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과 대동사상 재조명(1)

조선시대 대표적 역모사건으로 알려진 '기축옥사'는 전북 출신인 정여립 선생이 주도한 '모반사건'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기축옥사는 재조명돼야 한다는 주장이 전북과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줄곧 제기돼  왔으나 학계나 언론계에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미 기록된 역사를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과연 그럴까? (사)대동사상기념사업회(이사장 신정일)가 마침 지난해 개최했던 ‘제1회 공화주의자 정여립 학술세미나’는 이러한 배경과 의미를 함의하는 '역사 바로보기' 그 자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당시 학술대회 등을 토대로 '정여립과 대동사상'을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2019년 5월 31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국제회의실에서 개최된 학술세미나는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우리시대의 전라정신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진행됐다.

신정일 이사장
신정일 이사장

신정일 이사장은 ‘정여립과 대동사상, 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기조발제를 , 이해준 공주대학교 교수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각각 주제발표를 했다. 이어 김동수 백제대 명예교수가 좌장을 맡아 김병기 동국대학교 교수, 김명옥 건국대학교 교수와 토론을 벌였다.

특히 세미나에는 기축사화에 큰 피해를 당하였던 가문의 대표들이 대거 참여해 토론을 하는 등 서울·부산·광주·익산·정읍·천안 등에서 기축사화와 관련된 후손들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대동사상기념사업회의 동의를 얻어 기조발제와 주제발제 등 3인의 논문을 원문 그대로 공개한다. 순서는 다음과 같다.

2019년 5월 31일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서 열린 세미나 모습
2019년 5월 31일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서 열린 세미나 모습

▲‘정여립과 대동사상 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는가?’-신정일(문화사학자, 대동사상기념사업회 이사장, 우리 땅 걷기 이사장)

▲‘호남 사림 학맥의 형성 변천과 정여립’-이해준(공주대학교 명예교수)

▲‘정여립 사건과 송익필의 역할’-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신한대교수) 


|정여립과 대동사상, 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는가?|

정여립, 그는 누구인가?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다산초당,신정일  저)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다산초당,신정일  저)

언젠가 지역의 몇 사람들과 전라도 지역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서 난상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에서부터 정여립의 기축옥사를 거쳐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유장한 역사의 흐름을 전라도 지역 역사의 중심축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몇 사람은 그 역사들은 모두가 실패한 역사이기 때문에 전라도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논지를 폈다. 곧 견훤의 후백제는 견훤과 신검 양검 부자간의 내분으로 패한 역사이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도 없고, 정여립은 전주 이씨를 관향으로 나라를 건국한 조선 왕조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용납될 수가 없고, 동학농민혁명은 전봉준과 김개남 등 지도부의 의견 불일치로 패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였다.

그 말에 격해진 나는 그렇게 말한다면 조선이라는 나라 역시 건국 당시 태조와 태종의 권력 다툼과 왕자의 난이 있었고 뿐만 아니라, 수양대군과 단종에 이르러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또 덧붙여서 조선이 무너지던 시기에는 대원군과 민비 즉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힘을 겨루었고, 그것이 조선 멸망의 한 원인이 되지 않았느냐고 되받았다.

결국, 우리는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의견의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의 입장차이만 확인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또 얼마 전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정여립 사건은 역모사건이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선생님은 지금 조선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까?”

아무 말도 없이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았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한지 백 몇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반역자였지만 오늘의 이 시점에선 혁명가가 아닌가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등이 그 당시는 반역자로 그토록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서울 종로 한 복판에 전봉준의 동상이 들어섰고, 김개남 손화중의 비석이 세워진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그뿐입니까? 국가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을 세웠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을 만들었지 않습니까? 왜 기촉옥사의 주인공 정여립만 이중 잣대를 가지고 보십니까? 그렇게 본다면 다산 정약용 선생도 그렇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사를 유장하게 이어진 긴 흐름에서 보아야 하는데, 역사를 너무 단편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닐까?

