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언론 제4호(2019 봄) 권두언

정치에서 도저히 만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시간’이다. 흘러간 시간은 무엇으로도 만회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쓴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촛불정부 임기가 어느덧 2년이 지났다. 이제 3년차에 돌입하는 촛불정부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기대가 더욱 큰 이유는 바로 지체할 수 없는 시간 때문일 것이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험하지만 남은 3년의 임기동안 해내지 않으면 안 될, 가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로드맵이 산적해 있다.
촛불의 준엄한 요구를 받들어 탄생한 촛불정부이기 때문이다. 촛불국민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되고 국민의 주권이 보장되며 차별이나 불안이 없이 함께 잘 사는 상생의 나라, 나라다운 나라, 대한민국을 열망했다. 그러한 열망에 부응해 촛불정부는 출범 초기만 해도 여러 부문에서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에 이어 올해 들어서도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 ‘화해와 평화공존’으로 나갈 것이란 메시지를 전 세계에 던지며 남북 화해무드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적폐청산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사회 전반의 기득권 구조를 타파하고, 민주적이고 공정하고 효율적인 새로운 시스템을 제도화하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지만 녹록치 않다. 정치상황은 여전히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이로 인해 공수처법, 검경수사권 조정법 등 사법농단 재발 방지와 적폐청산을 위한 사법개혁이 진척을 이루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5·18 정신을 헌법에 규정하겠다고 했던 개헌을 비롯해 선거제도 개혁, 재벌개혁, 검찰·경찰·국정원 등 권력기관 개혁, 교육개혁 등도 광폭 행보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촛불의 승리’에서 국민들은 희망을 찾았다. 하지만 이 승리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얼마나 오작동해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많은 국민이 수개월 동안 일상을 접어놓고 광장으로, 거리로 나와야 했던 것은 결국 ‘정치 부재’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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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절실한 기대와 요구인 적폐청산의 과제를 안고 출발한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이 실로 황금 같은 임기를 ‘방해공작’이라는 핑계로 허송한다면 ‘정치 부재’의 시간은 다시 ‘진행형’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위안부 협정 처리 등 과거사 바로세우기가 여전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현재 진행형’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도, 사법농단 세력의 골 깊은 뿌리가 사법개혁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도, 갑질현상이 사회 도처에 만연해 있는 것도, 무도하고 불의한 과거·적폐청산이 왜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방해공작’이라는 핑계로 허송한다면 시간은 ‘진행형’에 갇혀 있을 수밖에
아무리 훌륭한 가치와 좋은 취지의 제도도 금세 본말이 전도되고 마는 사회에선 어두운 과거청산이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 기회주의와 이중성의 적폐세력들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한 적폐, 무도한 과거청산은 반드시 건너야 할 ‘민주의 강’과 같은 것이다. 주저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정의와 진실이 왜곡된 시간 속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는 그리 멀지 않은 역사가 일러준 교훈이다.
그래서 촛불정부 3년차인 계해년(癸亥年)을 맞아 촛불국민들은 더욱 정의롭고, 더욱 진실하고, 더욱 민주적인 사회가 되길 간절히 빌고 있다. 특히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해이기에 그러한 소망들이 더욱 절실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한편으론 역대 정권들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집권 3년차라는 점에서 우려도 흘러나온다. 역대 정권들이 예외 없이 집권 3년차 징크스를 겪었다. 유독 집권 3년차에 측근 비리, 여권 내부 권력 다툼, 기강해이 사건 등이 봇물 터지듯 불거져 레임덕을 앞당긴 탓이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 3년차 징크스를 잘 극복할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이유다.
과거를 복기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3년차 징크스는 이어져왔다. 가장 가까운 박근혜 정부 때는 집권 3년차(2015년)에 ‘정윤회 문건’ 파동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이후 성완종 리스트, 최순실 사태 등이 이어지며 몰락했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3년차인 2010년 민간인 사찰, 세종시 수정안 부결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3년차인 2005년 ‘오일 게이트’ ‘김재록 게이트’ ‘행담도 의혹’이 잇달아 터져 치명상을 입었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3년차에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지만 그해 치러진 총선에서 패했다. 이후 진승현 게이트 등 권력형 비리가 연이어 터지며 레임덕이 시작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3년차인 1995년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지지율이 폭락했다. 이후 차남 김현철 씨 비리와 IMF사태까지 맞으면서 최악의 국면을 맞았다.
오죽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007년 대통령 단임제 하나만 고치는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던 이유도 3년차 징크스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고 봤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개헌을 제안하면서 “임기 3년이 지나면 레임덕이 온다”면서 이를 ‘임기 3년 차의 저주’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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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3년차를 맞이한 문재인 정부도 연초부터 파열음이 끊이질 않아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청와대 김태우 전 특별감찰반원과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잇따른 폭로가 정국을 흔든데 이어, 손혜원 의원의 목포 부동산 투기 의혹과 서영교 의원의 재판청탁 의혹 등 두 여당 의원의 파문이 연초부터 이슈를 삼키며 불안감을 키웠다.
