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만남 - 1세대 인권 변호사 한승헌

한국 현대사를 얼룩지게 한 시국사건들 한복판에 섰던 인권 변호사,
왜 그는 사법개혁의 중심에 섰을까?
“사법개혁, 외풍’ 못지않게 ‘내풍’ 더 위험”
한승헌 변호사, 조국 법무장관 퇴임하던 날 전주에서 만나다
하필 그날은 조국 법무부장관이 사임을 결정하던 날이었다. 85세의 노구를 이끌고 ‘사법개혁’이란 무거운 주제로 들고 강연하기 위해 고향 전주엘 찾아 온 것은 지난 10월 14일. 1세대 인권 변호사는 이날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전북지역위원회가 마련한 '사법개혁, 노무현을 생각한다'란 제목으로 특별강연을 하러 온 것이다. 한승헌 변호사. 이날 그의 특별강연은 정말로 특별했다.
원래 계획은 격변하는 시대 상황과 왜곡된 법치의 실상을 ‘다시 보기’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의 사법개혁 과정과 내용을 되짚어보고, 노무현 대통령이 수행한 사법개혁과 민주주의의 실현 과정과 내용을 생생하게 들려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조국 장관의 사퇴로 역대 최단시간 법무부 장관 재임 기록을 남긴 순간이어서 그런지 그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시대의 올바른 법치주의와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국민 각자의 역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공감대 형성을 위한 소중한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메웠다. 1세대 인권 변호사이자 제 17대 감사원장을 역임하고 참여정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그로부터 조국 사태로 더욱 목마른 사법개혁, 검찰개혁에 관한 혜안을 듣기 위해서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던 그는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법과 인간의 항변', '권력과 필화' 등 많은 저서를 통해 "법관은 권위의 화석이 아닌 정의의 화신이어야 한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등 추상같은 명언으로 1세대 인권 변호사의 상징으로 자리해 왔다.
그런 그가 본격적인 강의 시작에 앞서 우리 사회의 화두인 검찰개혁과 관련해 “항상 개혁의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어왔다”고 강조하면서 “검찰은 내부 이기주의를 초월해 오로지 국민 인권과 권력 민주화를 최대공약수로 받들고 제도 개혁을 해야 될 것”이라고 일침을 던졌다.
하루 전만해도 그는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늙은 사람이라 귀한 지면에 빈곤한 말이나 오래된 내용을 싣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더니 강단에선 또렷한 어조와 유머로 참석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어제 인터뷰 거절은 과겸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적폐청산의 한 가운데 놓인 검찰개혁, 더 나아가 사법개혁의 혜안이 그의 강연 내용에 담겨 있었다. 강연에 앞서 ‘왜 이 시대에 다시 노무현인가’에 대한 강연 전제로 무게감을 더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열망했던 변호사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마음속에 살아있습니다. 저 역시 같은 법조인으로 기난긴 독재치하에서 압제세력과 맞서 분노하고 싸우는 일에 그분과 대열을 같이해온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바른 세상을 위한 싸움의 중간에 먼저 이승을 떠나셨습니다. 독재자가 설치는 세상에서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변호사가 먼저 사법의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이번 강연을 통해 저는 노 대통령께서 당하신 법난(法難)의 실상과 그분의 직속이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수행한 사법개혁의 과정과 내용을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올바른 법치주의를 통한 정의사회를 구현하는데 서로가 아름다운 도반(道伴)이 되기를 염원합니다.”
다음은 한 변호사의 ‘사법개혁, 노무현을 생각한다’란 주제의 주요 강연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사법개혁의 중심에 선 ‘사개추위’ 위원장 맡기까지

2004년 12월. 청와대에 들어가 일하는 법조계 후배 한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대통령 직속 기구로 신설되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청와대측의 요청을 전하러 온 것이다.
