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 양병호(전북대 국문과 교수, 시인)
암시랑토 않다. 니얼 내리갈란다.
내 몸은 나가 더 잘안디,
이거는 병이 아녀.
내리오라는 신호제. 암먼, 신호여.
왜 나가 요새 어깨가 욱씬욱씬 쑤신다고 잘허제?
고거는 말이여, 마늘 눈이 깨어나는 거여.
고놈이 뿌릴 내리고 잪으면 꼭 고로코롬 못된 짓거리를 헌단다.
온 삭신이 저리고 아픈 것은 참깨, 들깨 짓이여.
고놈들이 온몸을 두들김서 돌아댕기는 것이제.
가심이 뭣이 얹힌 것 맹키로 답답헌 것은 무시나 배추가 눌르기 땜시 그려.
웃배가 더부룩허고 속이 쓰린 것은 틀림없이 고추여.
고추라는 놈은 성깔이 쪼깨 사납잖여.
가끔썩 까끌허니 셋바닥이 돋는디 나락이여,
나락이 숨통을 틔우고 잪은게 냅다 문대는 것이제.
등허리가 똑 뿐질러진 것맨치 콕콕 쏘아대는 것은
이놈들이 한테 모여 거름 달라고 보채는 거여.
밍그적거리면 부아를 내고 난리를 피우제.
그려, 내 몸이 곧 밭이랑게.
근디 말여, 나가 여그 있다가 집에 내리가잖냐.
흙냄새만 맡아도 통증이 싹 사라져뿐진다.
신통허제? 약이 따로 필요 없당게.
하이고, 먼 지랄로 여태까장 그 복잡헌 디서 뀌대고 있었다냐 후회막심허지.
인자 내 말 알아들었제?
긍게로 나를 짠하게 생각허덜 말그라.
너그 어매는 땅심으로 사는 사람이여.
나가 땅을 버리면 아매도 내 몸뚱이가 피를 토할 거이다.
그러니 내 말 꼭 명심히야 써.
어매 편히 모시겠다는 말은 당최 꺼내지도 마라.
너그 어매 죽으라는 소린게로. 알겄제?
정우영, 「밭」

명절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자식의 부모에 대한 염려의 정신 꽃피는 축제의 날
엊그제가 설이었지요. 설에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됩니다. 모두들 고향에 계시는 느티나무 같은 부모님에게 달려가느라 지상의 모든 길들은 북새통을 이룹니다. 차례 지낼 북어며 사과며 쇠고기 등의 음식도 좀 마련하고, 부모님 드릴 두툼한 겨울옷도 좀 사고, 흰 봉투에 빳빳한 용돈도 좀 넣고 해서, 어린 손주들 앞세우고 고향으로 향합니다. 부모님을 뵈러가는 싱그럽고 미안스럽고 기쁘고 죄송스런 그 복잡미묘한 마음들을 꾸리고 데불고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고속도로가 밀리고 밀려 차가 거북이걸음을 걷는 것쯤이야 충분히 참을 수 있고말고요. 질박한 소 웃음을 지으며 온돌처럼 기다리고 계실 늙은 부모님을 생각하면 이 날은 모든 것이 용서가 됩니다. 설렘 때문에 온갖 짜증들은 범접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요즈음 서울에 사는 자식들이 많고 또 길이 막히는 관계로다가 역귀성이 늘었다내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여러 자식들이 내려오느라 고생하느니 우리 두 내외가 올라가는 것이 오히려 간편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이 민족 대이동 행로의 상하행 불균형을 바로잡은 것이지요. 그리하여 설 무렵 서울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에는 정갈한 한복을 곱게 입으신 노인네들이 많이 보입니다. 물론 부모님을 기다리는 자식들의 초조한 발자국도 자욱하고요. 그래요. 명절은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자식의 부모님에 대한 염려의 정신이 꽃피는 축제의 날입니다.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자 하는 자식의 마음과 자식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충돌하여 가슴이 찌르르...”
이 시는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자 하는 자식의 마음과 자식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충돌하여 가슴을 찌르르 울리네요. 보나마나 자식은 시골에서 모처럼 올라오신 어머니를 생각하느라고 며칠만 며칠만 더 묵어가시라고 간청하였을 테지요. 또 그 어머니는 자식과 며느리 손주들 불편할까봐 어서 빨리 내려가야겠다고 보챘을 것이고요. 그러면서 어머니는 이 시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이야기를 시골로 내려가야만 한다는 이유와 명분과 필연성으로 제시하였을 거여요. 그러나 지금 어머니는 연로하시어 자식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특히 시골 생활이란 것이 노동력을 겁나게 요구하기 때문에 노년에는 더욱더 휴식과 안정이 필요하지요.
어머니는 시골에서 살아야만 할 이유를 댑니다. 어깨가 욱신욱신 쑤시는 것은 마늘 눈이 깨어날려는 신호여. 온 삭신이 저리는 것은 참깨 들깨가 피어나고픈 투정이여. 가슴과 속이 쓰린 것은 무시 배추 고추가 후딱 뿌리내리고 싶어 앙탈하는 것이여. 등허리가 콕콕 쏘아대는 것은 이들이 어서 빨리 거름 달라고 보채는 것이랑께. 그러고 보니 안 아픈 데가 한 군데도 없네요. 그래요. 온몸이 몽땅 아픈 어머니들이 서울에 오면 별로 할 일이 없지요. 이는 달리 말해 자신의 삶의 존재 이유가 없어지는 것과 매한가지이지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 자신이 돌봐주어야 할 대상이 없어진다는 것은 삶의 역할과 기능이 없어진다는 것과 진배없지요. 그래서 몸은 편할지라도 자식집의 무료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 외롭고 쓸쓸하지만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시골로 돌아가고픈 것이겠지요.
“부모로서의 자식을 보살피는 현역에서 은퇴하기 싫은 건지도...”
자식들이라고 이러한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겠어요. 알면서도 자식 된 도리로 이제는 은퇴하여 오로지 휴식과 보살핌만을 받는 부모가 되기를 바라지요.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의 충돌은 얼마든지 일어나도 좋지요. 그래요. 부모님은 시골 생활의 외로움, 적막함, 쓸쓸함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온갖 푸성귀들을 돌보는 역할로 보상받고 싶은 거여요. 평생 같이 살아온 흙과 땅과의 이별도 물론 생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요.
진짜 중요한 이유는 부모로서의 자식을 보살피는 현역에서 은퇴하기 싫은 건지도 몰라요. 뙤약볕 아래서 가꾼 온갖 푸성귀를 자식들에게 공급하는 부모의 역할을 계속하고픈 것이지요. 부모님의 마음은 자식들에게 하염없이 퍼주고만 싶은 사랑으로 충만하니까요. 그래도 자식들이여. “이제 그만 일하시고 좀 편히 쉬세요. 제가 모실 테니까요.”
이런 마음은 자나 깨나 필수적으로 지참하셔야 한다는 것 빤히 다 아시죠.
/<사람과 언론> 제4호(2019 봄)
/양병호(전북대 국문과 교수,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