급기야 이른바 ‘드루킹’ 사건으로 기소된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1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면서 3년차 징크스의 우려가 현실화되는 게 아니냐는 불안과 걱정은 더욱 고조된 형국이다. 촛불정권을 향해 국정농단 세력이 특검과 대선불복 등을 무기로 반격을 가하는 형세가 됐다. 사법농단을 바로잡고 ‘적폐판사’를 청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 앞에서 촛불정권이 되레 쫓기는 신세가 됐으니 적폐청산은 멀고도 험하기만 하다. 문재인 정부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갑질현상, 단지 윤리적 문제 아닌 사회 전반의 제왕적 지배문화로 정착·확대
그러는 사이에 우리 사회에 만연된 갑질현상은 더욱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있다. 설상가상이다.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행하는 부당한 요구, 불의한 행위를 통칭하는 갑질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갑질현상’으로 어느 조직에서나 똬리를 틀고 있는 앵태다. 이미 언론에서 많이 보도되었듯이 항공기 내에서, 백화점이나 편의점에서, 사무실 등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현상뿐 아니라 학교와 국회 등 어디서든 공공연하게 갑질을 벌이는 예가 다반사가 됐다.
그러나 이러한 갑질현상은 단지 윤리적인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의 제왕적 지배문화로 정착되고 또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 갑질현상의 구체적인 원인은 무엇이고 실제로 어떤 현상들이 펼쳐지고 있는지, 계급 불평등의 실상과 그 대안은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공론화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시점이다.
그동안 숱한 문제제기만 있어 왔을 뿐, 실질적인 개선은 미미한 채 그저 바라만 보는 현상이 되어온 갑질은 지역사회는 물론 전 사회적인 적폐현상으로 무섭게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한 ‘갑질현상’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과 실체적 대응방안이 방관자적인 무관심에 묻힌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약자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촛불시민혁명으로 일군 정권교체 이후 우리는 많은 변화 속에 2년을 하루가 다르게 살아왔지만 아쉽게도 촛불의 가장 큰 화두였던 적폐청산이 각 분야에서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갑질은 결코 많은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저지르는 게 아니다. 그건 상대적이거니와 다단계 먹이사슬 구조로 되어 있어 전 국민의 머리와 가슴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삶의 기본 양식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는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현상’은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의 내면적인 삶의 기본 양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할 정도다. 강 교수는 그가 쓴 책 <개천에서 용나면 안 된다(인물과 사상)>에서 “갑질은 우리가 옳거니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들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의해 생겨난다”며 “이게 바로 ‘갑질 공화국’의 비밀”이라고 꼬집었다. 어두운 적폐와 무관하지 않다. 적폐청산이 첩첩산중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 갑질현상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를 동시에 가늠케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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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사람과 언론> 봄호(통권 4호)는 ‘제왕적 지배문화와 갑질현상’을 특집 주제로 정하고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며 지배문화로 자리해 온 갑질현상의 실체와 이로 인한 부작용, 개선방향을 짚어보았다. 아울러 ‘촛불정부 3년차, 성찰과 남은 과제’란 특별 기획을 통해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 출범 3주년을 맞는 한국사회는 왜 여전히 소요하기 그지없는지, 적폐청산을 위해 숨 가쁘게 펼쳐온 개혁정책의 결과는 무엇인지, 밝고 투명한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대안을 담았다.
우선 특집 주제인 ‘제왕적 지배문화와 갑질현상’을 예리하게 진단하고 대안을 들려 줄 수 있는 전문가로 ‘직장갑질119’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최혜인 노무사를 섭외했다. 바쁜 중에도 긴 기획의도를 서면으로 받아 본 그는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최 노무사는 사전 제시한 10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꼼꼼하게, 매우 정성스럽게 정리해 보내왔다.
직장갑질119 최혜인 노무사·시간강사 20년 임건태 박사, “적폐 중 적폐, 갑질”
최 노무사는 “대한민국에 있는 100개의 회사 중 35개에서 불법과 괴롭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조사를 통해 알아냈다”며 “직장갑질이라는 게 성격이 이상한 사장 때문이거나 인간관계 불협화음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현상은 아니라 이미 한국 사회에 넓게 퍼져있어 걷어내기 어려운 곰팡이가 되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소회를 밝혔다.
‘직장갑질119’가 출범한 2017년 11월 1일 이후 지금까지 약 7,000여 개의 이메일 상담이 접수됐다. 실시간으로 운영되는 오픈 채팅방 상담은 건수를 집계할 수 없지만, 오전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0시간 동안 쉼 없이 상담을 요청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최 노무사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의 보완을 대안책으로 제시해 눈길을 끈다.