나는 즉석에서 나보다 더 적임인 분을 추천했고, 그의 내락까지 내가 받아오면 상부에 다시 건의하기로 했다. 나는 그 변호사를 찾아가 점심까지 사면서 간곡히 권유를 했으나 결과는 무위로 끝났다. 결국 나는 설득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개추위 위원장이란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사개추위 최종 의결기구인 본회의는 장관급 및 그에 상응한 민간 각계 인사로 구성되고, 국무총리와 민간측 인사가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정부측에서는 총리를 비롯해 교육․법무․국방․행정자치․노동․기획예산처 장관 등이, 사법부에서는 법원행정처장이 당연직 위원으로 나왔고, 민간측에서는 공동위원장인 나와 김금수(당시 노사정 위원장)․박재승(당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송상현(당시 서울대 교수)․장명수(당시 한국일보 이사)․신인령(전 이화여대 총장) 등이 위원으로 위촉됐다. 본회의에서 다룰 안건을 사전 심의하기 위해서 차관급 및 그에 상응하는 민간 각계 인사로 구성되는 실무위원회(국무조정실장이 위원장)가 있고, 법원․검찰․변호사회․학계에서 온 전문가와 행정 지원팀으로 구성된 기획추진단이 있었다. 사법개혁의 중심, ‘사개추위’는 참여정부 초기, 그렇게 구성되었다.
“마지막 구간 주자라는 각오로 임해”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법개혁은 이미 1993년 김영삼정부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논의만 계속되었을 뿐, 이렇다 할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정권이 바뀌곤 했다. 그러던 것을 노무현정부 들어와서 대법원의 사법개혁위원에서 2년 동안 연구 논의한 성과를 사개추위가 이어받아 2005년 정초부터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역전경주 최종 구간의 주자인 셈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그처럼 대대적인 사법제도 개혁이 필요한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8.15해방 뒤에도 일본법을 모방한 법이 많았고, 6.25전란으로 법체계의 정비가 부진했으며, 장기간의 군사독재 하에서 악법이 양산되었고, 나아가 시대의 변화에 걸 맞는 선진 사법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 등을 들 수가 있다. 또한 국민의 신뢰를 받는 사법의 실현도 당연히 개혁의 지향점이 되었다.
‘사법개혁’이라는 구호와 깃발은 현란하지만, 그 실현은 결코 쉽지가 않다. 우선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그 어려운 물음에 정답을 써야 하는 일을 내가 챙겨야 하다니, 벅차는 부담이었다.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밑그림으로 하되, 원점에서 다시 검토를 하기로 했다.
우리가 선정한 개혁과제는 스무 개가 넘었다. 그것들을 여기서 다 설명한 겨를이 없지만, 그 항목만이라도 알려드리고 싶다. 우리나라의 법치주의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줄로 믿기 때문이다.
1. 국선변호의 전면 확대
2. 범죄피해자의 보호
3. 재정신청 전면 확대
4. 국민의 형사재판참여제도 실시
5. 법학전문대학원 도입
6. 군 사법제도 개혁
7. 공판중심주의적 법정 심리절차 확립
8. 고등법원 상고부 설치
9. 법조윤리 확립
10. 인신구속 및 압수․수색․검증제도 개선
11. 경죄사건 신속처리
12. 양형제도 개선
13. 법무담당관제도 개선
14. 재판기록 공개
15. 국민소송제도 도입
16. 징벌적 배상제도 도입
17. 기업 내 변호사제도 개선
18. 하급심의 강화
19. 노동분쟁 해결제도 개선
20. 법률구조제도 개선
21. 재판 외 분쟁해결제도(ADR) 활성화
22. 집단소송제도 도입
내부의 반대․저항이 큰 적
물론, 사개추위는 위에 열거한 여러 과제들을 면밀하게 연구․검토하고 중론을 모아서 그 입법화를 위한 마무리작업을 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입법으로 성취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런 갈림길에는 나름대로 이론적 또는 현실적 요인이 있게 마련이었지만, 현상의 변화 내지 개혁에 의한 불이익을 염두에 둔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개혁을 소리 높이 외치다가도 그 대상 또는 방향이 자기 쪽으로 향한다 싶으면 금방 말이 달라지기 쉽다. 그러나 개혁을 입법으로까지 끌고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끝까지 개혁 의지를 견지하고 인내와 설득을 통해 서로의 견해차를 좁혀 나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도 개혁에 찬성하지만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물불가리지 않고 반대하는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공판중심주의 강화를 위한 증거법 개정문제를 놓고 한 때 검찰 일부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소통과 이해를 통한 절충으로 원만한 귀결을 보았다. 법무부장관과 만나서 의견을 나누고, 검찰총장과 전화로 대화하는 한편, 전국 검사들의 모임에 사개추위 개정안의 근본 취지와 정확한 내용을 전했다. 사개추위의 실행위원회에서 5인 소위원회를 만들고, 전후 6회에 걸친 장기간 논의 끝에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은 아주 교훈적이었다.
