울부짖고 했는데 세상에 시신조차도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은 그런 악독한 정권이 바로 박정희 정권이었죠.”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졌던 엄혹한 시절, 인권을 변호하다

참으로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졌던 시절에 인권을 변호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선생은 그래서 늘 생전에 우리나라가 사법 살인 국가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받았다고 강연 자리에서 강조했다. 선생은 문재인 대통령과도 교도소에서 나눈 '메리야스 사연'이 있다. 어떤 사연이었을까. 선생은 지난 2019년 <사람과언론>의 특집 인터뷰에서 당시 사연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참 우연과 우연이 부딪친 건데요. 내가 1975년 봄에 당국이 저를 반공법으로 잡아넣었는데 그때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많은 시위 학생들이 잡혀오고 했죠. 그런데 그 제가 같은 층에 옆방에 어떤 학생이 또 잡혀왔다고 해서 한여름이고 해서 얼마나 땀 흘리고 힘들겠어요.
그래서 제 메리야스, 내의를 교도관 통해서 옆방에 보내줬죠. 그게 누구인지 이름이나 그런 건 알 바가 아니었고 다만 경희대 학생인지 데모를 하다 잡혀왔다 하는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나중에 그 후에 석방이 돼서 또 부산 가서 노무현 변호사 만나는 자리에서 문재인 변호사 만났는데요. 자기가 바로 그 메리야스 내의를 받은 문재인이라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마나 참 반갑고 감격스럽고 그런 사이였어요.”
훗날 '메리야스 나눠주던 사이'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선생이 작고하기 전에 출간한 <스물일곱 명의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 ‘그분을 생각한다’>에서 “이 세상에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도 있다”며 “우리는 자칫 자신이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죄인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준엄한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선생은 작고하기 전까지 법조계 원로로 냉철한 이성으로 시대를 꿰뚫는 혜안을 소유한 이 시대 진정한 원로 법조인이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검경 수사권 조정 등에 대해서도 선생은 일찍이 이렇게 소신을 밝혔다.
“경찰이 수사권을 어느 정도까지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가, 그렇게 했을 경우 국민 인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가, 또 검찰이 모든 걸 지휘하고 결정하는 이른바 ‘검찰왕국’이 개혁될 수 있는가 등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결코 만만한 과제는 아니지요. 정부 해당 부처 간의 입장과 견해 차이를 어떻게 조정하느냐, 다시 말해 부처이기주의를 초월해 오로지 국민 인권과 권력 민주화를 최대공약수로 받들고 제도 개혁을 해야 될 것입니다. 명분 여하 간에 상당한 진통이 수반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외풍’ 못지않게 법관에 대한 ‘내풍’이 더욱 위험”
'법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는 질의에 대해서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강조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 고위 법관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엄청난 사태도 어느 면에서 사법부가 짊어져야 할 자업자득의 업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사법부의 그동안 불미스러운 여러 맹점을 가감 없이 점검하고 개혁해야죠. 그런데 사법권 독립과 맞물려 있는 문제들이 많기 때문에 법원 개혁엔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죠.
사법권 독립이 외부요인이 빚어낸 걸림돌이라면 법관 독립은 사법부의 내부적 요인과 얽혀 있어 들춰내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사법부에 대한 ‘외풍’ 못지않게 법관에 대한 ‘내풍(內風)’이 더욱 위험하다는 경고를 여러 번 되풀이한 바 있습니다. 사법부의 자생적 치부를 먼저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게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어서 걱정입니다.”
선생은 또한 '사법부가 독립을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외풍이 사법권을 침해할 수 있지만 사법부 내의 내풍도 사법을 망치는 위험요인이 된다”며 “법관들 또는 검사들의 굳건한 신념과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치권력의 입장에 맞춰 눈치 보며 재판하는 자기 모독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는 말은 후배 법조인들이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1세대 인권변호사 한승헌 선생'이 걸어온 삶의 자취

1934년: 전북 진안 출생
1957년: 전북대 정치학과 졸업
1965년: 법무부와 서울지검에서 검사로 봉직한 후 변호사로 전신
1973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
1974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
1975~1980년: 독재권력의 핍박을 받는 양심수 내지 정치법들의 변호에 힘을 기울이다 자신도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거듭 투옥되어 22개월 간 복역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1993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1998~1999년: 감사원장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저서>
‘위장 시대의 증언’, ‘정치재판의 현장’, ‘역사의 길목에서’, ‘분단시대의 법정’,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전7권)’, ‘피고인이 된 변호사’,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 ‘권력과 필화’,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분을 생각한다’ 등 40여 권.
※위 글은 필자가 2019년 늦은 가을, 전주에서 강연을 막 마친 선생과 인터뷰한 내용을 <사람과 언론> 제7호(2019 겨울)에 게재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여 수정한 내용임.
/박주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