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이야기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의 지지리와 지지계곡은 전북과 경남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서쪽에 있는 약 10km 길이의 계곡이다. 이곳에는 보통 커다란 장애물로 생각되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이름이 똑같은 두 개의 중재마을이 있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한말 의병 그리고 6.25 사변 등의 최근 역사와 관련이 있는 흥미로운 지역이다.

지지리(知止里)와 지지계곡

번암면은 전라북도 장수군의 1읍 6면 중의 하나이다. 번암면은 원래 남쪽의 남원군에 속해 있었으나, 190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수군이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은 상(上)번암, 중(中)번암, 하(下)번암의 3개 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하나로 통합되어 번암면(蟠岩面)이 되었다.

번암면은 장수군 면적의 1/4을 차지하여 장수군에서 면적이 가장 큰 면이면서, 임야가 85%를 차지하고 있는 산지 지역이다. 장수군의 남쪽에 위치하는 번암면은 동쪽으로 백두대간을 경계로 경상남도 함양군의 서상면 및 백전면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시의 아영면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영취산에서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금남호남정맥을 경계로 장수군 장수읍과 계남면 그리고 장계면과 경계를 이루며, 남쪽은 남원시 운봉읍 및 산동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지계곡이 있는 지지리는 번암면 중에서 과거 중번암면 지역이었다. 지지(知止)라는 지명은 보통 지소, 지보, 지승 등과 같이 더 갈 곳이 없는 계곡의 끝(地止)에 있는 마을에 붙는 지명이다. 지지리 역시 골짜기의 끝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지지리는 동쪽으로 백두대간을 경계로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옥산리), 백전면(운산리, 대안리)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무령고개를 경계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은 장안산을 경계로 장수군 장수읍 덕산리 및 계남면 장안리와 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남쪽 지지계곡의 출구 쪽은 번암면 동화리로 이어진다.

지지리는 번암면 소재지 방향인 남쪽의 동화리 방향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1,000m 정도의 높은 산지로 둘러싸인 계곡지역이다. 북쪽의 무령 고개에서부터 남쪽의 지지마을(원지지)까지 약 10km의 계곡이다. 지지계곡의 가운데를 북에서 남으로 백운천이 흐르고 있는데, 백운천을 경계로 백두대간이 이어지는 동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하천의 서쪽은 상대적으로 완경사를 이룬다. 따라서 마을은 주로 완경사인 백운천의 서쪽에 위치하는데, 다만 중치(또는 중재)마을 만이 백운천의 동쪽 높은 곳(640m)에 위치하고 있다. 백운천의 물은 남쪽으로 흘러 1999년에 완공된 번암면 죽림리의 동화댐으로 흐른다.

지지계곡의 북쪽에는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이 갈라지는 영취산(1,076m)을 기점으로 장안산(1,237m)과 백운산(1,279m)이 있으며, 동쪽의 백두대간을 따라서 백운산, 월경산(980m), 속금산(907m)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쪽에는 장안산과 연결된 어치재(980m), 팥밭재(720m) 등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도로는 원래 자동차 통행이 어려운 좁은 비포장 도로였으나, 743번 지방도에 지지터널(2005년)이 만들어지고 2008년에 2차선 포장도로로 정비되었다. 현재 버스는 삼거리 마을까지 운행되고 있다.

번암면 지지리는 지지계곡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백운천을 따라 원지지 마을에서 남쪽의 번암장까지 약 8km, 그리고 원지지 마을에서 북쪽의 무령고개까지의 지지계곡은 약 10km의 거리이다. 원지지 마을에서 무령고개 사이의 지지계곡에는 광대동, 어채, 삼거리 그리고 중치(재)마을이 있었다. 이중 중치(재)마을과 삼거리의 기동(텃골)마을은 현재 사람이 살지 않는다.

