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에서 역사를 만나다'

누가 나에게 좋은 길을 물어온다면
경치가 아름다운 곳도 역사 속에서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곳이 있는 반면, 경치는 아름답지 않은데, 역사 속의 큰 족적을 남긴 곳도 있다. 괴산의 외선유동과 내 선유동은 역사 속에 큰 인물들이 살다간 곳이고, 아홉 개의 구곡이 두 개나 관평천과 화양천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길보다 걷기에 가장 알맞은 길이 이어지므로 걷는 사람들이 아주 만족 해 하는 곳이다.
누군가 나에게 나라 안에서 걷기에 가장 좋은 곳이 어디인가? 하고 물으면 주저 없이 말해주는 곳이 몇 곳이 있다. 그 중의 한곳이 충북 괴산에 있는 외 선유동과 화양동계곡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있는 내 선유동과 기가 막힐 만큼 신비하게 생긴 용추를 답사하고 517번 도로를 넘어서 충청도 땅과 경상도 땅의 경계에 자리 잡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官坪里에 이른다.
관평리는 본래 괴산군 남하면의 지역으로, 큰 산골짜기 안에 들이 있으으로 골안들이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관들, 또는 관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 아랫관평에서 칠성면 사기막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군자산 밑에 있으므로 군자티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 외선유동 거쳐서 화양동 계곡으로 이어진 도보답사를 시작한다.
이 마을 초입에 3.4백년은 너끈히 되었을 느티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 수십 명의 사람이 쉴만한 바위가 있는데, 바위 아래를 흐르는 물이 바로 관평천이다.
개울물보다 조금 더 큰 관평천을 따라 길은 이어지고, 얼마쯤 내려가다 보면 아랫관들 마을에 이르고 그 소 부근의 바위에 제비가 깃든다는 제비소가 있다. 여름철에만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는 텅 비어 있고, 여기서부터 관평천변을 따라 아홉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외선유동이다.
조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송시열과 이준경 등 이름난 사람들이 즐겨 찾았으며, 그들이 오래도록 대代를 이어 살고자 했던 곳이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의 선유동 부근이다.
송면리는 본래 청주군 청천면의 지역으로 사면四面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송면松面이라 부른다. 이곳 송면리는 조선 선조宣祖 때 붕당이 생길 것을 예언했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장차 일어날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자손들의 피난처로 지정하여 살게 했던 곳이다.
우리 민족의 이상적인 피난처 선유구곡
어쩌다 승용차만 지나는 작은 길 따라 냇물이 흐르고 냇물 위에 기이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대개 괴산 선유동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30m 높이의 커다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고 바위에 선유동문仙遊洞門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에서부터 선유구곡이 펼쳐져 있다. 바위가 깎아지른 듯 하늘에 솟아 있는 바위가 경천벽驚天壁 이고, 옛날 암벽 위에 청학이 살았다는 바위가 학소암鶴巢岩이다. 학소암 위에 있는 바위로 그 생김새가 화로처럼 생겼는데, 옛날 이곳에 살던 신선이 약을 달여 먹었던 곳이라는 곳을 연단로燃丹爐라고 부르며, 와룡臥龍이 물을 머금었다 내품는 듯이 급류를 형성하여 폭포를 이룬 곳을 와룡폭臥龍瀑이라고 부른다.
와룡폭 위로 방석같이 커다란 형상을 지닌 바위를 난가대爛柯臺라고 부르고, 바둑판 같이 생긴 큰 바위를 기국암棋局岩이라고 부른다. 거북같이 생긴 구암龜岩, 두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뒤에는 큰 바위가 가로 놓여 그 사이에 석굴이 있는 은선암隱仙岩 등이 선유동구곡으로 주위의 수석층암과 노송이 어우러져 세속과는 거리가 먼 이상향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선유구곡 중 난가대와 기국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명종 때 이곳에 살던 어떤 나무꾼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 나무를 하던 중 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노인들을 발견하였다. 가까이 가서 구경을 하자 한 노인이 나무꾼에게 말하기를,여기는 신선들이 사는 선경仙境이니 돌아가시오. 하였다 .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옆에 세워둔 도끼를 찾았는데 도끼자루는 이미 썩어 없어진 뒤였다. 낭패감으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낮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누구인가 물었더니 그의 5대 후손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곳에 간 날을 헤아려보니 바둑 구경을 하고 보낸 세월이 150년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도끼 자루가 썩은 곳을 난가대라고 불렀고 노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을 기국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저마다 다른 뜻을 지닌 아름다운 곳들이 유난히 많은데, 바위위에 큰 바위가 얹혀 있어서 손으로 흔들면 잘 흔들리는 바위가 흔들바위다. 큰 소나무 일곱 그루가 정자를 이룬 칠송정터, 바위에서 물이 내려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린다는 바위가 울암이라고 불리는 울바위다. 울바위 옆에 있는 바위로 사람의 배처럼 생겨서 정성을 들여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배바우가 있고, 근처가 모두 석반인데 이곳만 터져서 문처럼 되어 봇물이 들어온다는 문바우등이 이곳 송면리의 선유동을 빛내는 명승지이다.
