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21)

당나라 때였다. 한 고승이 있었다. 어느 해 겨울 그는 운수행각 중이었다. 낙양 혜림사에 이르렀다. 그날따라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땔감마저 없었다. 그 스님은 법당으로 가서 목불을 꺼내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깜짝 놀란 원주(院主) 스님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어찌하여 부처님을 태우는가?”

그는 막대기로 재를 헤치며 답했다.

“사리를 얻으려고요.”

원주는 비웃으며 노발대발했다.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다고 그런 미친 짓을 했소. 그건 나무토막이요.”

그러자 그가 대꾸했다.

“그렇다면 왜 나를 꾸짖는가?”

그는 누구인가? 바로 단하(丹霞)라는 스님이었다.

우리는 원주처럼 사는가, 아니면 단하처럼 사는가? 모르면 모르되 거개가 원주처럼 미망 속에 허우적댄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헤맨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탓할 바는 아니다. 그 혼돈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다.

죄 없는 우리 이웃들이야 그렇다 치자. 문제는 우리의 대표라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피폐해진 살림과 각박해진 세상인심 속에서 벗어날까. 이런 우리의 답답함과 고충을 풀어달라고 기대하며 고민 끝에 뽑아놓은 그들이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그들이 더 원주처럼 설쳐댄다.

왜 우리는 대표를 뽑아놓고도 그들에게 뒤통수를 맞아야 하는가. 우리의 팍팍한 삶에 조금이나마 윤기를 돌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그들에게 우리의 대표권을 넘겼던 것 아닌가.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완전 기대난이요 귀뚜리 춘풍 기다리기다. 

어떤 화가가 임금을 위해 그림을 그려 줬다. 그러자 임금이 그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릴 때 무엇이 가장 어려운가? 화가가 답했다. 개나 말 같은 게 어렵습니다. 그럼 무엇이 가장 그리기 쉬운가?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게 가장 쉽습니다. 개나 말은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데다 아침저녁으로 늘 보는 것이어서 그와 똑같이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귀신이나 도깨비는 형체가 없어서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아무렇게나 기묘하게만 그리면 남을 속일 수 있습니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얘기다.

한번 따져보자. 이처럼 속임수로 귀신이나 잘 그리는 화가는 진정한 화가가 아니다. 개나 말도 핍진하게 잘 그릴 줄 알아야 참다운 화가라는 말이다. 어느 중견 화가에게 물었다. 정말 그러냐고. 그 역시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모름지기 화가란 남이 안 그리는 그림을 그려야 참다운 화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지난 여름 장마 때 수해를 당했다.

자기 화실이 몽땅 수해를 입어 망했다고 울부짖었다. 평생 이런 재난은 처음이었다. 그려놓은 그림도, 그리고 있던 그림도 온통 흙탕물에 젖어 뻘흙에 얼룩졌다. 그래도 그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마음을 여몄다. 그리고 붓을 잡았다. 붓을 아예 놔버린다면 자연재난이라는 도깨비에 거꾸러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뽑은 대표들은 그저 태평연월이다. 당면한 현실의 숙제 풀이는 접어둔 채 그저 막연한 비전만 내세우기 좋아한다. 이것은 마치 화가가 귀신 그리기가 쉽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도 않으면서 ‘밥을 먹으면 살 수 있으니까 어서 밥을 먹으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한다.

이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소 먹일 사료값이 없어서 소를 굶겨 죽인 농민더러 동물보호법 위반으로 조사하겠다는 것이 농정당국이다.

불난 집에 부채질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도대체 어느 법이 그다지 철두철미했으며 그 법은 누가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 또 어느 공무원께서 그처럼 사명감이 투철했는지 알 길 없다. 그런 벽창호같은 존재들이 지금 주민의 대표를 자처한다.

모름지기 선량들은 어떻게 해야 밥을 만들 쌀을 구할 수 있고 무슨 수를 써야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 방법을 제시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그 구체적 방법론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일자리를 만들겠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허한 다짐뿐이다.

코로나19가 대유행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온 국민이 고통을 겪으면서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사실상 생계 수단이 끊긴 이들에 대한 지원이 시급하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대표적으로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의 암담한 상황은 그 끝이 언제일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이들이 절망을 딛고 힘겨운 시기를 견딜 수 있도록 모두가 손을 잡아야 한다.

세상에는 숱한 이매망량(魑魅魍魎)들이 득실거린다. 돈 도깨비, 권세 도깨비, 거짓(허위) 도깨비, 폭력 도깨비… 이밖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 헛것들에게 얼을 빼앗기지 않는 이가 드물다. 누구도 이 형체 없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이를 보기가 어렵다. 이들 이매망량에 현혹되기 때문에 우리는 헛된 욕망 속에서 허덕인다.

하여 이 허깨비들에게 홀리지 않고 정신을 차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렇기에 평범한 김씨, 이씨, 박씨다. 하지만 현실이 삭막하다고 그저 비관만 하고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어려운 때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똑바로 추슬러야 한다.

龍雨 龍雨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龍不雨 龍不龍(용이 비를 안 내리면 용이 용인가?)

龍雨 龍龍 (용이 비를 내려야 용이 용이지)

龍雨 龍雨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고운(孤雲) 최치원의 글이다. 唐에 유학 가서 과거에 급제한 그 문장이다. 그 때 唐은 심한 가뭄으로 사회가 혼란했다. 고운이 이 글을 쓰자마자 하늘에서 큰비가 내렸다. 이내 가뭄이 해소되고 풍년이 들었다고 전해온다. 龍, 雨, 不, 단 세 가지 글자를 써서 비를 내리게 했다니 과연 당대 최고의 문장가임이 분명하다.

불현듯 고운의 이 글이 떠오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온 나라에 저마다의 살림살이가 하루빨리 나아져야 한다는 간절함이 넘친다. 심지어 단군 이래 최대 위기라는 우려가 커져 간다. 그만큼 피폐하고 곤궁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최치원의 그 때 당나라보다 몇 백 배 어려우면 어려웠지 결코 태평하지 못한 게 오늘의 현실이다.

나라 안팎으로 코로나로 인한 경제난국에다 곳곳에서 학교폭력 때문에 나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몸을 버리는 악몽같은 현실이 이어진다.

어찌하면 이 어지러운 국면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모두들 고심참담하고 있다. 그런데도 가슴 아픈 현실은 아랑곳없이 나라는 벌써부터 온통 싸움판에 휩쓸려간다.

도대체 정파란 게 뭐길래 이처럼 아수라장인가. 혹시나 하고 기대했다가 역시나 하고 실망하기 한두 번이던가. 그렇다고 현실을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제발 이제는 무지갯빛 환상이라는 허깨비에 결코 넋을 내주지 말자는 얘기다. 지금처럼 가혹한 현실이 다시 ‘살만한 세상’이 되려면 모두가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진정코 단하처럼 얼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거다.

한 가지 덧붙이자. 너도나도 민의의 대변자, 선량을 자처하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그토록 입에 달고 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부디 최치원 선생 같은 지극한 마음을 품어보라. 그리하여 어둠과 혼란을 걷어내 보라. 그야말로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 허덕이는 국민들이 떨쳐 일어나게끔. 

/이강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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