서양에서는 ‘실패한 혁명도 혁명’이라고 부르고, 정치 형태를 왕자(王者), 패자(覇者), 망자(亡者)로 구분하였던 순자(筍子) 또한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의(義)를 앞세우면 왕자(王者)가 되고, 신(信)을 앞세우면 패자(覇者)가 되며, 권모를 앞세우면 망자(亡者)가 된다.”고 하면서 왕자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패자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삼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실패한 역사는 역사도 아니고 실패한 혁명은 혁명도 아닌가? 그래서 100여 년이 다 되도록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으로 3.1절은 3.1운동으로, 4.19는 그냥 미완의 혁명이라고만 불렀던가?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역사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얼마든지 새롭게 재조명될 수 있고 실제 잊혀진 역사가 새롭게 부활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더구나 백제 유

민의 한을 풀기 위해 일어섰던 진훤이나, 더불어 잘살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대동계를 조직했던 정여립, 그리고 사람이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걸고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들이 지향했던 것은 진실로 모든 사람들이 염원하는 공동선(共同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러한 개혁 사상들은 베일 속에 가려진 채, 400여 년 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났던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답사 길이나 사석에서 정여립에 대해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람 아마 모반을 했다지?” 하고 말끝을 흐리거나, “그 사람 역적이었다지”라고 되묻곤 한다. 하지만, 어쩌다 예외인 경우도 더러 있다.

이 지역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몇 사람은 정여립에 대해 남겨진 것은 없지만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동시에 대사상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실제 이발이나 정개청, 최영경 등 기축옥사 때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은 여러 형태로 남아 전해오는데 비해, 유독 정여립에 대한 기록은 불과 몇 줄뿐이고 그의 흔적이나 일가 친척들 그리고 후손들에 대한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정여립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으로써 그의 생각이 담겨 있던 저술이나 흔적들을 남김없이 없애버렸고, 그의 이름을 들먹이는 일까지도 꺼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기축옥사나 ‘정여립’이라는 단어조차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다만 두텁게 각색된 부정적인 이야기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해져왔을 뿐이다. 기축옥사와 정여립에 관한 것들은 여러 문헌이나 백과사전 등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여립 선생 초상화
정여립 선생 초상화

정여립(鄭汝立 ?~1589<?~선조22>) 조선 중기의 모반자. 자는 인백(仁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로. 전주 출신이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으나 성격이 포악 잔인하였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이․성혼의 문인.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퇴관하였다.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東人)에 아부, 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 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중 의연(依然)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정감록(鄭鑑錄)》의 참설(讖說)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선조 22) 거사(巨事)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여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안악 군수 이축(移築)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잡히자,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천여 명의 지식인이 희생되었고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실패한 혁명가의 이력서

대다수 실패한 혁명가들의 이력서는 늘 이러했다. 미륵의 나라를 세우려 했던 태봉국의 궁예(弓豫) 서경 천도를 주장했던 묘청(妙淸) 그리고 공민왕과 함께 급진적인 개혁을 주도했던 신돈(辛旽)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건국했던 풍운아 삼봉 정도전(鄭道傳)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격이 포악 잔인하고 음탕하며” 이처럼 이긴 자들에 의해 기록된 역사 속에서 패자들의 모든 것들은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1589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일어났던 정여립 모반(謀反)사건, 즉 기축옥사를 두고 혹자는 조선 왕조의 정치 사회적 구조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하고, 지역 내 사림 사이의 갈등과 개인적인 감정 대립의 결과라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여립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지 모반사건이 아니라고도 하며, 한편에서는 모반을 하기는 했는데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1589년 무려 1천여 명이 희생당한 기축옥사의 실체는 무엇인가. 먼저 기축옥사 이후 쓰여진 《선조실록》이나 《선조수정실록》그리고 《연려실기술》등 여러 문헌의 기록부터 살펴보자.

