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노동브리프-칼럼

<전북의소리>는 노동계의 제반을 조사·연구하며 지역 노동문제를 시의성 있게 발굴하고 의제화하는 계간 <전북노동브리프>와 제휴해 지역 노동계 이슈에 대한 현실 진단과 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글을 고정 게재한다. /편집자 주


1.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할 시간"을 벗어난 무능력한 존재들

조용화 전북노동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조용화 전북노동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광장은 끝났다. 윤석열은 탄핵당했고,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새 정부에 노동 의제를 밀어 넣는 과제가 시급하다. 지방선거가 내년이고, 거시적 차원에서 지역 노동정책이 반영되기 위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런 지금-여기, 왜 지역에서 성소수자 노동을 말하는가? 인구수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고 너무 특수해서 보편적인 노동 의제로 모아내기도 어려운 존재들의 일 경험을 굳이 왜 지방의 작은 노조 부설 연구원이 분석하려 드는가? 노동정책연구원이 집중해 사용해야 할 지면은 지엽적인 부문운동이 아니라 구조와 맞서 싸우는 노동운동의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 목소리들을 향해 쓴다.

작년 12월부터 나는 규범적이지 않은 존재들, 비규범적인 몸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는데 천착했다. 12·3 계엄 이후 열린 광장의 시간은 내게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나는 2016년의 "닭년"과 같은 혐오표현을 사용하지 말라는 목소리를 쫓아내던 박근혜 탄핵광장을 기억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부서지고 갈라진 관계와 운동의 조각들을 기억한다. 그러고도 광장에 나가고 좌절하던 이들을 기억한다. 결국 사라져버린 이들을 기억한다.

나의 두려움은 전 세계적으로 능력주의적 정상성이 발휘하는 힘이 극우 정치와 결합하여 강력해지는 시기에, 자신의 일부가 정상성에 편입되지 못한 채 튕겨 나오는 ‘실패’의 경험을 되풀이한 취약한 삶들이 광장에서마저 환대받지 못하고 실패한 존재로 여겨진 끝에 단절과 반목, 갈등과 혐오, 분리와 배제만이 우리의 언어로 남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반복되던 모습이 이젠 정말 계엄과 전쟁의 모습으로 고정되어버린 세상 속에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있었다. 어찌어찌 윤석열을 쫓아내더라도 다시 다른 윤석열이 나타날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두려움이 광장의 얼굴로 확인되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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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024년의 광장은, 광장에서 허락하는 '몸'이 아닌 이들을 쫓아내던 이전의 광장과는 질적으로 다른 공간이길 바랐다. 내가 이곳에 머무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키고 사라져야 하는 광장이 아니길 바랐다. 이번 광장의 어떤 면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번 광장을 빛의 광장, 응원봉과 깃발의 광장, 말벌의 광장이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청년 여성들과 퀴어들이 튀어나온 모습을 너나 할 것 없이 호명하고 분석했다. 평등수칙이 있었다. 남태령이 있었다.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며 연결되는 몸들이 있었다. 광장의 정치는 이재명 대통령도 표면적으로는 인정해야 하는 공공연한 사실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광장의 정치는 지금 우리 곁에 있는가? 당신들이 호명하던 이들의 목소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얼어붙을 듯 추웠던 겨울, 나의 정체성을, 나의 취약함을, 중심에 있을 수 없는 주변의 이야기를 하며, 계엄의 모습으로 터져 나온 한국 사회의 누적된 구조적 모순을 변화시키는 사회대개혁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평등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며 모아냈던 광장의 목소리가 민주당의 정치적 승리로 환원되고, ‘통합’ 행보를 운운하며 내란정권의 장관을 유임하고,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차별금지법은 고사하고 비동의강간죄와 생활동반자법, 포괄적 성교육 모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모습은 이전의 사회와 질적으로 다른가?