나는 자기가 속한 부처(또는 집단) 중심의 주장에 대해서는 법의 개정작업을 정부의 주무부처에 일임하지 않고 굳이 사개추위 같은 특별기구를 두어 관계 국무위원과 민간 대표들이 함께 논의하도록 한 이유를 상기시켰다. 내가 중요시한 것은 사개추위의 민주적인 논의구조였다. 나아가서 위원회 안팎의 의견과 여론에 귀를 열어놓는 일이었다.
검찰의 반발을 설득․절충으로
나는 계량적인 설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개추위의 그러한 노력을 통해 수치를 통해서 증명을 하자면 이러하다. 2년 동안의 활동기간에 우리 위원회 내부 회의는 논외로 치고라도, 외부 전문가 초청토론회 46회, 연구회 31회, 공청회 7회, 이렇게 많은 외부 의견 수렴을 했다. 그와 별개로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중론을 모으기 위한 활동도 열심히 했다. 언론 간담회 17회, 강연 토론회 23회, 신문 기고․방송 출연 146회, 여론조사 4회, 모의재판 4회, 보도자료 배포 34회 등.
이렇게 열거해 놓고 보니 무슨 전시행정이나 자랑처럼 되어서 죄송한데, 국민과 함께 하는 개혁의 선례를 남기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법원, 법무부, 검찰, 학계, 시민단체 등에서 제공한 자료와 연구의 성과물도 많이 도움이 되었다. 위원들과 기획추진단 멤버들이 몇 개의 반으로 나누어 해외 선진국 10개국을 찾아가서 나라마다의 제도와 실상을 보고 배우기도 했다.
사법개혁을 위한 여러 과제 가운데서 국민과 언론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것은 ‘로 스쿨’로 알려진 법학전문대학원 도입문제, 공판중심주의 강화를 주안으로 한 형사소송법 개정, 그리고 배심재판으로 통칭되는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제도, 이 세 가지였다.
이에 고나한 글을 준비하면서 ‘사개추위 관련 언론기사 모음’을 다시 열어 보았더니, 기사의 크기와 빈도에 있어서 단연 세 과제가 ‘빅3’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기사들이 때로는 정확성과 공정성에서 아쉬움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언론의 기여도는 상당했다고 본다. 그러기에 위원장의 역할 중에 기자들을 만나고 원고 쓰고, 방송에 나가는 일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나는 회의장에서는 의장이지만, 나오면 홍보담당(공보관)이나 다름 없었다.
