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따라 인생따라'

KBS '한국인의 밥상' 촬영 후 제작진과 함께. 
KBS '한국인의 밥상' 촬영 후 제작진과 함께. 

지금 생각해보면 유년의 나의 삶은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어쩌면 풍요로웠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사르트르가 나중에 술회하기를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잃은 것이 내겐 행운이었다.” 라고 한 것과는 약간은 다른 맥락이지만 나는 어린 시절을 부모님과 떨어진 채로 할머니와 단둘이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또는 ‘열심히 공부해라’ 하는 일종의 간섭을 누구에게도 받지 않았으므로 일찍부터 허전하면서도 달콤한 그 외로움의 의미, 그 쓸쓸함의 의미를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궁핍 속에서 살았지만 그와 동시에 일종의 환희 속에서도 살았다.”는 알베르 카뮈의 말과 들어맞는 시절이 그 시절이었다.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나는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내 눈에 뜨이던 산과 강이 나의 유일한 벗이자 스승이었다.

지금이야 개인 집이나 아파트를 막론하고 집집마다 수도 시설이 완벽해서 수도꼭지만 틀면 좔좔 쏟아지는 게 물이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만 해도 흐르는 물이나 마을의 공동 우물이나, 깊고도 깊은 샘에서 물을 길어다 놓고 먹었다. 내가 태를 묻은 고향마을은 마을 앞 집집마다 거치면서 그 생명의 물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지나가는 작은 냇물이 있었다.

마치 충청도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의 집들이 집집마다 시냇물이 흘러서 가는 것과 같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다 그 물을 먹고 밥을 지었으며, 그 물로 나물을 씻고 빨래를 했다. 그 물에서 세수를 하였고, 밤중에는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물동이를 이고서 물을 길어오면 그 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하얀 사발에 정갈한 물(淸水) 한 그릇을 떠 놓고 내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무엇인가 소원을 빌었다.

물은 고향 사람들에게 신비한 정령이자. 생명의 길을 인도해주는 주치의이며 길눈이였다.

아직 잠이 덜 깬 나는 바로 앞집인 상관이네 집 앞을 흐르는 개울가에서 세수를 하며, 저 물은 흘러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울이 섬진강이라는 것은 오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싸리문을 밀고서 우리 집 담벼락 너머에 있는 모정(茅亭)에 나가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면 주위는 온통 산이었다. 서쪽을 내려다보면 성수면 구신리와 백운면 덕현리 그리고 마령면 계서리까지 그 긴 능선을 마치 병풍처럼 드리운 산이 보이는데, 그 산이 옛적에 백색의 신마(神馬)가 내왕했다는 설이 있는 내동산(887m)이고 남쪽인 백암리와 동창리에 걸쳐 있는 산이 갈모처럼 봉우리가 뾰족한 갈미봉(762m)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산삼이 많이 나는 큰덕골이고 그 뒤편에 삼각형인 산이 선각산(仙角山.1,034m)이었다. 바로 뒤편에 인자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이 봉우리가 덕스럽게 생겼다는 덕태산(德泰山.1,113m)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각산 줄기에 있는 산으로 그 모양이 감투 같다는 감투봉이 있으며, 감투봉 건너편에는 감투봉에 있는 장군을 보호하고 있다는 망바우가 보이고, 그 아랫마을이 지대가 높아서 늘 흰 구름이 떠 있다는 백운동(白雲洞)이었다.

홍두깨처럼 생겼다는 홍두깨재는 장수군 천천면과 경계에 있는 고개다. 그곳에서부터 비롯된 백운동천이 웃 흰바우와 아래 흰바우를 지나 전에 사기점이 있었다는 점촌을 지나면 원촌이다. 옛날 고을의 원님이 부임할 때 이 마을에 숙소를 정했다는 얘기가 서려 있는 원촌과 주위에 넓은 바위가 많은 번바우를 지나면 내동산 기슭에 자리 잡은 내동마을이며 그 마을 앞에서 백운동천과 섬진강의 가장 상류천인 제룡강이 만나는 것이었다.

오지 중의 오지인 산골짜기이긴 했지만 산천이 아름다운 지역이 내 고향이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것은 어쩌면 내 생애에 가장 행운 중의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애의 각 순간이 기적 같은 가치와 영원한 청춘의 모습을 스스로 지니고 있었다.”라는 카뮈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고향을 정감어린 눈으로 바라다보기 시작한 것은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였다.

왜냐하면 카뮈 역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고 나 역시 가난 속에 점철된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그 시절을 보자기에 싸서 장롱 깊숙이 묻어두고서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가끔씩 그 이야기들이 실꾸리처럼 풀려서 이런저런 회상을 하게 만드는 곳이 고향이다.

그 고향 진안 백운에 대한 이야기가 2020년 6월 11일 7시 40분 KBS <한국인의 밥상>에 나옵니다. 쓸쓸하기도 하고, 정겹기도 한 이야기가.

/글ㆍ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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