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에서 역사를 만나다(1)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이 모여 샘이 되고, 그 샘이 넘쳐서 아래로 흐른다. 흐르는 그 물길이 하나하나의 지류를 받아들여 아래로 흐른다. 아무리 오염된 지류라도 작은 지류라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뒤 흘러간다.

“강을 보라, 수많은 우여 곡절 끝에 그 근원인 바다로 흐르지 않는가.”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의 말이다. 그와 같이 강은 흐르면서 깊어지고 넓혀져서 바다로 가는 길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폭포를 만나고, 여울을 만나고, 댐을 만나면서 겸손하게 흐르는 것이 강이다. 사람의 일생도 강의 일생과 같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아장아장 걷고, 학교를 다니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는 모든 사람이 강의 지류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강과 달리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높은 곳을 열망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경쟁자가 되고, 그래서 갈등과 반목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강과 사람, 무엇이 문제인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간단하면서도 오묘한 진리를 강을 따라 걸으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역사와 대화하며 유유히 흐르는 ‘금강’, 발원지는?

나라 안에서 여섯 번째이며 남한에서는 낙동강, 한강에 이어 세 번째로 길며 총 유역 면적만 해도 9천8백86㎢에 이르는 금강(錦江)은 이름 그대로 비단 강이다. 그렇다면 금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역사의 기록인 <당서(唐書)>에서는 웅진강(熊津江)이라고 기록하였다. 금(錦)은 원어 ‘곰’의 사음(寫音)이다. 곰이라는 말은 아직도 공주의 곰나루라는 명칭으로 남아있다. 일명 호강(湖江)이라고도 부르는 금강의 발원지가 <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수분현(水分峴)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골짜기의 물이 하나는 남원으로 향하고 한줄기는 본현으로 본현으로 들어와 남천이 되었다. 이것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남천은 북으로 흘러 용담현 경계로 흘러간다.”

현대 문헌으로 <한국지명사전>에서는 육십령과 천마청산이라고 실려 있고, <한국지명요람>과 <큰사전>(한글학회), <새한글사전>에는 전북 장수군으로 실려 있다. 오늘날에는 강의 하구에서 가장 멀리 올라간 물길을 두고 강의 발원지로 보기 때문에 뜬봉샘이 금강의 발원지가 된 것이다.

                 금강
                 금강

역사 속에서 금강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즉 옥천군 이원면 부근의 금강은 적등진강(赤登津江)이다. 그 아래의 강들은 차탄강(車灘江), 화인진강(化仁津江), 말흥탄강(末訖灘江), 형각진강(荊角津江) 등 여러 강 이름들이 등장하며,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되어있다.

30여 년 전만 해도 수분이 고개에 있는 김세호씨 집의 남쪽 처마로 떨어지는 빗물은 섬진강으로 흘러가고 북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금강의 발원지가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새로 집이 지어져 그렇지가 못하다. 수분리 남쪽에 있는 고개인 수분재는 해발 600m쯤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섬진강이 되고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금강이 되기 때문에 물이 나뉜다는 뜻의 수분이 고개라고 하였다.

작고한 사진작가 강운구 씨가 <뿌리 깊은 나무>의 ‘전라북도’편에 실었던 60년대의 초가마을이 아니고 그 눈 내리는 마을이 아니다. 스레트 지붕이나 기와집 아니면 양옥집이 울긋불긋 들어선 수분리 마을을 지나 신무산(神舞山)(895m) 산행 길에 오른다. 봄꽃들이 오순도순 피어있는 길을 한참을 오르자 임도가 나타나면서 길가에 물뿌렝이 마을, 강태등골이라는 나무 푯말이 세워져 있다.