우리는 지금껏 그래왔듯 “나중에”란 이름으로 5년 뒤 또 다른 계엄이 생겨날 가능성을 막아낼 마지막 갈림길을 닫아버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더 정돈된, 어쩌면 좌파의 의제로 여겨지는 것들을 담지한, 그러나 혐오와 배제로 자격 없는 존재들을 지우고 생명관리정치의 측면에서 '살지 못하게 관리할' 이후의 윤석열을 막아낼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서 규범과 정상의 세상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규범적 시간성(Chrononormativity). 푸코는 근대권력의 통치성이 신체와 그것을 둘러싼 시공간을 어떻게 통제하는지를 논의했다. 산업화와 식민주의로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권력은 인구를 표적으로 삼은 공중보건과 생명관리를 통해 개인의 몸을 통치 관리의 영역으로 흡수했다. 자본주의는 시간 체계에 맞춰 일하고 그게 가능한 몸을 재생산하는 노동자를 양산해야 했다.

생산 능력을 지닌 몸은 그러한 리듬 하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구조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우리의 생애 전반을 규율한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지닌 개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능력을 길러 정상적인 삶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는 생애과정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나고 자라 교육받고 대학에 가 이성과 연애하고 직장을 얻고 결혼해 아이를 낳고 기르며 늙어서 죽는 삶. 규범적 시간성-특정한 시간 구조가 정상이 되고, 벗어난 이들은 모두 실패한‧게으른‧미성숙한 존재로 여겨진다. 규범적 시간을 벗어난 이들에겐 미래가 없다. 권력이 약속한 미래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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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은 우리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 놓여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자의적 판단하에 이루어졌다. 정상적이지 않은, 위험한 존재들이 우리 사회에 침투해 국가를 망가뜨리고 있으므로 비상계엄을 선포해야만 한다는 논리였다. 현대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는 그것을 온전히 막아낸 것 같지 않다. 윤석열은 탄핵되었지만, 계엄의 형식을 옹호하며 "법률 차원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법률적 조치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인 예외상태(아감벤, 2009: 14)를 선포하고 싶은 사람들은 넘쳐난다. 12.3 계엄은 아감벤이 말했듯 "예외상태를 통해 정치적 반대자뿐 아니라 어떠한 이유에서건 정치 체제에 통합시킬 수 없는, 모든 범주의 시민들을 육체적으로 말살시킬 수 있는 (합)법적 내전을 수립한 체제"로서 현대의 전체주의를 실천하려는 시도였다. 윤석열이 예외인가?

극우는 실패와 무능력의 에너지를 먹고 자란다. 정상성에 더이상 들어갈 능력도 사다리도 없다고 믿는, 그러나 지금의 세상이 '비정상'이라 느끼는 이들이 예외상태를 통해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말한다. 청년 남성이든 여성이든 정도가 다를 뿐 같은 방향을 쫓는다. 좌절, 체념, 실패의 반복을 부정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 그럼에도 정상성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력, 그러지 못하는 나에 대한 자괴. “정상에서 만나자”며 4B운동을 하는 청년 여성과 노동에 가치는 없고 주식과 코인만이 유일한 ‘상승’의 경로라 여기는 청년 남성은 능력도 없이 이 구조에 끼어들고 자신들의 파이를 빼앗아가는 취약하고 자격 없는 존재들에 대한 혐오로 만난다. 능력주의적 정상성, 규범적 시간성의 당연함 속 균열을 드러내고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행동을 진행하지 않는 한 극우정치의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엄은 반복되고 만다. 우리는 권력이 현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체계를 얼마든지 조롱하고 우회할 힘이 있음을 뼈저리게 목격했다.