문처럼 터진 바위에 선유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 강물은 수정처럼 맑다. 이곳 선유동에 남아 있는 선유정仙遊亭터는 약 220여 년 전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던 정모라는 사람이 창건하고 팔선각八仙閣이라고 지었는데 그 뒤에 온 관찰사가 선유정으로 고쳤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한편 솔면이라고 부르는 송면리의 솔면리에는 이준경이 그 자손들을 데리고 집을 짓고 살았다는 ‘이 동고 터’ 또는 ‘이정승 터’라는 집터가 남아 있다.
솔면이 서남쪽 삼거리에 있는 청천, 상주, 괴산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을 지나서 32번 지방도를 따라 내려가자 다시 주차장이고, 충청북도 자연학습원 아래로 난 길이 화양동으로 가는 길이다.
삼남 지방에 제일가는 경승지 화양동 구곡
주차장을 지나면서부터 화양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차도 지나지 않아 정적만이 감도는 조용하면서도 운치 있는 길이다. 한 참을 내려가면 길 아래쪽으로 난 길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화양천에 이르면 바로 그곳이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파곶이다.
선유동에서 조금 내려가면 현재 그곳에서 파관巴串으로 불리는 또는 파곶이다. 깊숙한 골짝에서 흘러내린 큰 시냇물이 밤낮으로 돌로 된 골짜기와 돌벼랑 밑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천 번 만 번 돌고 도는 모양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하여보면 웅장한 점에 있어서는 조금 모자라지만 기이하고 묘한 것은 오히려 낫다고 한다. 금강산을 제외하고 이만한 수석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삼남지방에서는 제일이라 할 것이다.
우암 송시열은 1686년 3월에 이곳 화양동에 와서 <파곡巴谷>이라는 시를 지었다 .“물은 청룡처럼 흐르고, 사람은 푸른 벼랑으로 다닌다. 무이산 천 년 전 일, 오늘도 이처럼 분명하여라.
이중환이 찬탄한 파곶의 아래쪽 바위에 앉아서 멀리 산들과 냇가를 바라다보면 세상의 경치가 이만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파곶에서 화양동 계곡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아홉 곳을 우암 송시열이 화양구곡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연원은 주자에서 비롯되었다.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朱熹)는 성리학의 탐구에 이상적인 장소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계곡으로 보았다.. 그는 그러한 형세를 갖춘 계곡을 중국 남부에서 발견한 뒤 무이구곡(武夷九曲) 이라고 지은 뒤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물의 구비마다 그 모양새에 함당한 이름을 붙인 뒤 성리학의 경지에 비유하였다. 이황의 뒤를 이어, 율곡 이이는 석담구곡을 지었고, 화양동 구곡에서 제자를 길러낸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앞 다투어 나라곳곳에 구곡을 지었다
1975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계곡은 원래 청주군淸州郡 청천면의 지역으로서, 황양목黃楊木(희양목)이 많으므로 황양동黃楊洞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효종孝宗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쳐 불렀다.

우암 송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 골짜기에 들어앉아 글을 읽고 제자들을 불러 모은 뒤 화양동계곡의 볼만한 곳 아홉 군데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는데 다. <제 1 곡>이 경천벽이다.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서 마치 산이 길게 뻗히어 하늘을 떠받치듯 하고 있어 경천벽이라 이름 지었다. <제 2 곡>은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는 운영담이다. <제 3 곡>은 읍궁암은 운영담 남쪽에 희고 둥굴넓적한 바위로 송시열이 효종임금이 돌아 가매일 새벽마다 이 바위에서 통곡하였다 해서 후세의 사람들이 읍궁암이라 불렀다.
<제 4 곡> 금사담은 맑고 깨끗한 물에 모래 또한 금싸라기 같으므로 금사담이라 하였다. <제 5 곡>은 첨성대로 도명산 기슭에 층암이 얽혀 대를 말한다. 경치도 좋을 뿐더러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m이고 대아래 "비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서 별을 관측할 수 있다고 하여 첨성대라 한다. <제 6 곡>은 능운대 로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제 7 곡>이 와룡암이다. 큰 바위가 냇가에 옆으로 뻗혀 있어 전체 생김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제 8 곡>이 학소대로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다. <제 9 곡>이 그 이름 높은 파곶이라고 부르는 파천이다.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화양동서원과 만동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말에서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패대기질을 당했다는 하마비 우측에 그 이름 높았던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은 1695년(숙종21)에 이곳에 머물며 후진을 양성했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웠는데, 이 서원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다. 이 서원은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갔고, 결국 1871년에는 노론사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원이 철폐되었다.
화양동서원에 딸린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만동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전국의 유생 수천 명이 모여들었으며 1년 내내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이 서원도 화양서원과 마찬가지로 폐단이 극심해졌다. 우여곡절을 겼으며 사라졌던 이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얼마 전에야 다시 세워졌다.
산천이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역사를 배우고 사람을 배우게 만드는 길이 아랫관평에서 시작하여 선유동을 거쳐 화양동에 이르는 한나절 길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인자는 정적靜的이며, 지자는 낙천적이고 인자는 장수한다.” <논어>에 실린 글이다. 산과 물이 아름다운 이곳은 그런 의미에서 그 두 가지를 다 겸비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보다 더 아름답고 의미 있는 길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신정일(문화사학자, 길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