신들이 춤을 춘다는 뜻을 지닌 신무산 밑에 뜸봉샘이라고 새겨진 바위 표지판이 서 있고, 잘 정비된 뜸봉샘은 제법 많은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에는 이 샘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뜸봉, 수분 서쪽에 있는 산, 장군대좌혈(將軍大坐穴)의 명당이 있는데, 역적이 날까 두려워 숯불을 놓고 불을 질러 그 명당자리를 떴다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에 공산전투에서 대패한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그 때문에 견훤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그 뒤 삼한을 통일한 왕건은 <훈요십조> 중 8조에서 ‘차령 이남과 금강 이남의 사람은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등용시키지 말아라‘ 라는 유훈을 남겼다. 그 뒤로부터 금강을 두고 개성을 향해 반쯤 활을 당긴 ’반궁수(泮弓手)’ 형세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려 오백년 내내 금강 이남의 사람들의 벼슬길이 막혔던 것이다.

하지만 십몇 년 전에 세운 전에 세운 표지판 실린 내용은 그와 다르게 태조 이성계의 일화가 쓰여 져 있다. 이성계가 전국 명산을 돌아다니며 백일기도를 하다 조선 건국의 계시를 받았다는 임실 성수산 상이암의 전설과 비슷하게 ‘봉황이 날아올랐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어느 쪽이 맞는 지는 더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리라.

오랫동안 우리나라 하천을 연구한 이형석 선생은 이 샘을 ‘밥내샘’으로 부른다. 그 이유는 고개 너머에 식천리가 있고 수분리에서 식천(食川)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밥이 타는 냄새가 난다는 의미를 지난 ‘밥내고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 정상이 바로 위쪽임에도 불구하고 가뭄에도 끊이지 않고 솟아난다는 저 물길은 어디서 솟아나는 것일까.

논들이 다랑다랑 펼쳐진 이곳에 웬 들판은 그리도 많은지...

천천히 내려가면 만나는 마을 수분리는 조선시대에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던 원집이 있었다. 사리원, 장호원, 조치원, 영원, 오원 등과 같은 의미의 원이 있었던 이 고개에는 현재 주유소와 식당이 들어섰고 길손이나 관리들이 묶어갔던 수분원은 사라지고 없다. 졸졸 흐르는 강이 수분 남쪽에 있는 강태들골을 쑤시고 개정리에서 이평천을 받아들이며 강은 제법 구색을 갖추고 흐른다. 계단식 논들이 다랑다랑 펼쳐진 이곳에 웬 들판은 그리도 많은지 온숫골 들판, 언굿볼 들, 진압봇 들이 펼쳐진 이 지역에는 흉년에 해구에게 팥죽 한 그릇 얻어먹고 넘겨주었다는 팥죽 배미라는 논이 있다.

비행기재 아래를 흐르는 용주천과 뜸봉샘에서 내려온 금강이 소나무 숲이 그럴싸한 하평에서 만난다. 그렇다. 저 구름에 휩싸인 팔공산 너머에서 남한에서 네 번째로 섬진강 오백리길이 시작된다. 하평마을 우측에서 흐르는 내를 따라가다가 만나는 새터 마을을 지나며 물소리는 제법 우렁차게 제 소리를 내며 흐른다.

산은 높고 물은 길다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의 고장 장수는 조선시대 하나의 현이었고, 장수의 백제 때 이름은 우평雨枰현이다. 신라 때에 고택(高澤)으로 고쳐서 장계군에 딸렸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고려 말기의 문인 윤여형(尹汝衡)의 시에, “산길에 가을바람 새벽의 찬 기운을 빚어내고, 서리 맞은 황엽은 말안장에 가득하네” 하였던 장수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으로 높고도 험한 산들이 즐비하다. 남덕유산․백운산이 있으며, 그 가운데 함양으로 넘어가는 육십령이 있다. 고개가 높고 험해서 60명이 모여야 넘었다고 하고, 고개의 구비가 60여 개가 되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고 부르는 이 고개 마루를 사이에 두고 말씨와 풍습이 바뀌었다.

이곳 장수에는 ‘장수삼절’이라고 하여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세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논개(論介)의 충절이다.

