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에서 역사를 만나다'

                  대관령 옛길
                  대관령 옛길

조선시대의 9대로 중 가장 경관이 빼어난 길은 어디였을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서울의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평해에 이르는 관동대로.

관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고려 성종 때 오늘날의 서울, 경기 일원을 관내도(關內道)라고 했으며, 관동(關東)이라는 말은 그 동쪽에 있는 땅이란 뜻으로 생겨난 것.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 시인의 시 ‘거대한 뿌리’ 한 부분이다. 시인의 말대로 우리의 역사나 전통은 우리가 보존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의 역사나 전통은 고루한 것이라 지례 생각하고, 그래서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다른 나라 것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색하면서 우리의 것은 ‘에이’하며 눈길을 돌리는 것이 다반사다.

요즘에 유행하는 ‘걷기’에서도 그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옛길을 걷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별로 없다. 땅 끝에서 통일전망대까지나 판문점까지 걷는 것이 주류이고, 스페인의 순례자들의 길인 ‘산티아고 길’이나 일본의 ‘에도 시대의 옛길 시코쿠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만 눈에 뜰 뿐이다. 그 이유는 국가에서 개발만 중시하다가 보니 우리의 옛길을 방치하고 있었고, 국민들도 옛길의 중요성이나 존재 자체를 제대로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산천 유람 으뜸 지역은 어디?

           대관령 가는 길
           대관령 가는 길

조선시대의 9대로 중 가장 경관이 빼어난 길은 어디였을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서울의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평해에 이르는 관동대로였다. 관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고려 성종 때 오늘날의 서울, 경기 일원을 관내도(關內道)라고 했으며, 관동(關東)이라는 말은 그 동쪽에 있는 땅이란 뜻으로 생겨난 것이다.

관동대로를 평해로라고도 부르는데, 관동대로의 주된 역할은 수도인 서울과 경기지방의 동부 및 강원도를 연결해주는 것이었다. 이 길은 조선시대의 관리들뿐만이 아니라 과거 길이자. 수많은 소몰이꾼이나 보부상들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길이다.

늦은 저녁 횡계에 도착하여 횡계의 명물인 오삼불고기를 먹는다. 오징어와 삼겹살을 버무린 매운 불고기를 먹는 이유는 올 들어 가장 추울 것이라는 내일 바람찬 대관령을 넘어 관동지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고개를 넘는다는 것이 즐거움이면서도 무언가 모를 걱정 때문에 잠이 들지 않는다. 나뿐만이 아닌가보다. 여기저기서 뒤적이는 소리, 그렇게 밤이 지나고 대관령을 넘어가는 시간 이른 7시 30분이다. 옛날 영동고속도로 휴게소 위쪽에 선자령(仙子嶺)으로 가는 길과 국사성황당으로 가는 길 두 개가 있다. 잘 닦인 길을 한참을 오르자 강릉단오제의 시발점인 대관령 국사성황당에 닿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로, 마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을 제사하고,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하는 축제가 강릉단오제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매년 3, 4, 5월 중 무당들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3일 동안 굿을 벌였다는 남효온(南孝溫)의 문집(『추강냉화(秋江冷話)』) 기록과, 1603년(선조 36년)에 강릉단오제를 구경하였다고 기록한 허균(許筠)의 문집(『성소부부고(惺所覆藁)』) 등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단오제를 드리지 않으면 마을에 큰 재앙이 온다고 믿어 대관령 서낭당에서 서낭신을 모셔와 강릉시내의 여 서낭신과 함께 제사를 드리는데, 대관령 산신은 김유신 장군으로 전해지며, 단오제에서 주체가 되는 서낭신은 범일국사이고, 여 서낭신은 강릉의 정씨처녀로 전해진다.

성황당을 답사한 뒤에 본격적으로 대관령을 넘는데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산천 유람을 할 때 우리들처럼 도보 답사를 했을까? 아니면 말을 타고 갔을까?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의 ‘군도부(君道部)’에 해답이 실려 있다.

“평시에 유생(儒生)의 기마(騎馬)는 금지하였다. 그런 까닭에 유생들은 짚신을 신고 도보로 다녔으며, 타고 다니는 자는 드물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유생이 목이 긴 가죽신을 신고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조관(朝官)의 모양과 꼭 같으며, 도보로 걸어 다니는 자는 아주 없어졌다.(중략) 풍속을 이루어 그것이 떳떳한 것으로 되었으니 시속(時俗)의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에서 대관령까지 나귀를 타고 오면 이레가 결렸다는데...