1570년 문과에 급제한 정여립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대과급제 13년 만에 율곡의 천거로 예조좌랑에 올랐으며 그 이듬해 홍문관수찬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 뒤 곧바로 동인인 이발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이이와 성혼․박순을 경연에서 공개적으로 비방하기 시작했다. 정여립의 돌연한 변신에 서인이었던 의주 목사 서익이 상소를 올려서 정여립의 배신을 공격하였다. 이이가 살아있을 때는 뜨락에 있는 감을 가리키면서 “공자는 다 익은 감이라면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다.

이 반쯤 익은 것이 다 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율곡은 진실로 성인이다”라고 말했던 정여립이 돌아선 이유는, 율곡 이이가 겉과 달리 속으로는 정여립의 과격성을 견제하였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는 이이의 말처럼 동인이 주도권을 잡자 정여립이 시류에 편승했다는 설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현실주의자였던 이이와는 달리, 정여립은 이황과 같은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여립은 이이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이이와 절교하였다고 맞받아쳤고, 이때 이이의 조카인 이경진이 이이가 죽기 직전 정여립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를 선조에게 올렸다.

그 편지에는 정여립이 동인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선조는 정여립에게 오늘의 형서(刑恕)라고 말하였다. 형서는 송나라 때 사람으로 원래 정이천의 제자였으나 사마광의 문객이 되었고 다시 사마광을 배반하면서 파벌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권력자 채경(蔡京)의 심복이 된 간사한 사람의 표본이었다.

정여립은 두 눈을 부릅 떠 선조를 노려보고 벼슬을 하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고향에 돌아온 정여립은 금구․원평 일대를 중심으로 대동계를 조직하였다. 그 후 정여립은 정해왜변 때 남해 손죽도에 쳐들어 온 왜구들을 무찌르고 황해도 구월산 일대의 사람들까지 모아 무술 연마에 힘썼는데 그 수가 6백여 명을 넘어섰다.

그런데 1589년 10월 안악 군수 박충간, 신천 군수 한응인의 연명으로 황해 감사 한준의 비밀 장계(長計)가 올라왔다. 정여립의 역모를 알리는 장계였다. 선전관과 금부도사가 전라도와 황해도에 급파되었고 정여립은 진안의 죽도로 도피했다. 진안 현감 민인백에 의하면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부하인 변숭복을 죽인 후 자결하였고, 이로써 '조선조의 광주사태' ,기축옥사가 시작되었다.

대동사상과 대동계의 실제

진안군 천반산 입구
진안군 천반산 입구

정여립이 꿈꾸었던 이상사회와 그가 조직한 ‘대동계’는 어떠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대동계’가 모반을 위한 무력 집단이 아니라,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실의에 차있던 정여립이 불만을 달래며 불평 많은 시골 무사나 선배들과 어울려서 활쏘기를 겨루며 술 마시고 놀던 향촌의 친목계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본래의 대동계는 원래 주나라 시대에 어질고 재능 있는 인재를 등용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던 향사례(鄕射禮)를 지역사회에서 구현한 집단이었다.

「주례」에 의하면 향사례는 지역 단위인 주(州)에서 정월 중 길일을 택해 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조선 성종 대에는 사림파가 류향소 복립운동을 추진하면서 그곳에서 시행해야 할 의례로 추천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향사례는 지방의 결속과 자치를 위한 방편이었고 지역 자치조직으로서의 기능을 겸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정여립은 그 당시 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지역자치와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대동계를 조직하였을 것이다. 곧 대동계는 그가 꿈꾸었던 대동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정여립이 조직했던 대동계는 그 당시 마을의 자치를 맡았던 대다수의 계와 달리 반, 상, 노가 모두 계원이 되었

다는 점과 조직의 범위가 군현의 경계를 뛰어넘어 광역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활쏘기에 치중된 점이 다른 계들과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대동계가 어떤 성격으로 어떻게 운영되었고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계’들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영암 월출산 자락의 구림 대동계가 그러하고, 장흥방촌의 향촌계 및 지역마다 성행하는 여러 계들이 정여립의 대동계의 명맥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동해 두타산 밑의 그 너른 무릉반석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을 보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동갑계나 지역 사람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향촌계들이 얼마나 성행했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대동사상