사법개혁의 마무리, 보람과 아쉬움
사개추위는 아래 기획추진단에서 올라오는 안건을 거의 요식행위로 처리하는 그런 기구가 아니었다. 사법개혁의 산실답게 무제한의 논의․토론이 거듭되었고, 첨예화된 의견대립으로 밤늦도록 회의를 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위원회가 의결한 25개의 개정(또는 제정) 대상 법률안은 국무회의를 거쳐 2005년 5월부터 2006년 7월 사이에 정부안으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그런데 법안이 국회로 넘어간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여야 간의 어수선한 정쟁에 휘둘려 사법개혁안의 심의가 외면당하거나 지지부진했다. 사개추위의 활동시한인 2006년 연말이 다가오는데도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은 8개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상임위원회에서 걸려 있거나 아예 상정도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법개혁의 핵심 법안은 눈 흘김의 대상이 된 채 소박을 맞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를 사립학교법 개정과 연계시키며 태업을 계속 했고, 사개추위 안을 뒤집으려는 공작도 난무했는가 하면, 직역이나 지역 사정에 얽매이는 의원들의 고충도 여기에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권에 대한 야당의 본능적 거부감도 개혁 저지의 심리적 요인으로 꼽혔다.
2006년 11월 20일, 연말 해산을 앞둔 사개추위의 마지막 회의가 수송동의 위원회 회의실 아닌 정부종합청사 9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회의가 끝난 뒤 10층 브리핑 룸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사개추위 위원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공동위원장인 한명숙 국무총리가 국회 입법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이어서 내가 위원회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발목 잡는 야당 찾아 손목을 잡고
그 뒤에도 나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거듭 드나들었다. 언론에서, 한나라당이 사법개혁의 발목을 잡는다기에 나는 그들을 찾아가 손목을 잡았다. 각 당 지도부를 만나고 핵심 법안 통과의 시급성을 역설했다. 개인적으로 다 아는 분들이어서 우호적인 분위기였지만 한나라당 측이 하는 말의 진정성은 함량이 낮아 보였다.
국회 의장단도 찾아갔고, 로스쿨법안을 다루는 교육위원회 위원장 방에도 들렸다. 김우너기 의장을 만나 좋은 반응을 얻게 되어 ‘원기’가 났다. 부의장 두 분도 만나서 부탁을 드리고 교육위원회 위원장 방으로 향했다. 한나라당 소속이긴 하지만, 같은 법조인으로서 잘 아는 사이니까 말이 잘 통하겠지 싶었는데 그의 테이블 명패를 보니 ‘황우려’가 아닌 ‘황우여’였다. 그래서 우려는 없어졌는데,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니 혹시 ‘우여’곡절이 있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과연 우여곡절은 현실로 나타났다.
교육위 소위에서 로스쿨법안을 위원회 전체 회의에 넘겨 통과시키기로 여야 간에 합의를 해놓고도 하루 밤 사이에 한나라당이 표변해버린 것이다. 일이 풀린다고 본 내 예측이 무참히 망가졌다. 그런 판국에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나는 말했다.
“이제 예측 가능성에 의존할 수는 없다. 차라리 앞으론 예측불가능성에 기대를 걸겠다.”
언제 상황이나 계산이 달라지면 거짓말처럼 허망하게 법안 통과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해가 바뀐 2007년 4월,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고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겨우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대선정국이 다가오는 시점이어서 나머지 법안 처리는 물 건너 간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투자와 준비를 해놓고 2008년 3월의 로스쿨 개학을 고대하는 여러 대학과 학생․수험생들의 낭패와 손실은 막심해진다.
60년 만의 사법개혁, 난관을 헤치고...
그런데 7월 3일 갑자기 ‘여야 로스쿨법 처리 합의’라는 긴급 뉴스가 떴다. 하지만 밤 11시 반이 지나도록 종무소식이었다. 스포츠채널의 윔블던 테니스 생중계를 보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지상파 방송에 눈과 귀를 모으고 있었더니 마침내 ‘로스쿨법 통과’란 긴급뉴스가 나왔다. 국회 회기가 끝나는 자정 3분 전의 ‘아슬아슬’이었다. 다른 미결 법안이 많이 남아서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핵심 법률 3개가 입법으로 완결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로스쿨은 학교 수와 입학 정원 문제 등으로 논란이 많았지만 법 시행 과정에서 큰 변고 없이 진척되어 문을 열었고, 여전히 문제점이 남아 있으나 사법시험제도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법조인 양성기관으로 발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국민참여재판 또한 생소하지만 ‘국민에 의한 사법’으로 발돋움하는 민주적 사법시스템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역사적인 사법개혁에 일조를 한 것은 나로서 큰 보람이었다.
