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여유를 찾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남들이 한다는 것들은 죄다 따라 한다면 만사휴의인가. 그렇지 않다. 자기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저 요량도 없이 남이 가는 대로 따라 갈 일이 아니다. 여유로워지고 싶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내게 최적화하도록 해야 한다.
‘영원한 사랑’이 꽃말인 이팝나무
뒷동산에 만발했던 진달래와 철쭉꽃이 지고 산야는 하루가 다르게 신록이 우거져 간다. 이 무렵에 피는 꽃 중에 이팝나무가 있다. 새로 나온 가지 끝에 하얀 꽃이 수수모양으로 나무 전체를 뒤덮어서 마치 쌀밥을 담아 놓은 것처럼 핀다.
이 나무에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꽃 피는 시기가 예전 같으면 가장 배고픈 고통에 시달렸던 보릿고개 즈음이다. 그래서 춘궁기에 굶어 죽은 자식의 무덤가에 이 나무를 심어놓고 죽어서라도 흰 쌀밥을 마음껏 먹기를 빌었다. 그러니 그냥 꽃이 아니라 밥꽃이다.
이팝나무와 쌀밥에 얽힌 또다른 이야기도 애달프다. 시어머니 구박을 받던 착한 며느리가 어느 날 조상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귀한 쌀밥을 지었다. 그러다가 뜸이 들었는지 알아보려고 밥알 몇 개를 떠먹는 것을 때마침 부엌에 들어온 시어머니가 봤다. 시어머니는 조상 제사 올리기 전에 며느리가 먼저 퍼먹었다고 더욱 더 구박했다. 구박을 견디다 못한 며느리,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이 며느리가 묻힌 무덤 가에 흰 꽃이 수북하게 피는 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쌀밥에 한이 맺혀 죽은 며느리가 환생한 것이라고 해서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요즘은 시가지 도로변에서도 하얀 꽃이 소담하게 핀 이팝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멀리서 보면 나무에 눈이 소복소복 쌓인 듯 탐스럽다.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이 쌀밥을 수북이 얹어놓은 모습이다. 이름도 이밥을 닮았다 해서 ‘이팝나무’다. 벼농사가 잘되면 쌀밥(이밥)을 먹는다고 해서, 또 입하 무렵에 꽃이 피기 때문에 이팝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이팝나무 꽃이 많이 피면 풍년이 들 걸로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여겼다고 한다. 지난날에는 꽃이 얼마나 잘 피는지, 이팝나무의 꽃피는 모습을 보고 한 해 벼농사의 풍흉을 짐작했다. 치성을 드리면 그해 풍년이 든다며 신목(神木)으로 받들기도 했다.
이팝나무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다. 자식을 위한 사랑인지, 부모를 위한 사랑인지, 여하간에 영원하다니 값진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이팝나무를 예전엔 무심코 지나쳤다. 느릿느릿 걸으면 못 보던 것이 보인다 했던가. 얼마 전 아침나절에 동네 한바퀴를 돌다가 가로수에 자욱하게 핀 꽃을 발견(?)했다.
돈, 권력, 명예 한꺼번에 가질 수 없어
길 가던 나그네 몇이서 우연히 얘기를 나눴다. 각자 희망을 말했다. “나는 양주 지방의 자사가 되고 싶어” “나는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나는 학이 돼서 하늘을 날고 싶어” 이 세 사람까지는 그래도 꿈이 단순소박하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면? “나는 허리에 돈 십만 냥을 차고 양주자사가 된 뒤 하늘을 날고 싶어”에 이른다. 앞 세 사람의 바람을 모두 모아 갖겠다는 거다.
이른바 양주학(揚州鶴)에 관한 고사다. 권력과 재력에 청아한 신선의 자유까지 다 가지겠다? 터무니없다. 욕심이 그야말로 끝이 없다. 그런 사람은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동아줄을 바늘에 꿰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번역은 오역이다. ―헬라어로 낙타:카멜로스와 밧줄:카밀로스를 혼동한 결과)
그래서 소동파는 ‘세상에 어떻게 권력과 재력을 갖춘 신선, 즉 속(俗)과 아(雅)를 겸해 누리는 욕심쟁이 신선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지 않는가 싶다.(世間那有揚州鶴-‘오잠승녹균헌’이란 시에서)
양주학 얘기를 통해 지족의 뜻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 돈과 명예와 건강 모두를 가진 사람은 없다. 그중 하나라도 가졌다면 충분히 만족해도 된다. 허나 다들 모조리 움켜쥐겠다고 아등바등 살아간다.