진안군 죽도
진안군 죽도

대동(大同)의 출전(出典)은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이상세계이며, 대동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대동소이(大同小異)․대동단결(大同團結)․태평성세(太平盛世)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 중에서 태평성세라는 의미의 어원은 《예기(禮記)》〈예운편(禮運篇)>에 최초로 보이는 이상사회로써의 ‘대동(大同)’이다. 이때의 동(同)은 사람들이 장막안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로 평(平)과 화(和)를 뜻하며,대동사회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즉 ‘천하는 가문의 사물(私物)이 아니고 만민의 공물(公物)’이라는 뜻이다.

《예기》는 중국 최초의 문헌학자인 유향(劉向 BC 77~6)이, 후한 초에 전국시대로부터 후한 말까지 백가들이 예경에 관해 쓴 131편의 글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그후 이것을 대덕(戴德)이 85편으로 대성(戴聖)이 49편으로 정리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예기》는 소대 《예기》다. 그리고 《예기》가운데 대동과 소강(小康)을 기록한 〈예운편〉의 필자에 대해서는 자유(子遊) 문인설(門人說), 순자(荀子;BC 313~238) 문인설, 전국 말이나 진한 때 어느 유학자의 글이라는 설 등 확실한 정설이 없지만 ‘천하에 남이란 없다(天下無人)’ ‘백성이 주권자(百姓爲主)’라는 공화민주사상을 주장한 묵자의 사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예기》에 실린 대동세계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대도가 행해지니 천하가 만민의 것이 되고 어질고 유능한 자가 선출됨으로써 모두가 신의를 중히 여기고 화목한 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 부모만을 사랑하고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같이 사랑하였다. 그럼으로써 늙은이는 수명을 다하고 젊은이는 재능을 다하고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며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병자들도 모두 편히 부양받게 되었다. 또한 남자는 모두 직분이 있고 여자들은 모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재물을 땅에 버리는 낭비를 싫어하지만 결코 자기만을 위하여 소유하지 않으며, 노동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나 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지 않는다. 이처럼 풍습이 순화되어 간특한 모의가 통하지 않으니 변란이 일어나지 않고, 도둑질과 약탈이 없으니 대문을 닫지 않고 살았다. 이것을 일러 ‘대동’이라 말한다.

이렇듯 《예기》에서는 역사가 대동사회에서 소강사회로 발전했으며, 이에 따라 사회의 지배이념도 대도(大道)에서 예(禮)로 변천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대동사회란 ‘대도’가 행해지는 사회이므로 대도와 예의는 분명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대도란 무엇인가? 원래 묵가(墨家)들이 지향한 이

상사회의 표상은 겸애(兼愛)를 이념으로 하는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공동체적 평등사회였으며, 공자가 지향한 이상사회의 표상은 주(周)나라 문(文)․무(武)․주공(周公)의 예로 다스리는 봉건적 신분사회였다. 그런데 위에서 본 것처럼 소강사회는 봉건예치사회이므로 유가들이 지향하는 사회가 분명하며, 대동사회는 공동체적 평등사회이므로 묵가들이 지향하는 천하무인(天下 無人)의 안생(安生) 사회가 분명하다. 따라서 소강사회의 예는 공자가 말하는 주례(主禮)이며 대동사회의 대도는 묵자가 말한 상동(尙同)과 겸애가 분명하고, 따라서 묵자의 “현명한 자를 선출하였다.”와 관련이 있다.

《예기》이후 이런 뜻을 기록한 사람은 순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진(秦)의 여불위(呂不偉?~BC235)였다. 이때는 대동사상 즉 상동(尙同: 대동을 숭상함)과 겸애(兼愛: 공동체적 사랑)를 주장하는 묵가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던 때다.