대관령 발물관
대관령 발물관

또 하나 궁금한 것은 서울에서 이곳 대관령까지는 얼마나 걸렸을까? 나귀를 타고 오면 이레가 걸렸다고 한다. 산천 유람 차 대관령을 넘는 사람은 즐거움이 배가 되었을 것이지만 예전에 이곳으로 부임해 오던 벼슬아치들은 험준한 대관령을 넘으며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강릉 땅 가는 길이 험하고 먼데서 오는 서러움이 복 받쳐 울었으며, 또 넘어와서는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강릉 땅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심과 빼어난 산수 때문에 즐거워서 웃었다는 이야기이다.

벼슬길도 그럴진대 유배객들은 한 발 한 발 걸어오며 피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언제쯤 유배가 풀려 돌아간다는 기약도 없는 유배길,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고 무너졌을까? 국사성황당을 지나 백두대간의 고개 마루에 서자 멀리 강릉 시내 너머로 동해바다가 눈이 시리게 푸르다. 관동대로 옛길에 밤새 떨어진 형형색색의 나뭇잎들이 눈이 부시다.

“야! 대단하다. 지금이 바로 단풍의 절정이구나.” 내 앞을 가고 있던 박수자 씨가 걸음을 멈춘 채 탄성을 지르고, 고혜경 씨도 한 마디 한다. “옛길이 세월 속에 바래 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해요.” 길이 휘어 돌고 또 돌아가는 길, 바람에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금세 떨어진 그 나뭇잎, 노랗고 빨갛고 새 푸른 단풍잎들을 뭐라고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색색으로 물든 단풍잎이 금세 비단길을 만든다. 차마 밟고 지나가기도 황송하다. 뒤따라오던 안명숙 씨도 한 마디 말을 건넨다. “신기하지 않아요, 저렇게 물들어서 떨어지는 나뭇잎이”, 그래, 신기한 것이 많아서 이 길을 지나던 많은 문장가들이 글을 많이 남겼을 것이다. 조선의 아웃사이더인 매월당 김시습은 이곳을 지나며 ‘대관령에서’라는 시 한편을 남겼다.

“대관령에 구름이 처음 걷히니, 꼭대기의 눈이 아직도 남아 있네., 양장(羊腸)처럼 산길은 험난도 한데,조도(鳥道).. 새나 다닐 수 있다는 험난한 도로)같은 역정은 멀기만 하다. 늙은 나무 사당집을 에워싸고, 맑은 안개 바다 산에 접해 있구나, 높이 올라 부 지을만한데, 풍경은 사람이 옮길 수도 있겠네.”

“동대문 밖이 강릉”이라고 말할 만큼 관동대로 중 으뜸 도시

              대관령 풍광
              대관령 풍광

날아가는 새나 넘을 수 있다는 이곳 대관령을 넘어가면서 남긴 김시습의 ‘대관령에서’라는 시를 기억해서 그랬던지, 허균 역시 시를 남겼다.

“닷새 동안 아스라한 잔도(棧道)를 타고, 오늘 아침 대관령을 벗어났구려, 내 집이 어느새 눈에 보이니, 먼 나그네 갑자기 얼굴 풀리네. 긴 하늘은 쌓인 물 사이로구려. 희미하고 아득한 저 내 안계(眼界) 밖에, 한 점 솟은 저곳이 바로 사명산일세.”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길을 걸어가며 글을 남겼는데,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신사임당도 강릉에 두고 떠나는 어머니를 위해 한 편의 애달픈 시를 남겼다.

“늙으신 어머님을 임영에 두고, 이 몸 홀로 서울로 가네. 돌아보니 고향은 아득히 멀고, 저무는 산에는 흰 구름만 이네.”

이 지역 사람들이 “동대문 밖이 강릉이다”라고 말할 만큼 강릉은 관동대로 중에 으뜸가는 도시라고 할 만 하다. 강릉이 고향인 허균은 ‘성소부부고’의 ‘호서 장서각기(藏書閣記)’에서 강릉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강릉은 영해(嶺海)의 동녘에 있는 큰 도회지이다.(중략) 풍속이 돈후하여 노인을 공경하고 검소함을 숭상하며, 백성들은 소박하고 성실하여 기교가 없었다. 어업과 쌀의 생산이 풍요로워 비단 산천의 아름다움이 동방에서 으뜸일 뿐만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지방에 관리가 되어 오는 자들은 대개 여기를 못 잊어 하여, 떠날 때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으므로 원읍현(員泣峴). 원님이 울고 가는 고개) 생겨 지금도 있으니, 대개 그 증거가 될 만하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로 택리지 를 지은 이중환도 ‘이 지방 사람들은 놀이하는 것을 좋아하며 노인들이 기악(妓樂)과 술․고기를 싣고 호수와 산을 찾아 흥겹게 노는데 이것을 큰 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녀들도 놀이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학문에 몰두하는 사람이 적다.’고 하였던 것을 보면 강ㄹ으 지역 사람들이 유독 풍류객이 많았던 듯싶고 낙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쪽을 바라보니 산이 창 같고, 동쪽을 임하니 바다가 하늘에 닿았네”