여가활동을 하면서 문인화를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그 속기를 벗어난 맑고 깔끔한 세계에 빠져드는 복을 누리기가 쉽지 않다.
문인화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정교하게 사진 찍듯 그린 그림이 아니다. 각각의 사물에 문인의 정신을 이입해서, 그려진 사물을 통해 문인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른바 형사(形似:외형의 닮음)를 중시하는 게 아니라, 그림에서 우러나오는 신사(神似:정신의 닮음)를 중시한다. 그래서 사진 찍듯 그린 문인화는 없다.
문인화에서 이렇듯 신사를 중시하는 사상은 멀리 장자(莊子)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장자는 ‘도(道)’를 우주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고 또 우주 만물이 변화 발전하는 규율로 보았다. 장자는 정신과 우주 만물의 본원인 도와의 합일을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경지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의 외모보다는 내면의 정신을 훨씬 더 중시했다. 이런 장자의 생각은 자신의 책 『장자』에 등장하는 추한 외모를 가진 여러 인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덕충부’편에 나오는 왕태, 신도가, 숙산무지, 애태타 등) 이들은 한결같이 다리가 잘리거나 얼굴이 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외모와는 달리 매우 훌륭한 인품을 갖추고 있다. 장자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외모보다는 정신을 더 중시하는 그의 생각을 내비친다. 얼굴이 못 생겼다고 해서 마음까지 험하지는 않다는 참으로 지당한 판단이다.
이같은 장자의 견해는 후대로 이어졌다. 한나라 때에 보다 구체적인 ‘형신론(形神論:형상과 정신의 관계)’이 나타난다. 바로 회남(淮南)의 왕이었던 유안(劉安)은 그의 책 『회남자(淮南子)』를 통해 ‘군형설(君形說)’을 내놓았다. 군형 즉 ‘형(形)’을 君(통솔,주재)하는 것‘은 ’神‘이라는 설이 군형설이다. 풀어 말하면 형체를 통솔, 관장하는 것은 정신이라는 주장이다. 군형설을 그림에 구체적으로 도입해서 설명하는 말은 이렇다.
“미인 서시의 얼굴을 그릴 때 아름답기만 할 뿐 이야기가 없이 그리고, 크게 분노한 맹분〔살아있는 소의 뿔을 뽑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는 진(秦)나라의 장사〕이라는 사람의 눈을 그린 그림을 들여다봤을 때 그 눈이 크기만 할 뿐 그 눈에서 두려움을 못 느낀다면 그런 그림은 군형이 없는 그림이다.”
곧 정신이 없는 그림은 죽은 그림이 될 것은 뻔한 이치 아닌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생기 없는 그림, 생동감 없는 그림을 보고 무슨 감흥이 일어날 것인가. 이런 연유에서 중국의 그림은 특별히 정신의 표현을 중요시하게 됐다.
이같은 배경 속에서 중국의 화성(畫聖)이라 불리는 고개지는 그림역사에 획기적인 획을 긋는 형신이론을 완성한다.
고개지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도 몇 년 동안 눈동자는 그리지 않은 채 놓아두곤 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다. 고개지는 “사지 즉 육신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은 본래 그림의 오묘함과는 관계가 없다. 그림을 오묘하게 하는 관건은 바로 피사체의 정신을 전하여 그 정신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데에 있는데 정신은 바로 눈동자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 정신을 다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눈동자를 그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얘기다
여기서 고개지가 그 유명한 ‘형체를 그림으로써 형체를 통하여 정신을 그린다(표현한다)’는 ‘이형사신(以形寫神)’론이라는 화론을 내놓은 거다. 고개지는 이처럼 그림 한점 한 점에 혼신의 힘과 정신을 쏟았다.