당시 3천여 명의 저명한 학자들을 식객으로 거느릴 정도로 가장 큰 금융업자였던 여불위는 유가․묵가․명가․법가들을 모아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대동이란 천지만물이 일신동체라는 뜻이며, 천하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이며, 그리고 군주의 세움은 대중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불위의 사상은 진시황과 충돌하여 급기야 죽임을 당한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서이며, 민본주의적 정치이념을 담고 있는 서경에는 “내가 크게 의심나는 일이 있을적에는 먼저 내 마음에 물어보고 경사(卿士)에게 물어보고 서인(庶人)에게 물어보고 복서(卜筮)에 물어보고 물어서 다 좋다고 하면 이것을 대동이라고 이른다.”라고하였다. 이것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공평무사한 것을 대동이라고 개념지은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대동은 착취의 반대, 재산의 공유, 모든 사람의 노동, 천하의 공기를 목표로 삼는 것 즉 네 가지의 공유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대동이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대동강이 된 대동강에서부터 비롯된다. “여러물이 모여서 흐르므로 대동강이 되었다.”는 대동강 건너에 대동문이 만들어 졌으며, 대동굿은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정월에서 행하던 마을 굿의 하나였다.

중종 실록에는 “옛부터 유사들은 대동접이라는 것이 있어 제술한 글을 가지고 서로 이기려고 하였다.”라는 글이 실려있고, 평양지에 “매식년 5월에서 6월까지 보름간 십여명쯤이 모여 서로 제술한 글을 문답한다.”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대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말 조선에서 대동계를 조직하여 ‘천하위공’의 대동사상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전주의 정여립이었다. 그는 평소에 “인간의 본성은 요․순과 걸․척이 다르지 않으며 시정잡배도 학습을 하면 우 임금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유교의 이단자인 순자를 자주 들먹였다. 심지어 “하늘의 뜻인 인심이 이미 주를 버렸는데 존주(尊周)는 무엇인가?”라고 공언하며 공자의 기본강령인 ‘복례(復禮)’를 거부했고, 육예를 한다는 구실로 무술을 단련하였다.

그 뒤 정여립은 ‘천하는 가문의 것(天下僞家)’이라는 봉건 소강사회의 강령과 대립되는 ‘천하는 공물’이라는 대동사회의 기본강령을 내세우고, 호남 일대를 중심으로 대동계를 조직 이를 전국으로 확대시키던 중에 진안의 죽도에서 의문사하고 만다. 특히 정여립은 “...... 씨 뿌리고 거두지도 않거늘 어째서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며, 사냥도 하지 않고 어떻게 그대의 뜰에 걸려있는 큰 짐승이 보이는가. 저 군자여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나오는 시경에 통달했었다고 한다.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남긴 것

정여립 선생 초상화
정여립 선생 초상화

정여립은 암울했던 조선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대동사상을 기치로 내걸었었다. 그러나 그의 선구적 사상인 ‘천하공물설’과 ‘대동사상’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허균의 변혁사상인 호민론(豪民論:세력 있는 백성)으로 이어졌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민중뿐이다.

민중은 물이나 불 또는 호랑이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다”로 시작되는 호민론은 한 사회와 나라의 여러 모순과 부조리, 부패 세력을 없애려면 반드시 지도자가 있어야 하며 그때 잠자는 민중을 이끌고 나갈 지도자가 바로 호민이라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다시 정조 때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탕무혁명론(湯武革命論)’으로 이어졌다.

“다섯 집이 이웃이 되니 다섯 집에서 대표자를 추대하면 그 다섯 집이 대표자가 되고, 다섯 집씩 모여 마을이 되며, 다섯 마을이 모여 현이 되며, 마을에서 대표자를 추대하면 현의 대표가 함께 추대한 사람이 제후가 되고 제후들이 함께 추대한 사람이 천자가 된다고 하며, 군주를 간접선거로 선출해야 한다”는 탕무혁명론의 취지는 근대적 민주사상과 같은 것으로 이것 역시 민중 사상의 중심이 된 정감록적 변혁사상과 같이 정여립의 정치사상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정여립의 저항의식은 당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민족의식이나 국민의식으로 승화될 만한 것이었다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축옥사 이후 호남지역은 서북지역처럼 차별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현상은 수많은 민란으로 이어져 마침내 근현대사의 출발점인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되었다.