사법권의 독립을 위한 성찰
법조계 안팎의 다양한 체험을 놓고 말한다면 나는 전후 56년 동안 법조인으로 살아오면서 이 나라 사법의 과거와 현장, 양지와 음지를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의 하나이다. 섬판관석(군재), 검찰관석, 변호인석 등을 두루 거친 외에 피고인석, 방청석에도 앉아보았다. 수감생활도 민간 구치소, 육군 교도소, 소년교도소를 두루 순례했다. 우리나라 교도소 네 종류 가운데 오직 한 군데, 청주 여자교도소만 못 가보았다. 이런 곡절 많은 법조인의 삶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연사로 불려나온 이유인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결코 자신의 수난의 기억에 집착하지 않고 그동안의 사회적 공론에다 법관들의 목소리까지도 재생하면서 강연을 풀어나가고자 한다.
사법부의 인물난과 민족정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초기에는 ‘민족정기’가 온 겨레의 키워드였다. 사법부의 구성에 있어서는 더욱이나 그러했다. 따라서 일제치하에서 판사나 검사로 활동한 사람들은 일본 식민지 통치의 한 축을 맡아 친일 또는 부일(附日)을 했던 터이므로 광복된 새 나라에서는 마땅히 퇴출되거나 단죄되어야 할 대상들이었다. 하지만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재판업무를 맡을 인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오히려 판검사로 중용하는 모순도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와 같은 ‘인물난'을 이유로 사법의 정체성은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제하에서 법정 안팎애서 독립투사들을 변호하고 민족운동을 이끌어 오는 등으로 항일운동에 헌신했던 가인 김병로 선생(1887~1964)이 계셨기에 사법부의 수장만이라도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인물을 모실 수가 있었던 것이니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가인(街人)이라는 아호는 ‘나라 없이 방황하는 거리의 사람’이란 뜻. 이승만 대통령은 당초에 다른 인물을 대법원장에 지명하려 했으나 일제하에서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이인(李仁) 법무부장관의 강력한 추천으로 가인을 지명했다. 가인은 이승만 대통령의 안하무인격인 사법부 폄훼에 대해서 강하게 막섬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을 수호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청빈한 삶으로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가인의 뒤를 이은 후임 대법원장들은 집권자 내지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가인처럼 확고하고 분명한 선을 긋지는 못했다.
사법부의 독립, 그 빛과 그림자
무릇 3권 분립은 국가권력 상호간의 견제를 기초로 하는 만큼 법원 내지 법관의 독립은 올바른 재판의 생명과 같다. 그 때문에 역대 권위주의 정부 내지 독재정권 하에서 사법부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사법발전재단에서 간행한 ‘역사 속의 사법부’에서도 ‘사법권 독립에 대한 위협’이라는 항목이 따로 나와 있고, 거기에는 박정희 정권 때의 ‘무장 군인 법원 난입’, ‘수사 정보기관의 사법부에 대한 간섭’, ‘법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그리고 전두환 정권 하에서는 ‘국가안전기획부의 재판 간섭’ 등의 소제목 밑에 그 구체적 실상을 기록해 놓았을 정도였다. 또한 법원행정처에서 간행한 ‘사법사’에도 구체적 사건까지 열거해가면서 압제정권의 사법 간섭 사례를 기록해 놓았다.
집권자의 압제조치나 탄압사건 등 이른바 시국사건 또는 정치적 사건에서 법원이나 법관은 정치권력의 압력을 받는 일이 빈번했고 이에 추종하기도 했다. 그런 아픔과 치부는 다름 아닌 전 현직 법원 고위직 및 법관들의 개탄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른바 유신통치시대를 혹독하게 겪은 이영섭 대법원장은 퇴임에 즈음하여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졌다. 소신대로 못한 것이 많다. 당시 법원의 위상이 말이 아니었다. 각본대로 따라달라는 주문도 받았다”고 고백한 바도 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용기
유지담 대법관은 퇴임 이후 이렇게 말했다.
