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록 고문
이강록 고문

대입 관련 일화 하나로 얘기를 시작한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재무부장관을 지낸 로버트 에드워드 루빈에 관한 에피소드다. 루빈은 고교졸업반 때 하버드와 프린스턴 두 대학에 모두 지원했다. 그는 하버드에는 붙었으나 프린스턴에는 떨어졌다. 4년 후 루빈은 프린스턴 입학처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 대학이 퇴짜 놓은 학생 중 한 명이 그 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하버드를 최우등(summa cum laude)과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 ‘학문을 사랑하는 것은 인생의 길잡이’란 뜻의 라틴어. 우수한 성적의 미국 대학생 및 졸업생의 클럽 또는 그 회원을 말함.) 회원으로 졸업했습니다.”

입학처장이 답신을 보내왔다. “매년 우리 프린스턴대학은 하버드대학도 그런 훌륭한 학생이 다닐 수 있도록 성적 우수 학생 중 일정 수를 불합격시키는 것이 우리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루빈의 우쭐거림에 대해 재치있는 한 마디로 콧대를 꺾어버린 그 처장의 센스가 돋보인다. 이런 루빈의 태도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다. 달리말해 냉철했다기보다 들떴거나 자만했다는 말이다. 루빈 스스로는 잘난 체를 했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입학처장에게 한 방 먹은 거다.

감성적 태도는 이성적 태도보다 덜 치밀하다. 그래서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덜 과학적이다. 과학이 얼마나 유익한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개는 ‘과학’ 하면 낯설고 어렵다는 생각을 먼저 하기 일쑤다. 그러나 과학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인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를 생각한다면 과학이 얼마나 유익하고 위대한가. 또 과학이 생활과 먼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콩이 메주가 되는 것. 우유가 치즈가 되는 것도 과학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볼펜의 용수철 하나, 입고 있는 옷, 없으면 불안하기까지 하다는 스마트폰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과학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하다못해 침대가 과학이라는 우스개 광고도 있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 생활 가까이 있는 과학을 너무 어렵게 여기면서 등한시 한다. 과학은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 나아가서 과학이 발전한 나라가 강국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명한 현실이다.

지구의 자전축 23.5도 기울지 않았으면 계절도 없어

겨울에는 해가 짧아진다. 지구 표면에서 햇빛을 받는 쪽은 낮이 되고 어두운 반대쪽은 밤이 된다. 낮과 밤의 경계선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한다. 이는 물론 지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전하기 때문이다.

지구는 남극과 북극을 잇는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데 자전축은 공전궤도면에 대해 23.5도 기울어져 있다. 지구를 북극에서 바라봤을 때 시계반대방향(서쪽에서 동쪽으로)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지표면에서 볼 때 태양은 동쪽 하늘에서 뜨게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은 당연히 독도가 된다.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낮과 밤의 경계선은 계절에 따라 변한다. 이 기울어진 23.5도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계절의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 23.5도를 밝혀내는 노력이 곧 과학의 힘이다. 그런 과학의 근거 없이 자연을 이해하고 풀이가 가능할까? 그것이 미신이요 터무니없는 맹신의 빌미가 된다.
행성들의 자전축이 제각각 기우뚱해진 이유에 대해 과학자들은 바로 태양계 초기 소행성 대폭격기를 거치면서 무수한 소행성들에게 얻어맞은 결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 자전축은 23.5도가 틀어질 만큼 소행성 충돌을 겪은 것이다.

지구는 1시간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15도씩 회전한다. 지표면의 어느 한 지점에서 보면 자전이 진행되면서 점차적으로 태양의 윗부분 수평선에 접하게 되고 곧이어 수평선 위로 태양이 고개를 내밀게 된다. 이 순간이 일출이다. 그러나 지구에서 바라보면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24시간을 기준으로 한 바퀴를 회전하는 자전을 하고 있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태양빛이 지구의 대기에 굴절돼 어렴풋이 태양빛이 느껴지는 순간을 여명(黎明)이라고 한다. 여명부터 일출 전까지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 상태를 박명(薄明)이라 부른다. 아울러 해가 진 뒤 하늘에 잠시 밝고 푸른빛이 남아 있는 상태도 박명에 해당된다. 그 중에서도 일몰 후 박명의 끝을 박모(薄暮)라 일컫는다. 지구에서 바라본 태양의 위치에 따라 보자면 결국 하루는 자정-새벽-여명-박명-일출-아침-낮-저녁-일몰-박명-박모-밤-자정의 순서로 진행된다.