그는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고용노동부가 매뉴얼을 발행한다고 하는데, 다양한 갑질 사례가 직장 내 괴롭힘 행위로 포섭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괴롭힘 사실을 사용자에게 신고했음에도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행정기관이 개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뒤 “근로기준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조문이 5인 미만 사업장에도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노무사는 또한 “갑질을 당하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갑질을 당했더라도 참고 버텨서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헤쳐 나갔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밖에 이번 봄호 특집 중 갑질현상이 고질화된 상아탑 내부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며 직접 경험해 온 현직 시간강사인 임건태 박사를 통해 20년 넘게 강사생활을 하면서 체험한 대학사회의 지독한 갑질현상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가 밝힌 대학의 갑질현상은 세 가지 형태로 행해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최근 세상에 알려진 ‘인분 교수’처럼 교수와 대학원생 간의 관계에서 갑질현상이 만연해 있고, 다음으로는 .교직원과 학생들 간에 벌어지는 갑질, 마지막으로는 대학 당국의 강사에 대한 갑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강사들에 대한 대학의 갑질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를 그는 두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강사들은 지금까지 거의 해촉 통보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10번 해촉되면, 그 중 겨우 두세 번 정도만 학과 조교로부터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다음 학기 강의가 배정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일방적으로 전해들을 뿐이다. 대부분은 강의를 담당하던 학교로부터 아예 그 어떤 통보도 받지 못한 채, 연락이 없으면 그냥 잘린 줄 알게 된다. 대한민국의 그 어떤 노동 현장에서도 이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외에도 대학이 강사들에게 행하는 대표적 갑질현상은 강사들에게 매학기 동일한 서류를 반복해서 제출하라는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신분이나 학위의 변동이 있으면 당연히 서류를 제출해야 하지만 전혀 그럴 여지가 없는 사항, 이를테면 주민등록 초본, 통장사본 등에 대해서도 서류 제출을 계속해서 요구한다는 것은 “강사들을 무시하고, 행정 편의를 위한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는 처사에 다름 아니다”고 증언했다.
“이런 불합리한 사태에 대해 학교 행정을 책임지는 소위 높은 분에게 항의를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반복되는 서류 제출 요구뿐이었다”는 주장에서 강사들에 대한 대학의 전형적인 갑질현상이 어느 정도인지 읽히고도 남는다. 그는 제도적 장치 외에도 공론장 등 자유롭게 신고하고 고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했다.
손석춘 교수, “자본의 갑질과 갑질의 언론은 동전의 앞뒷면”
언론 전문가로는 손석춘 건국대 교수가 ‘자본의 갑질, 갑질의 언론’이란 기고를 통해 언론사 내부의 갑질현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주었다. 손 교수는 “대한민국 1등 신문인 <조선일보> 자본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민주노총을 마녀사냥하며 갑질을 벌이고, 자기 집 어린 딸을 수행하는 운전기사 노동인에게도 갑질을 해온 셈이다”며 “자본의 갑질과 갑질의 언론은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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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촛불정부 3년차를 맞는 중차대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깨어 있는 시민과 언론, 학계와 시민사회단체가 나아갈 방향을 듣기 위해 촛불집회 때마다 시민들을 이끌었던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이번 봄호의 특별기획 ‘촛불정부 3년차, 성찰과 남은 과제들’에 관해서는 촛불집회 현장에서 늘 빠지지 않고 사회를 보며 촛불문화제로 승화시켜준 장본인이자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시민위원장을 역임했던 안진걸 전 위원장을 섭외했다. 지금은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시민사회단체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면서, 우리 사회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넘어 이제는 서민의,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진걸 소장, “서민의,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민주주의 실현해야”
안 소장은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위험 대응 국민 촛불집회 당시 야간 집회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구속됐고, 2016·2017년 촛불 시민혁명 때는 퇴진행동 대변인으로 일했다. 그러는 동안 검경에 스무 번 넘게 소환되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열 건 넘는 기소와 민사소송, 고발을 당하기도 한 그가 바라본 촛불정부의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더 좋은 민주주의, 더욱 인간적이고 따뜻하고 공정한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것이 평생의 꿈이라는 안 소장은 촛불정부에 바라는 글을 기고의 형태로 보내왔다. 그는 특히 “촛불시민혁명,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며 “공공부문의 원칙과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로 세우는 개혁(검찰개혁·사법개혁·언론개혁·공직사회개혁 등)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며, 경제의 민중화, 경제적 민주주의가 매우 절실하다”고 촛불정부 3년차 과제를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민주주의·민생·평화 파괴와 후퇴에 맞서 혼신의 힘을 다해 대응한 그는 부당하고 황당한 정권에 맞서 크고 작은 집회·시위를 기획하고 참여하는 와중에도 줄곧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에도 집중해 이제는 직접 민생경제연구소를 진두지휘하며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 이번호에서는 특별한 화제인물을 소개했다. 100년 전북지역 언론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펴낸 <전북언론사> 저자인 최동성 언론학 박사와 나눈 인터뷰는 ‘지역 언론은 죽지 않고 만들어 진다’는 새로운 명제를 던져주었다. 책을 완성시키기까지 철저한 학술적 고증과 전·현직 언론인들의 진술, 그리고 디지털 자료와 종이신문을 일일이 열람하는 방법으로 사료를 채집하고 사실(史實)을 정리하는 작업을 거치느라 3년여의 시간을 도서관에 지낸 최 박사의 출간 소회와 지역 언론의 감춰져 온 역사는 가슴에 와 닿는 대목들이 너무 많다.