“권력에 맞서 사법의 독립을 진정코 외쳤어야 할 독재와 권위주의시대에는 침묵하면서, 정작 사법부에 대한 경청할만한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때, 이를 외면한 채 사법권 독립이라든지 재판의 권위라는 등의 명분으로 사법부의 집단이익을 꾀하려는 우려가 있는 움직임에도 그냥 동조하고 싶어 했다.”
6공화국 노태우 정권 출범 당시 소장 판사 85명이 대법원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사법권의 독립은 사법부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고인들의 투쟁의 성과로 얻어졌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역사 속의 사법부’의 발간에도 ‘어두운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한사코 부인하고 거부하려 한다면, 이는 스스로 자기 존재의 근거를 허무는 일이다’라는 대목이 들어 있다.
얼마 전 OECD 보고서에 우리나라 국민의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도가 27%(조사대상 42개국 중 39위)에 불과하다고 발표되어 충격을 준 바 있다. 이 조사에 대한 얼마쯤의 의문도 없지는 않으나, 우리나라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높지 않다는 것이 재확인된 점은 부정할 수 없고 보면, 사법부로서는 이를 쓴 약으로 알고 반성의 자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법의 굴절 속에 용기 있는 법관도

정치적 사건의 재판은 사법의 명과 암을 집약하여 국민 앞에 보여주는 시험대가 된다. 해방 이후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우리 사법부는 바로 그 집권세력에 시달리는 시련을 겪어왔다. 그런 풍파 속에서 일부 법원 수뇌부와 일선 법관들이 자의든 타의든 정부의 의도에 추종하거나 영합하는 재판을 함으로써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치부였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권력의 간섭과 위협을 무릅쓰고 올바른 재판을 견지하여 사법의 명맥을 지킨 법관들, 그로 인해서 온갖 박해와 불이익을 당한 법관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으로 몰리어 간첩으로 기소된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 당수에게 간첩 무죄를 선고한 유병진 부장판사, 1964년, 무장 군인의 난입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를 끝내 거부한 양헌 부장판사, 1968년, 동백림사건 상고심에서 간첩 무죄의 취지로 파기환송 판결을 한 대법원 판사들, 야당 지도자의 측근들을 구속한 월간 <다리>사건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하고 옷을 벗은 목요상 판사, 대통령긴급조치 사건에 무죄판결을 하고 좌천된 후 사임한 이영구 판사 등 용기 있는 법관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전후 세 번에 걸친 사법파동(1차 : 1971년, 2차 : 1988년, 3차 : 1993년)에 분연히 나섰던 많은 법관들도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자 용기를 발휘했다. 사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뜻 있는 법관들의 고민과 용단이 우리 사법부의 체통을 살리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한다.
법관은 권위의식의 화석 아닌 정의의 화신이어야
법관은 법률지식으로 굳어진 화석(化石)이 아니라 정의와 공평의 화신(化身)이어야 한다. 사회의 변동 발전과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보편적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권력의 하향적 지배보다 권력에 대한 상향적 견제가 민주적 법치주의 본질이라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그리고 법원의 재판이 사법부 밖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특히 민주화가 진퇴하는 시류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권의 성향에 근접해가는 듯한 변화추세는 당연히 배제해야 옳다.