고개지만 그런 것은 아닐 테다. 모든 화가들이 다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대다수 화가들은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붓는 자세로 그린다. 그런 그림을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그저 스쳐지나가듯 훑어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때문에 그림을 볼 때 그 까닭과 연유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생긴다. 기왕 느끼고 즐기려고 보는 그림인데 배경지식을 갖고 본다면 훨씬 흥미 있고 눈에 보이는 게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게 바로 적극적인 휴식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니멀리즘은 저리 가라…이젠 '와비사비' 시대
요즘 너도나도 정신없이 사는 세상이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단순한 삶 또는 너저분하지 않고 간명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미니멀 라이프다. 달리 말하면 ‘뭣이 중헌디?’식 생활방식이다. 미니멀리스트들은 하나같이 ‘소중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라’고 강조한다.
‘와비사비(わびさび)’는 완벽하지 않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삶의 방식이다. 부족해 보이지만 그 안에 깃든 깊이를 문득 깨닫는 미학적 개념을 말한다. 와비사비는 ‘와비’와 ‘사비’가 합쳐진 단어다. 미완성, 단순함을 가리키는 와비와 오래된 것, 낡은 것이란 의미의 사비가 합쳐져 ‘미완성의 아름다움’이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럼 와비사비는 어떤 의미일까? 와비사비는 생명의 본질을 담은 아름다움이다. 덧없고 불완전한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단순하고 느리고 자연스러운 삶을 축복으로 여기는 자세이자 태도다.
와비사비는 최근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로 떠올랐다. 적당한 삶을 가리키는 스웨덴의 라곰(Lagom), 나와 친밀한 이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소박하고 느긋한 삶을 추구하는 덴마크 휘게(Hygge), ‘끊고, 버리고, 떠난다’라는 일본의 ‘단샤리(斷捨離)’, 소박한 것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미국인들로부터 시작된 킨포크(Kinfolk) 역시 미니멀 라이프와 맥을 같이한다.
“채우지 않아도 아름다운 순간”
“우리는 언제나 완벽함을 추구한다. 공간을 채우려 더 많은 물건을 들이고 부족함을 채우려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렇게 채우려 하지만 영혼은 늘 배고프다.
그러나 우리 삶의 본질이 ‘불완전함’에 있다면? 우리 삶이 어딘가 부족하듯 지금 내가 가진 것,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와비사비는 비로소 시작된다. 이른 아침 첫 햇빛이 나무에 닿을 때, 소박한 식탁을 좋은 사람과 나눌 때, 오래된 물건에 문득 애정이 느껴질 때, 우리는 와비사비와 만난다. 단순하고 느긋하며 고요한 삶 와비사비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베스 켐프턴이란 사람의 책 ‘매일매일 와비사비’ 카피 그대로다.
수수하고 겸손한 삶에 대한 성찰은 이렇듯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하지만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에만 집중해 인생의 의미를 찾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의 잣대로 자기 삶을 재기 시작하면 ‘해야 하는 것’들에 시달리게 된다. 내가 해야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하는 것’들이 나를 채근하기 시작한다.성취해야 하는 일, 이뤄야 하는 일들의 엄청난 압박에 짓눌리게 된다. 누가 주체이고 무엇이 객체인지 뒤죽박죽이 돼버린다.
현재 무엇을 가졌건, 어떤 사람이건 간에 대개 지금 이대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다.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려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좋은 대학, 좋은 스펙, 좋은 회사 취직 등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와비사비’는 인생은 원래 불완전하고, 불완전함이 삶이 본질이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는 완벽하게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현재의 나를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와비사비가 시작된다. ‘나도 이제는 욕심의 압박에서 나를 풀어주고, 지금 그대로의 나를 더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족하고 모자란 것의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와비사비 추종자들은 말한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새로운 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자기 모습을 그대로 인정해야 할 일이다.
자기를 아는 사람이 총명한 사람이다.
자지자명(自知者明)! 자기를 아는 사람이 총명한 사람이다. 자신을 이기는 것에 대해서는 노자 도덕경 33장에도 나온다.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현명하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센 데 불과하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라야 진정한 강자이다. 만족함을 아는 게 진정한 부자이며 힘써 행하는 자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리할 곳을 잃지 않는 자가 오래 가고,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자가 진정으로 장수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명확하게 알 수 있어서 어떠한 사람이든지 다 잘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역사상 뛰어난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을 잘 알고 잘 맡기는(知人善任)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잘 알고 잘 맡기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잘 할 수 있다면 훌륭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어야 정말 똑똑한 사람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도(道)를 이룬 사람들을 제외하면 똑똑한 사람이 매우 적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데 남들이 자기를 이해 못한다고 한다. 자신을 아는 현명함(自知者明)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또 힘으로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강한 사람이다. 자기 처지를 알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이 정말로 부유한 사람이며, 자기 분수를 지키며 자기가 해온 일이 후세에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오래 사는 일이라는 것이다.