한편 이번호에서 새롭게 선보이게 될 ‘기억 속으로 여행’을 통해 신혜경 전주정신의 숲 추진단 팀장이 수십 년, 수백 년 지난 사진과 기록물들을 정리해 주었다. ‘기억한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산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입증해 주었다. 시민들의 기억을 소환하여 고이 정리·보관하는 일터에서 저자는 도시, 사람, 시간, 문화의 범주 안에서 100년 전 쓴 선친의 일기부터 오랜 시간 간직해온 가족 사진첩, 손때 묻은 생활용품, 40년간 모은 월급봉투, 학창시절 졸업앨범과 교과서까지 지금은 우리 곁에서 사라진 기록물들을 소개하고 추억을 회상시켜 주었다.
이밖에 이슈 분석에서는 두 가지 쟁점을 소개했다. 첫째 ‘기자들은 누구에게 가장 많은 소송을 당하는가?’란 쟁점 논의에선 국내 언론사 기자들의 소송 사례와 명예훼손에 관한 외국의 처벌 및 규제를 심층적으로 다뤘다. 둘째 ‘페미니즘 관련 보도, 미디어는 과연 공정한가?’란 쟁점에선 여러 사례와 전문가 의견을 통해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했다.
또한 ‘갑질’을 주제로 한 논문 큐레이션과 돋보인 기사들을 모은 ‘뉴스 큐레이션’, 급변하는 ‘언론 풍향계’, 학교와 관련된 지명 이야기, 교육과 입시에 관한 전문가 조언들도 빠지지 않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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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주주의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혹은 군부통치와 같은 노골적인 형태의 독재는 전 세계적으로 점차 종적을 감추고 있다. 최근에는 군사 쿠데타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폭력적인 권력 장악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국가가 정기적으로 선거를 치른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다른 형태로 죽어간다. 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 붕괴는 대부분 군인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뤄졌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물론 조지아, 헝가리, 니카라과, 페루, 필리핀, 폴란드, 러시아, 스리랑카, 터키, 우크라이나에서도 선거로 추대된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랫(Daniel Ziblatt)이 함께 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저자들은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 붕괴한다”고 무수히 증언했다. 그것도 책 서문 ‘모든 민주국가에 던지는 경고’에서 던진 화두라는 점에서 더욱 섬뜩하다.
촛불민심과 반대 노선 굳건히 지키고 있는 정치권, 선거공학 때문
한국 사회는 전대미문의 평화적인 시민봉기인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정권을 교체했다. 국정농단의 주범인 대통령을 국민의 압도적 동의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런 압도적 동의의 구심점이었던 ‘적폐청산’의 과제는 합의제·대의기관인 국회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탄생한 촛불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얼마나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지 마음을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촛불민심과 반대 노선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은 선거공학 때문이다. 몇 달에 걸친 평화적 항의를 통해 최고 권력자를 퇴진시킨 우리나라의 국민역량은 온 세계가 부러워할 높은 수준이지만, 선거 때문에 정치인들이 해괴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면 이 또한 심각한 민주주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차분히 2년을 복기하면서 개혁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3년 안에 해야 할 과제들을 정밀히 정리하며 추진해야 할 시점이다.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위한 여정부터 난제 중의 난제인 경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담대할 정도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정권의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고 애써 부정할수록 더욱 심화된다. 위기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라”는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차제에 창간 1년을 곧 눈앞에 둔 <사람과 언론>은 찬찬히 살피며 느리게 걷되, 더욱 눈을 부릅뜨고, 귀를 곤두세우며 진실과 정의의 길을 향해 지체 없이 나갈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되고 국민의 주권이 보장되는 나라, 차별이나 불안이 없는 나라다운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더욱 진실하고, 더욱 평화롭고, 더욱 민주적인 길을 향해 걷는 장행(壯行)에 모두 함께 동참해 주시리라 믿는다.
/박주현. <사람과 언론> 제4호(2019 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