그 뼈저림 속에서 나는 사람들과 만났다.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할 시간을 벗어난 무능력한 존재들이 그곳에 있었다. 무언가 할 수 있고, 무언가 하며 살아왔지만, 신자유주의적 생산성과 규범적 시간성의 틀에 맞춰 살아갈 수 없거나 살아가지 않는 몸들이기 때문에 무능력하고 실패했다고 여겨져 온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세상 어느 곳에도 내 자리가 없는듯해 괴로워하던 시간을 건너자 이곳에 만남이 있었다. 탄핵광장에서조차 내가 있어도 될지 고민해야 하는, “그거 동성애 깃발 아니에요?”를 대놓고 묻는 성인 남성들을 마주쳐야 하는, 그 퀴어 활동가 어딨냐며 위협적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을 목격해야 하는, 온갖 의심과 불신과 이상함에 대한 머뭇거림과 밀어냄을 담은 시선과 몸짓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 내 곁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삶의 한 자락과 다른 이들의 삶 한 자락을 매듭지어두는 일이 전주에서도 가능했다.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122일 동안 전주 광장에 무지개와 트랜스플래그를 두르고 나갔다. 내가 여기 있다고, 우리의 자리가 여기 있다고, 당신들이 다시 어딘가로 사라져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숨어 살지 않아도 된다고, 같이 있자고, 규범과 정상이 밀어내는 취약한 몸들일지라도, 제발, 같이 있자고.

그렇게 규범과 정상에 끝없이 갈려 조각난 목소리를 그러모아야 했다.

2. "광장 이후, 전주(전북) 퀴어들의 일과 삶 말하기 글방" 연구 : 규범적 시간성을 강화하는 극우정치의 대항언어로서 비규범적 삶과 노동을 의미화하기

'광장 이후, 전주(전북) 퀴어들의 일과 삶 말하기 글방 연구' 포스터
'광장 이후, 전주(전북) 퀴어들의 일과 삶 말하기 글방 연구' 포스터

퀴어(queer)와 불구(crip)의 시간은 규범적 시간과 다르게 흐른다. 장애학에서 규범적 시간성은 손상과 장애의 차이와 함께 논의되어왔다. 마이클 올리버(2019)는 손상(impairment)을 “사지의 일부분이나 전부가 없는 혹은 사지나 신체 조직이나 구조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장애(disability)를 “당대의 사회조직이 물리적[그리고/또는 인지적/지적] 손상이 있는 사람들을 전혀 혹은 거의 고려하지 않아, 그들을 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약”으로 정의한다. 신체의 한계와 구조의 한계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극복하는 어떤 장애인들의 서사는 “이것 봐, 장애인들도 노력하면 능력있는 존재일 수 있어”라는 말로 소비된다.

그렇지 않은 장애는 무능이다. 퀴어 시간성은 규범적 시간성에서 이탈한 존재들의 시간 경험이란 점에서 불구 시간성과 조응한다. 성소수자는 많은 경우 그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특성 때문에 인구 재생산과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진다.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규범과의 충돌은 퀴어가 규범적 시간에 머무르지 못하게 만든다. 이성애 결혼이 불가능한 퀴어들은 아직 연애를 하고 있지 않거나 미성숙해서 친구와 사는 존재로 여겨진다. 많은 트랜스젠더는 법적 성별과 겉으로 드러나는 성별 표현이 달라 제대로 취직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취약한 노동(성노동을 포함한)으로 내몰려 수천만원의 의료적 트랜지션 비용을 모아야 하며, 수술과 성별정정을 마치면 그 이전의 시간과 ‘단절’한다. 내가 트랜스젠더임을 밝히지 않고 원하는 성별로 살려면 이전의 관계들을 끊어내고 새로운 주민등록번호로 다른 사람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트랜스젠더의 몸은 규범적 시간에서 이탈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몸은 손상된 몸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선 물리적으로도 그렇다.

나는 손상을 선택한 트랜스젠더다.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성적 기능을 영구적으로 불구로 만들 수 있는 트랜지션을 시작했다. 내게 성기는 항상 저주스럽고 자르고 싶은 몸이었을 뿐이다. 가끔 트위터(현 X)에서 TERF(Trans-Exclusive Radical Feminists)들이 나를 공격할 때 “넌 그래봤자 남자야”나 “고자 주제에” 같은 말을 쓰면 그래서 웃음이 터진다. 너희는 성 기능의 온전함이 그렇게나 중요한 삶을 사는구나. 규범적 정상성에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구나. 퀴어 팔루스에 대한 책 모임에서 거세 불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왜 거세를 불안해하지? 난 평생 그걸 바라왔는데. 하지만 손상을 선택하는 이들은 적다. 정상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은 적다.