자칫 법관은 재판업무의 성격상 군림하는 자세에 길들여지기 쉽다. 참된 권위와 그릇된 권위의식을 분별해야 한다. 사법권의 독립을 국민과의 거리를 멀리하는 격리 고립상태와 혼동해서는 안 되며, 귀를 닫는 것이 사법의 성역을 지키는 처방으로 오해할 염려도 있다. 사실인즉, 국민과의 소통과 이해를 도모하고자 사법부의 각급 법원은 여러 자문기구와 심의기구에 외부 인사를 참여시키고 있으며, 국민 각계와의 교류를 넓히는가 하면 공청회 등으로 여론 파악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노력의 성과는 사법부의 민주적 기반을 보완하는 데 바람직한 결실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법관의 고뇌, 재판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금도(襟度)
국가 3부의 공직자 중에서 가장 사명감이 높고 공정을 기해야 하는 곳이 사법부이다. 끝으로 손지열 전 대법관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상기해드리고자 한다.
“법관은 올곧은 자세로 나라와 공동체를 지탱해오던 선비정신을 되살려내야 한다. 재판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강직함만으로는 부족하고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간에 대한 매정을 두루 갖추는 것이 긴요하다.”
그는 강연 도중에 1세대 인권 변호사답게 "법관은 권위의 화석이 아닌 정의의 화신이어야 한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등 추상같은 화두를 던졌다.
최근 검찰개혁과 관련해 그는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다”고 강조한 대목은 두고 두고 머리에 남는다. “검찰은 내부 이기주의를 초월해 오로지 국민 인권과 권력 민주화를 최대공약수로 받들고 제도 개혁을 해야 될 것”이라는 1세대 인권 변호사의 일침을 허투루 듣지 말기를 바란다.
1세대 인권변호사 한승헌이 걸어온 삶의 자취
1934년 전북 진안 출생
1957년 전북대 정치학과 졸업
1965년 법무부와 서울지검에서 검사로 봉직한 후 변호사로 전신
1975~1980년 독재권력의 핍박을 받는 양심수 내지 정치법들의 변호에 힘을 기울이다 자신도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거듭 투옥되어 22개월 간 복역
1973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
1974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1993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저서>
‘위장 시대의 증언’, ‘정치재판의 현장’, ‘역사의 길목에서’, ‘분단시대의 법정’,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전7권)’, ‘피고인이 된 변호사’,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 ‘권력과 필화’,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분을 생각한다’ 등 40여 권.
민주화’라는 시대 요구에 몸소 응답
독재정권 서슬이 퍼렇던 1970~1980년대, 당시 ‘민주화’라는 시대 요구에 몸소 응답했던 한승헌 변호사. 그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며 김대중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역임하고 노무혀누 정부에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전북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이력과 저서에서에서도 변호사로 누릴 수 있는 안온한 삶을 스스로 뒤로 물렸음이 묻어난다. 대신 그 자리를 궂은일과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일들로 채웠다. 법정 싸움과 거리 투쟁 등으로 두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한 변호사는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조작 사건부터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 한국 현대사를 얼룩지게 한 시국사건들 한복판에 섰다. 양심수와 시국사범 변호에 발 벗고 나섰다. 이후에도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 변론을 맡았다.
변호한 시국 사건이 100건이 넘는 가운데 어느 하나 가벼운 사건이 없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개인적으로는 어떤 사건이 제일 잊지 못할 사건으로 꼽는지’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그게 이제 굳이 하나만 사건을 추려서 말씀을 드린다면 글쎄.. 1974년 봄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항한 우리나라의 청년 학생들이 엄청난 저항,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있었어요. 특히 민청학련의 배후로 조작된 인민 혁명당 사건. 소위 인혁당 사건의 여러 분들. 대법원 판결 불과 몇 시간 뒤에 바로 처형이 되는데 그런 처형된 피고 중에 한 젊은이는 제가 담당했던 그런 분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잊을 수가 없죠. 특히 제가 담당했던 그 젊은이가 서울구치소에 1975년 4월 9일 새벽에 형 집행당해서 끌려갈 때 사실은 저 자신도 반공법으로 구속돼서 서울구치소에서 그런지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었죠. 그러니까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변호사도 구속 상태이고 의뢰인도 구속 상태인 당시의 기막힌 상황을 그는 이렇게 부연 설명했다. “이게 뭐냐 하고 그 안에서 알아봤더니 대법원 판결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되고 그리고 열 몇 시간 만에 바로 새벽에 형 집행을 한 것이다. 무슨 재심 기회도 주지 않고 가족과 접견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러니까 당시에 박정희 정권은 정말 천인공노할 야만적인... 학생이 희생이 된 거죠. 시체도 내놓으라고 울부짖고 했는데 세상에 시신조차도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은 그런 악독한 정권이 바로 박정희 정권이죠.”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졌던 시절에 인권을 변호
참으로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졌던 시절에 인권을 변호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는 그래서 우리나라가 사법 살인 국가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받았다고 강연 자리에서 강조했다.