서예가이며 중문학자인 전북대 김병기 교수가 책 『나 말고 누가 나를 괴롭히겠는가』에서 말했다. “어느 날 나를 들여다보았더니 나도 차안에 들어온 벌이나 풍뎅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내 앞에 활짝 열려있는 그 많은 행복의 문들은 다 놓아두고서 꽉 막힌 다른 문만 행복의 문이라고 고집하며 그 문만 애써 두드리고 있는 게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건강하신 부모님이 계시고, 마음씨 고운 아내가 있고, 착한 자식들이 있으며, 그런 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는 따뜻한 집이 있는 나는 알고 보니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행복을 곁에 두고서도 다른 곳에 가면 더 좋은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늘 고개를 치켜들고서 두리번거리며 숨도 제대로 쉴 겨를이 없이 허겁지겁 뭔가를 찾아 허덕이며 사는 게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아는 나는 남이 아는 나와 다르고, 내가 아는 남은 남이 아는 남과도 다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기는 참 어렵다. 자기보다 큰 적은 없다고 한다. 중국 송 나라 때의 보제(普濟)선사는 “나 말고 누가 나를 괴롭히겠는가?”라고 물었다. 나를 괴롭히는 것도 나, 나를 망치는 것도 나다. 그러니 자기부터 이겨야 한다.
“(죄인의 목에 씌우는) 120근이나 되는 무거운 칼을 누구로 하여금 짊어지게 하겠습니까?”하고 묻자, “만든 사람 스스로가 짊어져야 한다”고 했다.
보제 스님이 엮은 《오등회원(五燈會元)》에 나오는 말이다. 스스로 악을 만들면 그 악의 결과를 스스로 당하게 된다. 남을 빠뜨리기 위해서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허덕이는 사람은 함정을 판 그 사람 자신인 경우가 많다.
악의 업(業)만 이렇게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게 아니다. 자신을 들볶는 것도 역시 자기 자신이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이 나를 괴롭게 한다.’고 말하지만 세상은 본래 아무런 말도 없고 일도 없다. 다 사람들 스스로가 일을 만들고 구실을 만들어 남을 욕하고 미워하고 싸우면서 그 싸움으로 인해 괴로워할 뿐이다. 자신을 들볶고 괴롭히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 말고 누가 날 괴롭히겠는가? 마음을 비우고 남을 대하면 남이 나의 덕을 보는 것 같지만 진정한 수혜자는 나 자신이다. 다시 한 번 되뇌어 보자. ‘나 말고 누가 날 괴롭히겠느냐?’고.
‘그것이 인생이지(C'est la Vie)’
쎄라비! 이 말대로 산다는 것은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고 우연하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잘못됐다고 자책하거나 탓하지 말자. 인생은 그런 것이니. 그렇다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풍타죽낭타죽(風打竹浪打竹)’ 바람불면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면 물결치는 대로는 아니다. 인위적이고 억지스럽게 거스르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는 말이겠다. 매사에 다 흐르는 결이 있고 풀리는 가닥이 있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다. ‘Such is life! 사는 게 다 그런 거지!’가 넉살맞지만 그럴싸하다.
“느림은 무엇보다 사랑과 잘 맞는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빠름이지만 사랑에서 그리고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림이다.”
독일 뮌헨대 칼 하인츠 A 가이슬러 교수가 쓴 책 ‘시간’에 나오는 구절이다. 빠름을 이기는 것은 더 빠름이고 더 빠름을 이기는 것은 더 더 빠름이 아니라 느림이다. 느림에는 사랑 여유 인내가 있다. 나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게으른 상태라면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구석구석 느끼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느린 달팽이가 풍경을 본다고 했다.
또 느림의 미학자 피에르 상소는 이렇게 말했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 가지 않겠다는 결심이며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런 느림 예찬론자들의 사색을 빌려와 원용해 본다면 인생도 느림이란 덕목을 필요로 한다. 매사 빠른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때로 느리게 기다리는 것이 더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내와 성찰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는 지 익히 알지 않는가. 빠른 인내, 빠른 성찰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사람과 언론> 제5호(2019 여름).
/이강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