어떤 트랜스젠더는 과거의 자신을 지운다. 여자로, 남자로 살기 위해, 남자였던, 여자였던 자신의 과거를 말소한다.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나도 그러고 싶었으니까. 다른 이들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감각은 쉬이 익숙해지기 어렵다. 규범적 시간성을 벗어난 삶은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남자로 살았던 시간까지 잘라내고 싶진 않았다. 남자로 살아온 시간 때문에 연결되는 관계가, 장소가, 삶이 있다. 나는 손상을 향해 걷는다. 아픈 몸을 향해 걷는다. 내 몸 위에 손상으로 새긴 기억이 있고, 나는 그것으로 과거-현재-미래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내 몸은 시간의 기록이다.

지난 6월, "광장 이후, 전주(전북) 퀴어들의 일과 삶 말하기 글방"이라는 이름의 연구를 시작했다. 계엄과 광장의 시간 이후로 전주에서 고민해온 일들의 결과이자 조각난 목소리들과 연결을 시도하기 위한 시작이기도 하다. 나는 이곳 글방에서 다른 전주 퀴어들의 몸에 새겨진 시간을 함께 읽는다. 주류의 언어, 기록되고 공식화될 수 있는 글과 말의 형태가 아닌, 실패를 너무나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하는 목소리의 파편들을 함께 모아낸다. 우리의 글방은 완성된 글을 요구하지 않는다. 서로의 관계를 매끄럽게 수행해내길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실패가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세상이 우리를 계엄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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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공식적이고 중심에서 이야기되는 언어만이, 권력을 경유한 언어만이 언어라고 이야기하는 세상이, 당연한 것들을 늘리고 늘리고 또 늘려서 질문하지 못하게 했던 세상이 우리를 투쟁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다른 언어를 시도한다. 이름은 글방이되, 우리의 글은 반드시 문자를 경유하지 않는다. 몸에 새겨진 언어를 그림으로, 지도로, 때론 음악이나 사진으로, 영상으로, 연결과 메모로, 편지와 일기로, 주변의 언어를 그러모아 조각난 언어를 모아낼 방법을 함께 찾는다. 손상의 경험으로 규범적 노동을 빗겨나갈 수밖에 없는 ‘아픈 몸’들을 연결한다.

내 몸이 내 퀴어 시간성의 기록이듯이, 전주에서, 전주 광장에서, 계엄의 시간을 함께한 퀴어들의 몸 또한 그들이 새긴 퀴어 시간성의 기록이다. 그 조각난 시간을 모아 극우정치를 향한 무기로 벼려내려 한다. 나는 이미 각자의 지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극우정치와 싸우기 위해 실패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매번, 어떤 학회와 포럼, 모임, 밥을 먹고, 떠들고, 걷고, 소리치는, 그 어느 공간에서든 우리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목소리,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는 목소리, 무능력한 존재들을 내쫓으라는 목소리에 맞서는 모습들을 본다. 그래서 나도 내 자리에서 그렇게 한다. 나는 전주에 살 것이고, 이곳이 나의 자리다. 동네 퀴어들이 자신의 몸을 너무 많이 잘라내야 해서 사라져버리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싸우는 이들과 연결될 것이다.

편지를 썼다. 글방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한 글이지만, 동시에 정상성과 규범성에서 벗어난, 벗어나려 드는, 안간힘을 쓰는 모든 존재에게 전하고 싶은 편지였다.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사람들은 자신을 파편으로 여긴다. 노동은 가치를 잃는다. 하지만 규범적 시간에서 벗어난 몸은 저항의 가능성을 품는다. 장애여성공감은 20주년 선언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장애의 경험은 성장과 개발이 보편인 시대에 저항할 수 있는 남다른 감각이다.