1,000명의 선비들이 죽은 기축옥사

기축옥사는 현실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는 주자학적 통치이념에 대한 반발과 백성을 도외시한 위정자들의 권력투쟁, 그리고 지배계급에 의해 수탈당한 백성의 불만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의해 발발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당쟁에 휩쓸린 사화이기도 했다. 《부계기문》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정철이 젊어서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고 곧은 것으로 이름이 나서 총마어사(騘馬御使, 그가 걸음이 빠른 말을 타고 사헌부로 다니자 사람들은 존경하고 무서워했다)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러나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이 된 후에는 이발의 배척으로 오랫동안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에 머물러 있었다.

기축년 때에 우의정이 되어 옥사를 두드려 만들었다는 비방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위관 정철과 그를 배후 조종한 송익필의 복수심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평가하는 주장도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이이의 죽음 이후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동인 세력을 제거하려던 성혼 등 서인들의 정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천반산 입구 안내 표지판
천반산 입구 안내 표지판

결국 기축옥사는 당쟁의 형세를 돌이킬 수 없는 극한 상황으로 몰아간 역모 사건이었고, 혁명사상의 좌절이었으며, 진보 세력이 몰락하게 된 변수였다.

이 때문에 변란의 불씨가 계속 남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기축옥사로 죽은 사람은 1,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 인구는 500만 명에 불과했다. 1,000명이라는 숫자가 다소 과장되었다 해도 네 번의 사화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기축옥사는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남북한 인구가 7,000만이었던 광주 민중항쟁 당시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을 밑돌고 행방불명자가 200여명이다. 단순한 숫자적 비교일 수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정여립 역모 사건이 조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를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니 신채호는 부정한 승자에 의해 반복되는 역사에 물음표를 던졌다.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의 공통적인 성격인 데도 불구하고 매양 기대한 바와는 달리 승리자가 되지 못하고 실패자가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지금, 우리는 400여 년 동안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기축옥사를 여러 각도로 재조명해 역사 발전의 커다란 흐름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카뮈의 스승으로 빼어난 산문을 남긴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꿈을 꾸게나. 꿈은 공짜라네.”

꿈이 있고서야 실천이 수반되고 실천을 통해 꿈이 완성된다고 볼 때, 꿈은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 그르니에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태어났던 정여립 역시 민중이 주인 되고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었을 뿐 현실은 아니었다.

첫째, 정여립은 왕위의 세습을 부인했다. 중국의 성인인 요, 순, 우가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당대의 현자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왕위가 혈연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이어져야 한다고 정여립은 믿었다.

둘째, 정여립은 충군사상을 부인했다. 임금과 신하가 절대적 충성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직적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군신의 주종관계가 무너짐을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일종의 민중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셋째, 그는 공화주의자였다. 천하가 공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주인이 반드시 군주가 아님을 주장했다. 이는 원시적 형태의 인민주권설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여립은 영국의 크롬웰보다 60년 앞선 공화주의자였다. 세습군주제에도 분명히 좋은 점은 있다.

첫째, 스스로 영속적이란 점을 꼽을 수 있다. 왕이 죽었을 때 대체할 새로운 인물을 찾아낼 필요가 없다. 계승의 규칙에 따라 상속될 뿐이므로 권력 쟁탈전을 피하고 왕위 계승자를 둘러싼 분쟁을 피하는 최선의 형태이다.

둘째, 국가를 유지하는 행위가 통치자의 이익과 직결된다. 국가를 위해 힘쓰는 군주는 곧 자기 자식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므로 조국애와 가족애가 합치한다.

