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8)

“피런허고 버스값 천원 애낄라고 안 갈아탄당께.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되는디 뭘. ”

어느 날 버스 속에서 배추 몇 포기, 쪽파 몇 단, 총각무 몇 단을 손수레에 싣고 장에 내다팔기 위해 나서던 늙수그레한 노파의 말이다.

여기서 ‘피런허고’는 ‘폐일언(蔽一言)하다’의 사투리이다. 글자 그대로 ‘한 마디 말로 휩싸거나 뭉뚱그려 말함’을 뜻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거나, 모든 잡다한 내용을 싸잡아 제쳐두고 강조하고자 하는 말을 할 때 흔히 사용된다.

자주 사용하는 이 말이 고전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사람은 안다. 바로 논어(論語)의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말이다. 논어에 “시경(詩經) 삼백편의 시를 한 마디 말로 뭉뚱그려 말하면 (지은이의) 생각에 사악(邪惡)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라고 했다.

여기에 서 왔기 때문인지 아직도 글 깨나 읽은 이들은 ‘폐일언하고’ 보다는 ‘일언이폐지하고’를 즐겨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굳이 행세하려 해서라기보다는 내막을 아는 사람들 특유의 밝혀 드러내기 습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폐일언하고 ‘피런허고’는 어느새 우리 몸 깊숙이 녹아든 정겨운 우리 지역말이 돼 있다. 물론 버스 속 그 노파가 논어를 읽고 그 어원까지 알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피런허고’는 매우 친숙하게 들렸다. 우리 전라도 사투리 가운데 그만큼 정감 가는 말도 흔치 않다.

방언이나 사투리가 부끄러운 말이 아닌데도 굳이 배척해야 하고 말살해야하는 것처럼 여기는 풍토는 문제다. 일언이폐지가 입에 익은 사람은 그렇게, 피런허고가 익숙한 사람은 또 그렇게 쓰면 그만이다. 그것은 말을 쓰는 사람의 의지요, 자유다.  

/ 이강록 <사람과 언론>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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