온전히 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누구나 돌봄에 기대 살아간다는 진실을 몸으로 보여주며, 건강하고 젊은 사람이 아프고 늙은 사람을 돌볼 것이라는 믿음에 도전한다. (…) 나는 누구인가, 누구와 만나 무엇을 향해 갈 것인가? 이질적인 존재들의 마주침과 뒤섞임, 흔들림 속에서 끝없는 질문과 토론이 공감을 가능케한다. 우리는 중심을 향하기보단 사회의 주변부에서 차이를 이해하고 발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각자의 경험에서 서로의 삶과 운동을 배우고, 사회적 차별을 해석하는 힘을 익혔다. 반복되는 사회의 거절과 친구의 죽음, 지켜지지 않는 국가의 약속과 폭력 속에서 역설적으로 공감하는 힘과 맞서 싸우는 연대를 터득했다." 나는 여기서 출발한다. 나의 몸에서 출발한 고민을 확장하여, 지방도시 전주에서 계엄의 시간을 겪어낸 몸들의 조각난 목소리를 모아, 이곳에서 각자의 파편들로 연결되길 바란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실패하며 저항할 것이다.

▶ 전주 퀴어 글방에서, 기꺼이 조각난 시간 속 나를 나눠주시는 여러분께 쓰는 감사의 편지.

나답게 산다는 건 뭘까요. 내가 나의 자리에 머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계엄이 벌어지고 탄핵 선고가 나기까지 122일 동안 여러분은 이곳에서 먹고, 말하고, 걷고, 때로는 가만히 있다가, 일하고, 살아왔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그 시간을 통과해왔습니다. 각자에게 길었을, 또는 짧았을, 아니면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122일은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시간이 없다면 지금 글방에서 우리와 만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4주차에 그린 <몸 지도>는 우리가 1주부터 3주까지 함께 한 활동들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5주차에는 계엄의 시간 속 나의 <몸 지도>를 그립니다. 그 시간은 이곳에서 퀴어로 '일'하고 '살아'온 여러분의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어쩌면 살아내는 것도 일이겠죠. 그게 너무 당연해서 숨쉬기처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도, 매일 같이 일의 모습을 세세히 살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우리는 그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그려봅니다. 대선이 끝났고, 벌써 어떤 이들에겐 과거가 되어가는 시간을 꺼내어 각자의 방식으로 모아봅니다.

네. 어쩌면 우리에겐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시간이, 누군가에겐 먼 과거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버릴 수 없는 공간이, 누군가에겐 하찮아 치워야 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시간은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마냥 앞으로 흐르기만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럴 것을 요구합니다. 나고 교육받고 대학에 가서 이성과 연애하고 취직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늙어가는 시간에서 벗어나지 말기를 요구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어떤 몸은, 마음은, 쉴 새 없이 '정상성'과 부딪치며 삐걱거립니다.

다나 루치아노라는 작가는 <슬픔의 정리: 19세기 미국에서의 신성한 시간과 몸>이란 책에서 슬퍼하는 시간이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시간과 어떻게 다른지 말했습니다. 슬픔은 생산적이지 않고, 멈춰서 반복하며, 전진하기보단 생각하게 만든다고요. 장애여성공감은 20주년 선언문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답게 살 수 없는 시대다. 세상의 속도와 가치에 맞추어 능력과 상품성을 갖추는 자기계발이 미덕인 시대에 차이는 단지 무능이 된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타인의 삶에 다가가기에 관계는 삭막해졌다. 서로에게 기대는 관계는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비난을 듣기 쉽다. 아프고 장애가 있는 몸들은 의존적이고 폐를 끼치는 사람으로 구분되어 골방이나 시설에 가둬졌다." 그래요. 우리는 정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나의 몸을 잘라내고 숨겨야 한다는 목소리를 매일 같이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저는 서로의 존재를 믿어요.