셋째, 수세대 동안 전해 내려온 품위를 지닌 인물을 탄생시킬 수 있다. 보쉬에(Bossuet)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온화해야 하며 군주들은 사랑받도록 훈육된다.”그에 따르면 군주들은 위대하도록 태어났다. 국민은 그들에게 선의를 품고 있으며 국민의 복종을 얻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군주는 최종 결정자이기 때문에 말하기보다는 듣는다. 그는 타인의 능력과 지혜를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보쉬에는 군주에게 따라다니는 오만과 고집의 유혹, 그리고 절대권력이 쉽게 부패하는 경향을 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화를 자초했던 선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여립은 선조에 대항해 무기를 들고 일어나지 못한 채 희생당했다. 그리고 이후 역사의 긴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장자는 묵자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 도는 훌륭하다. 그러나 인정에 위배되어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과 괴리되어 왕도와 거리가 멀다.”

정여립과 기축옥사, 어떻게 보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기축옥사를 날조된 사건으로 보았다. 그리고 정여립의 억울한 죽음을 변호하는 데 역점을 둔 채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여립의 정치사상이나 역모를 준비했던 사실 자체가 모두 부정될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는 역모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정여립의 혁명사상과 그 시대적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대동사상이나 당시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는 그나마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기축옥사를 두고 “조선 왕조는 닫힌 사회의 신분적 계급에서 발생했던 혁신주의 (정여립의 주기 좌파 철학)와 분파주의(정철, 이발) 그리고 고도주의(송익필)를 표방했던, 삼계보의 갈등 문제로 요약된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세습 군주제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했던 사람은 대다수가 실패하고 말았다. 정여립과 전봉준, 김개남 등이 그러했다. 단지 무인이었던 이성계와 문인이었던 정도전의 행복한 결합만이 성공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는 대동사회의 기본강령을 깃발로 내세우고 대동계를 조직했다. 그는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을 혁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정여립은 또한 “하늘의 뜻인 인심이 이미 주를 버렸는데 존주는 무엇인가”라고 말하며 공자의 주례를 거부했다. 그는 이미 유교를 떠난 것이다.

그의 눈에는 퇴계나 율곡과 같은 성리학자들이 하찮게 보였을 것이다. 주례가 지향하는 소강사회를거부하고 겸애의 대동사회를 주장한 것 자체가 혁명적이다. 정여립이 실제로 혁명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는가 하는 역사적 사실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는 유교의 이단자인 순자를 자주 거론하고 천하위가(天下爲家)라는 봉건사상을 거부한 진보적인 사상가였다.

기축옥사는 막을 내리고도 100여 년이 지난 숙종 때까지 수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사화(士禍)인가 옥사(獄事)인가를 놓고 조선의 지식인들이 벌였던 그 많은 설전들이 지금까지도 잠재워지지 않았다.

KBS1 대하드라마 '징비록' 중에서(자료화면)
KBS1 대하드라마 '징비록' 중에서(자료화면)

한편 조광조는 《정암집正菴集》에서 이렇게 말했다. “놓치기 쉬운 것은 시기(時機)요, 기회 역시 놓치기 쉬운 것이다.” 16세기 조선에서는 수많은 천재들이 활동했다. 이 시기는 우리 역사에 새로운 기운을 일으켜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이기도 했다. 임금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고, 갈래갈래 나뉜 선비들 역시 자신들이 속한 당파를 위해 죽음을 불사한 전쟁을 벌였다. 사화인지 역모 사건인지 불분명한 기축옥사와 임진왜란때문에 백성들은 전대미문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정여립이라는 사내를 잊으라고 했고 그는 족보에서도 말끔하게 지워졌다. 그리고 호남 지방은 조선 왕조 내내 반역의 고향으로 낙인찍힌 채 오늘날에 이르렀다. 기축옥사라는 사건 자체가 특정한 지역과 가문,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평가 면에서 기존의 평가들과 충돌될 여지가 많다.