한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과도 교도소에서 나눈 메리야스 사연이 있다. 어떤 사연이었을까.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당시 사연을 털어놓았다.
“참 우연과 우연이 부딪친 건데요. 내가 1975년 봄에 당국이 저를 반공법으로 잡아넣었는데 그때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많은 시위 학생들이 잡혀오고 했죠. 그런데 그 제가 같은 층에 옆방에 어떤 학생이 또 잡혀왔다고 해서 한여름이고 해서 얼마나 땀 흘리고 힘들겠어요. 그래서 제 메리야스, 내의를 교도관 통해서 옆방에 보내줬죠. 그게 누구인지 이름이나 그런 건 알 바가 아니었고 다만 경희대 학생인지 데모를 하다 잡혀왔다 하는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나중에 그 후에 석방이 돼서 또 부산 가서 노무현 변호사 만나는 자리에서 문재인 변호사 만났는데요. 자기가 바로 그 메리야스 내의를 받은 문재인이라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마나 참 반갑고 감격스럽고 그런 사이였어요.”
훗날 메리야스 나눠주던 사이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그는 최근 출간한 스물일곱 명의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 ‘그분을 생각한다’에서 “이 세상에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도 있다”며 “우리는 자칫 자신이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죄인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준엄한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법조계 원로로 여전히 냉철한 이성으로 시대를 꿰뚫는 혜안을 소유한 이 시대 진정한 원로 법조인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등에 관해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소신을 밝혔다.
“경찰이 수사권을 어느 정도까지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가, 그렇게 했을 경우 국민 인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가, 또 검찰이 모든 걸 지휘하고 결정하는 이른바 ‘검찰왕국’이 개혁될 수 있는가 등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결코 만만한 과제는 아니지요. 정부 해당 부처 간의 입장과 견해 차이를 어떻게 조정하느냐, 다시 말해 부처이기주의를 초월해 오로지 국민 인권과 권력 민주화를 최대공약수로 받들고 제도 개혁을 해야 될 것입니다. 명분 여하 간에 상당한 진통이 수반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외풍’ 못지않게 법관에 대한 ‘내풍’이 더욱 위험”
법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는 질의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 고위 법관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엄청난 사태도 어느 면에서 사법부가 짊어져야 할 자업자득의 업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사법부의 그동안 불미스러운 여러 맹점을 가감 없이 점검하고 개혁해야죠. 그런데 사법권 독립과 맞물려 있는 문제들이 많기 때문에 법원 개혁엔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죠. 사법권 독립이 외부요인이 빚어낸 걸림돌이라면 법관 독립은 사법부의 내부적 요인과 얽혀 있어 들춰내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사법부에 대한 ‘외풍’ 못지않게 법관에 대한 ‘내풍(內風)’이 더욱 위험하다는 경고를 여러 번 되풀이한 바 있습니다. 사법부의 자생적 치부를 먼저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게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어서 걱정입니다.”
그는 또한 사법부가 독립을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외풍이 사법권을 침해할 수 있지만 사법부 내의 내풍도 사법을 망치는 위험요인이 된다”며 “법관들 또는 검사들의 굳건한 신념과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곤 한다. 특히 “정치권력의 입장에 맞춰 눈치 보며 재판하는 자기 모독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는 말은 후배 법조인들이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사람과 언론> 제7호(2019 겨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