논개의 죽음을 가장 먼저 주목하고 글로 남긴 사람이 조선 중기 설화문학의 대가인 유몽인(柳夢寅)이었으며, 설화집 <어우야담(於于野談)> ‘효열‘ 편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만력(萬曆. 중국 명나라 신종神宗의 치세治世. 연호年號) 계사(癸巳1593)년에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에 들어가 왜적에게 항거하였다. 성이 함락되고 군대가 패하게 되자 백성이 모두 죽었다. 논개는 화장을 하고 복장을 단정히 한 뒤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섰다. 그 아ㅐ는 만길 높이여서 곧장 물길 속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여러 왜적들이 보고 좋아했으나 모두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한 장수가 몸을 뻗쳐 곧장 앞으로 나왔다. 논개는 미소를 지으며 왜장을 유인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왜장을 끌어안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임진란에 관기가 왜적을 만나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비단 논개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으나 대부분 그 이름을 잃었다. 저들 관기는 음탕한 창녀이니, 정렬(貞烈)로써 일컬을 수가 없다. 그러나 죽음을 보기를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해서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 저들 역시 임금의 교화를 입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차마 나라를 배반하여 적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지, 별다른 충성심은 없었던 것이다, 아아, 슬프다.“

전쟁이 끝난 지 30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쓴 이 글 뒤에 함경도의 의병장이돈 정문부(鄭文孚)의 둘째아들인 정대륭(鄭大隆)이 논개가 몸을 던진 그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그 글자를 본 조선 후기의 문신 오두인吳斗寅이 의암기(義巖記)를 새간 것이 1651년이었다.

강낭콩보다 푸른 절개

                           논개를 모신 의암사
                           논개를 모신 의암사

일찍이 수부 번영로가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이 흘러라,....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라고 노래한 의기 논개는 선조 7년 9월 3일 현재 장수군 계내면 주촌마을에서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잃은 논개는 숙부인 주달문에게 의탁해서 살고 있다가 숙부가 부자에게 첩으로 팔려고 하자 어머니와 함께 장수 현감 최경희(崔慶會)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다.

무죄로 풀려난 논개는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최경회의 후실로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희는 진주 병사가 되어 진주성 싸움에 투입되었다.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그는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이에 논개는 스스로 기생이 되어 촉석루 잔치에서 왜장 게야무라로꾸스께를 남강가의 바위로 유인, 그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에 빠져 순절하였다.

                                       논개 초상화
                                       논개 초상화

 

그때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그 후 조정에서 의암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1740년에 진주의 촉석루 곁에 논개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세웠으며 1846년에는 장수현에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를 세웠다. 그리고 1955년에 장수읍에도 의암사라는 논개의 사당이 세워졌으며 친일 경력이 있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가 논개 영정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그가 태어난 주촌마을에 그의 생가가 복원되고 논개 동상도 세웠으나 진주와 장수가 서로 논개를 상품화 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왈가왈부하고 있어 주변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뿐이다.

두 번째 인물은 장수 향교를 지킨 향교지기 정경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쳐들어오자 현감과 관속들은 모두 줄행랑을 쳤으나 그는 도망가지 않고 혼자서 향교를 지켰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향교를 지키고 있는 그의 의기를 가상히 여긴 왜군들은 불을 지르지 않고 돌아갔고 대다수의 향교들이 모두 불탔는데도 장수향교만 남게 되었다. 그의 충절을 기려서 1846년 장수향교 앞에 ‘정충복 경손 수영비’를 세웠다.

노비의 충절 기린 ‘타루비’

                  타루비
                  타루비

세 번째는 천천면 장판리에 있는 노비의 충절을 기린 ‘타루비’이다. 주인이 꿩 때문에 놀란 말에서 떨어져 죽자 그 마부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바이에다 꿩과 알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 곳에 그 노비의 비석을 세우고 해마다 장수현감이 제사를 지냈다.