“눈 쌓인 벌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마라.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느니라.”

서산대사의 말이다. 하지만 기축옥사는 무성한 설들을 남겨 놓았다.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

지금까지도 산 자들의 이런저런 말들이 무성하지만 요즘은 정여립의 대동사상을 새롭게 평가하면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영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현대 영국 정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

는 1648년 12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와 국가를 장악하였다. 그 뒤 1949년 1월 30일 영국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왕정을 폐지 한 뒤 공화정을 수립했고, 150년 뒤인 1789년과 1794년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여립을 두고 영국의 혁명가인 올리버 크롬웰보다 60년 앞선 공화주의자이자, 세계 최초로 공화주의를 주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유장한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포효하듯 솟구쳐서 세상의 전면에 부각되는 경우도 있다. ‘정여립의 이름은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알려질 뿐’이라고 갈파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정여립이 죽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기축옥사의 진실이 하나둘 되살아나고 있다.

전주시 인후동에는 정언신의 이름을 딴 ‘정언신로’가 만들어졌고, 전주천에서 전주시청으로 가는 길에 ‘대동길’이 생겼다. 황방산 자락 혁신도시의 길에 ‘정여립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뿐만 아니라 정여립이 살았던 집터에 정여립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고, 기념관 건립도 준비하고 있다.

족보에서도 사라졌던 그 이름, 조선시대 내내 일가뿐만 아니라 그를 조금이나마 알았던 사람들조차 어려워했던 그 이름 정여립.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자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왕조 시대에 정여립은 천인, 아니 만인이 공로할 반역자였다. 하지만 오랜세월이 흐른 지금은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불세출의 혁명가로 평가되고 있다.

대동세상을 꿈꾼 정여립

KBS1 대하드라마 '징비록' 중에서(자료화면)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 송청(宋淸)이라는 약장사가 있었다. 약을 잘 짓기도 했지만, 약값이 없는 사람들에게 차용증만 받고 약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소문이 자자했다. 친분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도 차용증만 받고 약을 지어 주었다. 그런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차용증이 천장에 닿도록 쌓였다. 사람들이 약값을 주지 않아도 그는 약값을 받으러 나서지 않았고 해가 지나면 그 차용증을 불태우고는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장안 사람들은 그를 두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이에 송청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어리석지도 않고, 또 큰 인물도 못되는 사람이다. 겨우 약을 팔아 처자를 먹여 살리는 한낱 장사치에 불과하다. 내가 약장사를 시작한 지 40년, 차용증을 불태워 버린 것이 수천 장에 이른다. 그 가운데는 후에 고관대작으로 출세했거나 관찰사나 절도사가 된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약값 이상의 큰 보답을 하기도 한다. 반면에 약값을 떼어먹고 죽거나 줄행랑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식구들이 밥을 먹고 사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 사소한 약값 때문에 인심을 잃느니, 약값 떼여가면서 인심을 사고 잘된 사람들로부터 후하게 보답 받는 게낫다. 나는 그저 이러한 안목으로 앞을 보는 장사치에 불과하다.

당나라의 명 문장가인 유종원(柳宗元)은 송청의 행적을 기리는 글을 지었다. 아래는 그가 지은 《송청전》의 말미에 실린 글이다. 한낱 장사치도 이렇게 세상을 멀리 내다보는데, 하물며 조정에서 나라를 주무르고, 관가에서 백성을 주무르고, 학교에서 경륜을 주무르는 식자(識者)들이 그저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정여립이 살았던 당대에도 유종원이 한탄한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은 또 어떤 시대인가? 이기주의가 만연한 지금, 정여립이 주창했던 대동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쉽지는 않지만 가능하리라 믿는다. 사랑 안에서 인간 본연의 마음을 지니며 세상을 살아간다면 상생의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참고문헌>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신정일 저, 상상출판(2019). /<사람과 언론> 제6호(2019 가을)


/신정일(대동사상기념사업회 이사장,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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