오늘날 과학기술이 발달돼 쇄빙선이 남극과 북극의 바다를 누비고 있다고 해도 항해사들은 가슴을 졸인다. 남극과 북극에 가까워질수록 많은 항해사들은 작은 얼음덩어리조차 결코 쉽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바다 밑에 그야말로 거대한 무서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 작은 얼음덩어리가 빙산의 일각임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렇듯 무서움을 감추고 있는 얼음덩어리의 비중이 곧 0.917이다. 물의 비중이 1이므로 유빙은 바로 그 거대한 몸을 물속에 감추고, 인간의 공포를 극대화한다.

얼음은 비중이 1인 물보다 가벼워 물에 뜨게 된다. 빙산은 91.7%가 물 속에 있고 겨우 8.3%만 물 밖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보다 숨겨진 부분이 더 많을 경우,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는 그 실상을 알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빙산의 일각’이라고 입에 올린다.

얼음 비중 0.917이 마치 인간성의 비중 닮아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타이타닉호는 비운의 유람선이었다. 타이타닉호는 여러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처녀항해에서 침몰했고 그 당시 가장 큰 배였고, 또 최고로 호화로운 여객선이었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점 등등.

타이타닉호는 1911년에 제작된 당시로서는 최고로 호화롭고 가장 큰 여객선이었다. 인간의 기술력을 망라한 걸작품이라는 자부심으로 1912년 미국으로 첫 항해를 나섰다. 하지만 빙산이라는 자연의 힘을 가볍게 본 결과 1513명의 사망자를 낸 최고의 해난 사고를 맞았다.

안개 낀 북대서양을 항해하던 타이타닉호는 물위로 나타난 조그만 빙산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물밑에 감춰진 엄청난 크기의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았다. 또 구명정으로 옮겨 탄 사람들조차 거대한 배가 가라앉으며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말려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무리한 항해를 하다 엄청난 비극을 불러온 결과였다.

인간은 누구나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아니 보이고 싶지 않은 자기 혼자만의 생각과 욕망이 있게 마련이다. 때로는 그런 욕망이나 속마음이 자기 안에서 숙성되지 못하고 표면으로 드러나 자신을 짓누르거나 남을 괴롭히기도 한다. 대체로 그런 속마음과 욕망은 선한 모습이기 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악마성과 추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하여 인간은 바로 0.917의 비중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침내 얼음이 녹더라도 물의 높이는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이처럼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진실과 인간의 욕망은 빙산의 감춰진 몸통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달력을 보자. 3월 14일은 무슨 날인가. 많은 사람들이 화이트데이로 답하기 십상이다. 물론 틀리진 않았다. 그러나 이날은 파이(π) 데이다. 바로 자연에서 가장 경이롭고 미스터리한 상수 중의 하나를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파이(π, pi)는 행성의 궤도, 오로라의 색깔, DNA의 구조를 기술하는 식에 나타난다. 파이의 값은 이밖에도 많은 다양한 곳에 사용된다. 아마도 아무리 발달한 게 현대수학이나 현대과학이라고 할지라도 파이를 빼거나 외면하고는 근본틀마저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수천년 동안 파이를 계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파이는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율을 나타내는 수학 상수다. 원주율을 나타내는 기호 파이는 1706년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에 의해 쓰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둘레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페리페레스’ 또는 ‘페리메트론’의 첫 글자를 딴 것이라고 한다.

무리수 파이(π) 사용해 유익함 얻어

윌리엄 존스는 기호 파이의 사용을 제안했다. “특정 도형의 길이나 넓이를 구하는 계산에 매우 유용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원을 예로 들면 지름이 1인 원의 둘레를 약 3.14159…= π로 표기하는 것이다”

파이(π)는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순환마디도 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무리수이다.

수퍼컴퓨터는 소수점 아래 2조 7천억째 자리 이상까지 파이값을 계산하는데 성공했고 여전히 계산중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소수점 이하 몇 자리까지 외우는가 내기를 하기도 했다. 물론 재미삼아 벌인 호사취미라고 할 수 있지만 현대 수학이나 과학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존엄하게도 파이(π) 상수다. 이제부터 3월 14일은 화이트 데이보다 먼저 파이(π) 데이를 기억해 주시길…

언젠가 사변과 문장이 뛰어난 석학 이어령이 이렇게 말했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예술이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다.”

결국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풀이를 빌려온다면 과학적인 태도와 판단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랄 수 있다.