그 다음에 이 고장 사람들이 내세우는 인물은 장수읍 선창리에서 태어난 세종대왕 때의 청백리 황희 정승인데 그의 이웃사람에 대한 사랑이 다음과 같은 일화로 전해온다.

세종이 어느 날 황희의 집을 찾았다. 방에는 낡은 방석과 손 때 묻은 책상 하나 그리고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책이 전부였다. 대궐로 돌아온 세종이 가까운 신하를 불러 “영상의 살림이 너무 구차한데 녹봉을 올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자 신하가 대답하기를 “ 녹봉이 적어서 그런 게 아니라 받는 녹봉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연암 박지원의 <낭환집서(蜋丸集序)>에 실려 있다.

“바다가 모든 물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능히 자기를 낮출 수 있기 때문”

                       두물머리
                       두물머리

황희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딸이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이를 아십니까? 이는 도대체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는 게 맞지요?”

이 말을 들은 황희는 “그렇단다.” 하자 딸이 환하게 웃으면서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며느리가 황희에게 물었다. “아버님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맞지요?” 하자. 황희는 대답하기를, “그렇고말고,” 하므로 며느리가 웃으며 딸을 보고서 “아버님이 내 말이 옳다고 그러네요.” 하였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황희의 부인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고 하겠소, 송사訟事하는 마당에 두 쪽을 다 옳다 하시니,” 하자. 황의 정승은 빙긋이 웃으며 딸과 며느리를 불러드린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이라는 벌레는 살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않단다. 그래서 두 말이 다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장롱 속에 있는 옷에도 이가 있고, 너희 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해도 오히려 가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땀 기운이 무럭무럭 나고 옷에 먹인 풀 기운이 푹푹 찌는 가운데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중간에서 이가 생기느니라.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살피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본디 그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할 것이니, 누가 그 중간(中)을 알 수가 있겠는가?

“말똥구리는 자신의 말똥을 아끼고, 여룡(驪龍)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여룡 또한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때문에 세상은 항상 소란스럽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보니 말이 다르고 말이 다르다 보니 글마저 다르고, 그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도 다르다. 같은 민족도 그럴진대 하물며 서로 다른 민족은 오죽하랴?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이치이다.

장수읍 노하리의 마을 숲은 봄물이 들어 찬연하다. 장판리의 타루비를 거쳐 월곡리에 이른다. 반월리와 박곡리를 병합하여 월곡리를 지난 강물은 제법 넓다.

이런 저런 생각 속에 잠겨서 걷다가 보니 어느 덧 장계천과 금강이 몸을 합하는 천천교에 이른다.

두 개의 물머리가 만나는 곳, 말 그대로 두 물머리이자 양수리인 천천교 아래 굼강을 바라보며 <노자> 제 66장 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노하리 마을 숲
                          노하리 마을 숲

“비유하건대, 도(道) 있는 이가 천하에 있어 만물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은 마치 골짜기의 개울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다. 장강(長江)이나 바다가 모든 물의 왕자(王子)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능히 자기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낮은 곳에 위치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물이 그곳으로 흘러들어 만 갈래 물길의 왕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남의 위에 군림하려 한다면 먼저 그 말을 공손히 하여 낮추며, 남의 앞에 서려고 할 때에는 먼저 자기 몸을 뒤로 돌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인이 위에 군림하게 되어도 백성들은 무거운 부담을 느끼지 않으며, 선두에 서 있어도 성인을 헐뜯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천하의 사람으로서 그를 추대하여 싫어하는 이가 없고, 또 남과 다투지 않는 까닭에 천하의 그 누구도 그와 다투려 하지 않는 것이다.”

<노자>에 실린 글과 같이 금강은 모든 것을 끌어안고,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을 지나 대전의 신탄진에 이를 것이다. 세종시, 공주, 부여, 논산, 익산을 거쳐 군산과 서천 사이에서 서해로 들어가는 강, 금강은 유유히 흐르고 우리들의 삶도 유장하게 흐르지 않겠는가.

/신정일/<사람과 언론> 2018 창간(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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