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부활시대(19)] 막걸리와 디지털 경제
음식점과 더불어 지역경제를 상징하는 상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막걸리이다. 일부 대형 양조장들이 전국적으로 유통시키는 막걸리도 있긴 하지만, 모든 것이 전국적으로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지역 고유의 정체성, 즉 읍면 단위에서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 막걸리이다.
막걸리는 남루한 농어민들이 일터에서 흘린 땀과 허기를 때우기 위해 마시던 술이다. 그래서 디지털 첨단 한국 사회에, 도시국가나 다름없는 한국 사회에 잘 어울리지 않는 술이다. 한 때 일본 관광객들이 선호한다고 해서 국내에도 막걸리 열풍이 불자, 대기업 주류회사들이 막걸리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아직도 지역 의 영세 막걸리 제조업자들이 지역시장을 지키고 있다.
막걸리 만들기보다 디지털 카드 결제기 버튼 누르기가 훨씬 어렵다?
얼마 전 TV 채널을 돌리다 가내 막걸리 양조장을 운영하는 노부부 의 애환을 다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은 방법으로 막걸리를 양조해 판매했는데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넘기 힘든 장애물이 생겼다.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외지에서도 막걸리를 사러 온 손님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이 도시에서처럼 신용카드 결제를 원하기 때문이다. 양조장 노부부는 카드결제기를 갖다 놓았지만 복잡한 사용 방법을 익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막걸리 만들기보다 디지털 카드 결제기 버튼 누르기가 훨씬 어려웠다.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같은 혁신 제품이 한 사회 내에서 확산되는 속도는 다양한 사회적, 기술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미국의 에버렛 로저스 교수가 1960년대 정립한 이론에 따르면, 혁신 기술의 확산은 4가지 요인에 의해 달라진다. 첫째는 혁신 기술 자체의 적합성, 둘째는 그 기술을 확산시킬 경로나 수단, 셋째는 시간, 넷째는 교육이나 문화와 같은 사회적 제도이다.
로저스 교수에 따르면, 사회 구성원들은 혁신기술 수용 정도에 따라 혁신자(innovators), 초기 수용자(early adopters), 초기 다수 (early majority), 후기 다수(late majority), 낙오자(laggards)로 구분된다. 혁신기술 확산의 차이는 지역 간에도 나타난다. 수도권과 대도시는 디지털 혁신기술을 신속하게 수용하지만 비수도권, 농어촌 지역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디지털 기술, 지역 간 격차 오히려 더 심화시켜
한편 디지털 기술 초창기에는 디지털 기술이 지역 간 격차 해소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그러한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한민국은 디지털 선진국이 되었지만, 지역 간 불균형은 여전한, 오히려 더 심한 나라가 되고 있다. 규모의 경제와 네트워크 효과가 결합된 디지털 기술은 지역 간 격차를 오히려 더 심화시키고 있다.
중앙에 집중된 자본과 새로운 디지털 기술이 결합하면서 지역경제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 경제 양상을 띠고 있다. 전통적 독립 자영 업자들이 지역 상권에서 사라지고, 대부분 서울에 본사를 둔 프랜차이즈 영업장으로 대체되고 있다. 동네 구멍가게와 슈퍼는 대기업 계열의 편의점으로, 동네 통닭집은 치킨 프랜차이즈의 분점으로, 동네 다방은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으로 바뀌고 있다. 프랜차이즈 대기업들이 디지털 혁신기술의 우위를 이용해 지역의 상권까지 장악한 것이다.
그나마 프랜차이즈 사업자로 전환되지 않는 것이 막걸리 제조업이다. 그래도 그들 수익의 일부는 카드 수수료란 이름으로 서울의 대형 은행에게 빼앗겨야 한다. 지역 영세사업자의 카드 수수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서울시는 2018년 ‘제로페이’를 개발했고, 많은 자치단체에서도 지역 내에서만 사용 가능한 디지털 지역 화폐를 개발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7년에는 3,065억 원에 불과하던 지역 화폐 발행 규모가 2019년에는 3조 2,000억 원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코로나 19에 대처하기 위한 재난지원금이나 재난 기본소득을 지역 화폐로 발행하면서 지역사회의 소비와 유통에 기여하고 있다.
※이 글은 장호순 교수의 저서 <지방부활시대>에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발췌해 연재한 글입니다.
/장호순(순천향대 신방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