트랜스젠더인 제가 어쩌면 평생 이상하게 여겨져야 할지도 모른단 사실을 두고 괴로워하다 새벽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그 시간에 깨어 있던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전 새벽이 퀴어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밤과 낮의 경계가 흐릿해진, "깨어 있는 일상세계와 동기화되지 않은" 시간. 무기력하고 실패했거나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시간과, 그 사이를 통과하는 몸이 이곳 전주에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9시부터 6시까지 일할 수 없는 몸, 새벽에 고통스럽게 바깥을 바라보는 몸,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도착할 수 없는 몸, 때때로 숨을 쉬는 걸 잊는 몸, 어떤 시간과 장소를 지날 때마다 약을 먹어야 하는 몸, 이성애와 시스젠더가 당연한 세상에서 당연하지 않은 몸으로, 이곳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새벽의 고민이 저를 여러분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때로 목소리로 여겨지지 않는 이야기의 조각을, 우리가 사는 곳에서 모아내고 싶단 마음으로 시작한 글방도 절반을 지났습니다.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여러분이 언어가 되지 않는 말을 품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몸에 새겼기 때문입니다. 무지개 옆에 조심스럽게 다가가거나 그러지 못했던 기억을 간직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닐 수도 있는 분홍색과 하늘색과 하얀색의 조합을 보면 사진을 찍어 제게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조각난 이야기를 조각난 채로 모아보겠다는 이상한 공간에 기꺼이 함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공간에서 실패하는 경험이 두렵지 않을 리 없습니다. 여기서도 나의 어떤 부분이 이해될 수 없고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게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글방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에게요.

장애여성공감의 선언문 이야기로 편지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그러나 장애의 경험은 성장과 개발이 보편인 시대에 저항할 수 있는 남다른 감각이다. 온전히 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누구나 돌봄에 기대 살아간다는 진실을 몸으로 보여주며, 건강하고 젊은 사람이 아프고 늙은 사람을 돌볼 것이라는 믿음에 도전한다. (…) 나는 누구인가, 누구와 만나 무엇을 향해 갈 것인가? 이질적인 존재들의 마주침과 뒤섞임, 흔들림 속에서 끝없는 질문과 토론이 공감을 가능케한다. 우리는 중심을 향하기보단 사회의 주변부에서 차이를 이해하고 발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각자의 경험에서 서로의 삶과 운동을 배우고, 사회적 차별을 해석하는 힘을 익혔다. 반복되는 사회의 거절과 친구의 죽음, 지켜지지 않는 국가의 약속과 폭력 속에서 역설적으로 공감하는 힘과 맞서 싸우는 연대를 터득했다."

끝없이 다른 것들을 삼킬 능력을 요구하는 세상이 우리를 취약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실패를, 웃음을, 이상함을, 건네며 살아가는 방법을 연습해도 괜찮은 자리를 만들어나가길 바랍니다. 장애가 있는 몸이든 아니든, 아픈 몸이든 아니든, 무능력한 몸이든 아니든, 우리가 이곳에서 서로와 연결되며 살길 바랍니다. 조각난 시간과 일상 속에서 서로의 삶과 마주치며 매듭을 남겨두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참고문헌

-올리버, 마이클. (2019). 장애화의 정치. (윤삼호 옮김). 노들장애학궁리소. (원본 출판 1990)

-장애여성공감. (2018). 장애여성공감 20주년 선언문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https://wde.or.kr/2-웹소식지-기획-장애여성공감-20주년-선언문/

-아감벤, 조르조. (2009). 예외상태. (김항 옮김). 새물결. (원본 출판 2003)

-Harvey, David. (2000). Spaces of Hop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Luciano, Dana. (2009). Arranging Grief: Sacred Time and the Body in Nineteenth-Century America.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조용화(전북노동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조용화 전북노동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무능력한, 위험한, 뒤떨어진 존재를 제거하려는 세상에서 규범을 위반하는 이상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연결되길 바라는, 그리고 머뭇거리고 느린 몸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지방의 퀴어, 연구노동자이다.


※위 글은 <전북노동브리프> '2025년 여름호'에도 게재됐으며 <전북의소리> 보도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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