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제주 기행기'(2)

#1. 

파도 소리 바람 소리가 들려옵니다. 가까운 곳에는 성산포 제당도 있지요. 음력 정월달 정(丁) 자가 들어간 날을 선택해서 용왕님에게 제사를 드린답니다. 지금도 그런 풍습이 이어지고 있대요. 제단 주변에는 금줄이 드리워 있어서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어쨌든 말이죠. 조선 후기부터는 성산 마을의 수호신인 용왕님께 올리는 제사도 유교식으로 바꾸었답니다.

아마 숙종 때 이형상 제주목사가 '신당 300, 불당 300'을 다 불태워 없애고 나서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형상 목사의 활약은 제주도 주민에게 깊은 문화적 트라우마가 되었어요. 지금 남아 있는 서사 무가에도 이형상의 이미지가 악인으로 그려져 있거든요.

물론 이형상 목사 자신은 다른 생각을 했어요. 그의 문집인 <<병와집>>에 보면요, 제주 목사로서 미개한 제주도를 문화적으로 개량한 공적을 일일이 나열해놓고 있답니다. 도대체 문화란 그리고 문명화란 무엇인가요. <<조선, 아내 열전>>에서도 바로 그 문명화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만, 어려운 이야기지요.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멈추고, 조금 따져볼 점이 두 가지 있는 것 같아요. 우선 불당과 신당에 관해서죠. 제주도에 신당이 300이나 되었다는 말은 좀 이해가 되지만요. 그러나 17세기 제주에 암자 또는 불당이 300이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를 것 같아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제주에는 불교의 세력이 매우 약했으니까요.

또 한 가지 문제는요. 유교 식으로 용왕님께 제사를 올리는 것이, 뭐 그리 의미 있는 변화인가라는 질문이겠어요.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용왕님의 자리가 여전하였는데요. 굳이 그 제사를 "심방(제주에서 무당을 높이 일컫는 말)"의 손에서 빼앗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어차피 다른 마을에서는 아직도 심방이 마을 제사를 주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성산에는 제주 양반들의 힘이 다른 곳보다 셌던가 봅니다. 그들이 심방을 몰아내고 스스로 제관의 자리를 차지한 셈이었으니까요. 성산에는 강한 양반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지금은 이곳에 일출봉 덕분에 관광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져요. 하지만 200-300년 전에는 관광자원은 없었어요. 그러나 제주도 어느 지역보다 활발한 어로 사업이 있었을까요. 지금도 해녀(본래 우리나라에서는 '潛女'라고 했다지요)의 물질이 활발한 곳입니다.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산에는 돈 많은 제주 양반이 좀 많았던가 봅니다. 그래서 유자(儒者)로 행세하며 신당을 심방에게서 빼앗아 자신들의 전유물로 삼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산 일출봉 해안가를 거닐며 잠시 그 옛날의 풍경을 떠올려봅니다. 인간 세상의 일은 이처럼 무상하지만요, 파도소리 바람소리야 백년 전이나 오백년 전이나 지금과 다를 게 무엇이겠어요. 

#2.

해가 뜰 때까지 제법 오래 기다렸어요. 저만 아니고 많은 분이 함께 기다렸어요.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모르지만요, 제 마음으로 미루어 다른 분들의 속생각도 짐작은 해요.

어둠을 이기고 해맑은 하루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거지요. 이 아침에 신선한 바다 내음을 맡으며 다짐을 하는 거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잘 해보겠다고요. 우리가 이긴다는 보장 같은 것은 없어도, 새날이 밝았으니 세상이 깨끗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 착한 사람이 잘되는 그런 세상을 원하는 깨끗한 마음인 거죠.

빨간 해가 수평선 너머로 둥두렷 떠올랐어요. 그런 광경을 지켜본 것만으로도 오늘 아침에는 무언가를 크게 이룬 것처럼 제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서로의 이름도 모르며 함께 해바라기를 한 여러분들도 아마 똑같은 심정이겠지요.

제20대 대선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성산 일출을 고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잡귀를 부려 세상 권세를 움켜쥐려는 사람들 말고, 이 세상에 한 줌의 빛을 더해주는 편이 꼭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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