요즘 세상이 어지럽다. 굳이 위정자나 정치인들은 탓하기조차 염증이 난다. 도나캐나 엉터리 궤변과 혹세무민의 참언으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나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가을 산천에서 진달래가 피기를 원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 자 그러니 애먼 우리네 김씨이씨들이라도 차분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이성과 과학의 도움을 얻으며 마음을 추스리자. 그렇다고 머리 터지게 수학이나 과학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과학의 위대함, 수학의 치밀함을 가슴에 담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과 말과 주장을 해보자는 외람한 요청이다.

재미있는 일을 할 때면 시간이 어찌 그리 빨리 흘러가는지 우리는 아쉬워한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른다고 느낀다. 물리적 시간이란 언제나 똑같은 속도로 흐른다. 그런데 흘러간 시간의 길이를 실제보다 주관적으로 과소 추정하게 된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시간 지속에 대한 인식은 주로 뇌의 기저핵이나 두정엽과 같은 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만일 시간 흐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물리적 시간인식을 담당하는 뇌 센터라고 간주되는 기저핵과 두정엽 등의 통제만 받는다면 사람들이 시간 흐름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오류를 범하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제각기 다른 경우가 많다.

시간의 흐름 주관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기 마련

한 가지 심리학 실험을 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상태로 실험에 참여한 피험자는 상대편 사람이 친절하고 미소를 짓는 경우보다 화내고 분노한 표정을 짓는 경우에 더 오랜 시간이 경과한 것으로 느꼈다. 또 살아있는 거미를 같은 시간동안 본 경우에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꼈다. 거미를 혐오하는 사람은 거미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사람보다 더 긴 시간 동안 거미를 봤다고 느꼈다.

다른 심리학 실험의 예를 보자. 실험 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지 않은 채 3분 동안 소리 듣기 실험을 실시했다. 컴퓨터로 울리는 ‘삐익’ 하는 소리가 한 집단에는 5초에 한 번씩 울렸고 다른 집단에는 2초에 한 번씩 울렸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실험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흐른 시간이 몇 분 몇 초인지 추정하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 같은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2초에 한 번씩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5초에 한 번씩 소리를 들은 사람들보다 더 긴 시간이 흘렀다고 추정했다. 사람들은 시간 흐름의 절대적인 양보다는 시간 흐름 내에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자주 발생했는가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인식했다. 따라서 사건들이 더 많이, 자주 일어났으면 더 긴 시간이 흘렀다고 인식했다. 이런 실험 결과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절대적, 물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정보처리를 해 재구성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함에 있어서 모종의 추가적인 정보처리를 해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 길이 중심으로 반응한다는 점이다. 그 시간을 채운 사건이나 대상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적 반응이 좋았는지, 싫었는지 또 사건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가 등이 우리의 시간 인식에 영향을 준다.

우리 뇌에는 두 종류의 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고도 하루주기로 일상생활을 할수 있다. 바로 빛을 기준으로 삼는 ‘하루주기성 시계(Circadian clock)’가 있기 때문이다. 대개 정상적인 아이나 어른의 하루주기성 시계는 지구의 자전에 맞춰 24시간 11분(±16분) 경을 하루로 설정한다.

뇌의 또 다른 시계인 ‘시간간격 시계(interval timer)’는 짧은 시간동안 하나의 사건이 시간적으로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를 잰다. 이 시계는 어떤 사건에 뇌가 반응할 때 뇌의 관련 부분들이 반응하는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뇌의 시간 담당 영역들에는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시계(또는 메트로놈)가 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조합돼 리듬이 다양해진다. 결국 사람은 리듬의 변화로 시간의 변화를 인지한다.

자신의 경험적 에피소드들은 기억에 저장돼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에피소드에 대한 시간의 흐름을 인식함에 있어 물리적 시간의 흐름 그 자체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기억’을 동원해 실제 시간 경과의 길이 판단에 적용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이 오랜 진화 역사 과정에서 적자생존하기 위해 획득한 일종의 적응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즉 한 달이나 몇 년과 같이 긴 시간의 흐름을 살아가는 우리는 물리적 ‘시간’ 그 자체보다는 그와 관련된 주관적 ‘기억’에 바탕을 두고서 시간을 인식한다는 얘기다.

이것은 시간 인식에 대한 정보처리 심리학 이론 중 하나다. 바로 이같은 이유로, 우리는 매년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다른 달보다 더 짧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더 빠르게 흘러간다고 여긴다. 제한된 시간 내에 여러 상황들을 압축해 정보처리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12월은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달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살면서 여러 번 반복되지만 시작과 끝이 여일해야 한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12월에 시간이 촉급하다고 느낀다면 결코 짜임새 있게 생활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알뜰하게 시간을 쓰는 사람이 시테크의 지배자다.

/이강록 편집고문, <사람과 언론> 제7호 게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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