대관령 가는 길
대관령 가는 길

이곡(李穀)은 그의 시에서 “산맥이 북쪽에서 왔는데 푸름이 끝나지 않았고, 바다가 동쪽 끝이어서 아득하게 가이 없어라”고 하였고, 김구용(金九蓉)은 “강릉의 산수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라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관령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의 진산이다. 여진 지역인 장백산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99굽이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치(府治)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관령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조선 중종 때 강원 관찰사로 부임했던 고형산(高荊山)(1453-1528)이었다고 하며, 그는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관의 힘으로 몇 달 동안에 걸쳐 이 고개를 열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강릉 사람들은 강릉 땅이 살기가 좋고, 대관령이 하도 험한 고개라서 “강릉에서 나서 대관령을 한 번도 넘지 않고 죽으면 그 보다 더 복된 삶은 없다”고 했다는데, 대관령은 해발고도가 832m이고, 고개의 총연장이 13km에 이르며,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 강회백(姜淮伯)은 그의 시에서 이곳을 이렇게 표현했다.

“길이 구산역으로 접어들자 양의 창자처럼 꾸불꾸불하여 말이 가지 않는다. 앞에 선 말몰이는 나무 끝으로 가고, 잔도(棧道)는 구름 끝에 걸리었네. 북쪽을 바라보니 산이 창 같고, 동쪽을 임하니 바다가 하늘에 닿았네. 부여잡고 가는 길 다한 곳에 우주가 다시금 아득하여라.”

얼마쯤 내려갔을까. 횡계 강릉으로 오가던 옛날 고속도로길이 나타나고 그곳에서도 내려가는 길은 아름다우면서도 멀기만 하다. 본래 명주군의 지역으로 보현산성(普賢山城)이 있으므로 성산면이라는 이름이 붙은 강릉시 성산면에 접어든 것이다.

아름다워서 서럽고 서러워서 아름다운 대관령 옛길이여!

대관령 옛길이 이어지는 가맛골 남쪽에 있는 제민원(濟民院) 마을은 조선시대에 제민원이라는 원이 있어서 대관령을 넘는 사람들을 위하여 편의를 돌봐주던 곳이다. 제민원 위쪽에 있는 마을이 상제민원이고 상제민원과 대관령 중간에 있는 반쟁이(반정)라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 중엽에 이병화(李秉華)라는 사람이 대관령을 지나는 길손들을 위하여 이곳에 막을 지어 놓고 쉬어 가게 하였던 곳이다. 그 거리가 대관령과 제민원의 반이 된다고 하여 반정(半亭)이라고 하였다.

하제민원마을을 지나자 대관령 박물관이 나타나고 귤면동에 ‘들꽃 사랑’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느러리에서 귤면동으로 가는 고개는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노루목재이고, 노루목이재 아래에 있는 마을이 귤면동이다. 느러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 망월이 마을로 옥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이라는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며, 부동과 망월동 사이에 있는 난중꾼 바위는 예전에 이곳에서 노름을 했다고 한다.

이른 아침에 출발했던 대관령 옛길은 점심을 먹으며 막을 내렸다. 가을 단풍이 눈부시게 가슴속으로 밀려들고 바람 몹시 불던 그 고갯마루는 영원히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굵게 패인 그 고갯길이 세월의 부침에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옛길은 그저 사라져간 역사의 길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해준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국토를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며, 현대인들의 건강을 책임져주고 새로운 관광 상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아! 아름다워서 서럽고 서러워서 아름다운 대관령 옛길이여! 길을 마무리하는 대고나령 박물관 아래를 흐르는 시냇물에 떠가는 나뭇잎을 보면서 정현종 시인의 ‘가을, 원수 같은’시 한 편이 불현 듯 떠올랐다.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는

우리를 무한 쓸쓸함으로 고문하는

가을, 원수 같은.

나는 이를 깨물며

정신을 깨물며, 감각을 깨물며

너에게 살의를 느낀다

가을이여, 원수 같은,

가을이 깊어가는 데, 그 깊어가는 가을, 사람들에게 잊혀 져 가는 옛길을 걷는 나는, 내 발길이 허락하는 날까지 이 길을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걸어가지 않을까.

/신정일. <사람과 언론> 제3호(2018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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