지지계곡의 하류인 남쪽에서부터 원지지 마을(해발고도 400m) – 광대동(430m) – 어채(480m) – 지지터널(510m) - 삼거리(610m, 지지분교, 1968년~1995년 폐교) – 청옥폭포(620m) – 바위목 피정의 집(640m, 예수의 소화수녀회) - 옥산가든(660m) – 무령고개(920m)로 계곡을 따라 해발고도가 점점 올라간다. 지지계곡은 10km의 거리에서 400m에서 920m까지 520m의 해발고도 차이가 있다. 이 중 삼거리 마을은 남쪽의 번암, 북쪽의 장계(무령고개, 920m), 동쪽의 함양 백전면(중고개재, 730m)으로 길이 나누어지는 삼거리라는 의미로서 지지계곡 상류의 교통 요충지이다. 그리고 옥산가든과 지지폭포가든(현재는 ‘자연에서’), 먹골민박 등 과거부터 있었던 음식점과 민박집 이외에, 최근에는 삼거리 마을을 중심으로 새로운 펜션과 민박집이 들어서 있다.

지지계곡에는 명당(明堂)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온다. 먼저 무령고개 남쪽 아래에 있다는 ‘무룡궁 명당’은 무룡궁재(무령고개, 주산)와 백운산(청룡), 장안산(백호), 남승치(안산), 지리산(조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입수처에는 천지수와 옥지수가 나오는 명당이라고 전해져 온다. 그리고 동쪽 중재에는 호승예불 명당이 있다고 전해져 오고, 서쪽 장안산의 상봉은 한발이 극심할 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국가에 변이 생길 때에 산이 운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또한 삼거리 북쪽에 있는 청옥폭포(또는 청심폭포, 삼거리 폭포, 무룡폭포)는 남북으로 흐르는 백운천을 중심으로 동쪽 백운산에서 흘러오는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고, 서쪽 장안산 물줄기(청옥골)가 합수하는 지점으로 장군 진급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처로 소문이 나 있다.

지지계곡 사람들

지지리는 높은 산지로 둘러싸인 계곡이라는 지형 조건과 국가의 주요 교통로에서 벗어나 있다는 위치 조건에서 오지라는 말이 딱 맞는 지역이다. 삼면이 1,000m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출구라고는 백운천이 흘러나가는 남쪽의 번암면 동화리 쪽 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았고,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중고개재와 중재 그리고 광대치를 통해 경상도 함양군(백전면)과 왕래하였으며, 북쪽으로는 무령 고개를 넘어 장수군 장계와 왕래하였고, 서쪽으로는 어치재와 팥밭재를 통해서 장수군 장수읍의 덕산리와 왕래했다. 즉, 과거에는 도보로 왕래할 수 있는 많은 길이 있었고, 지금보다 지역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교통로(743번 지방도)가 개설된 이후에는 오히려 통행로가 단순화되었다.

지지계곡은 지형 조건과 위치 조건으로 봐서 피난처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처음 이 계곡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남쪽의 번암면 방향에서 백운천을 따라 들어와 계곡 북쪽으로 서서히 개척해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방향에서는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 때에 경상도 방면으로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 경남의 함양 방면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이곳으로 이주해 오기도 했다. 이 후 동학농민운동(1894년)과 한말 의병 시기에도 피난처의 역할을 했는데, 동학농민운동 때에 부근의 장수읍(용계리)과 번암면(노단리 집재), 남원 산동면(부절리 방아치) 등지에서 전투가 있었으며, 한말 의병활동을 했던 의병장 전해산(1879~1910)이 1909년 번암면 동화리에서 체포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1948년 여순사건 이후부터 6.25때 까지는 백두대간이 빨치산의 주요 이동로가 되면서, 특히 이 지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50년 11월 ~ 1952년 10월 사이에 만행산(또는 천왕봉, 남원 산동면)에서 백운산(장수와 함양군 경계) 쪽으로 이동하는 공비와의 전투가 번암면 소재지(노단리)와 고래등(동화리), 삼밭골(죽산리) 등지에서 있었다. 그리고 지지리의 북쪽인 계남면 장안, 가곡, 궁양(내동) 쪽의 공비가 장안산으로 도주했으며, 전북도당의 빨치산이 진안의 운장산에서 장수의 장안산으로 거점을 이동하여 저항하기도 했다. 또한 1951년 7월에는 빨치산의 이현상 부대가 부근의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를 한 달간 점령하기도 했었다.

특히 6.25 이후 지지계곡은 빨치산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지지계곡에는 국군의 육군대위와 빨치산 여성 사이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 이야기는 1951년 12월말 빨치산 토벌대였던 국군 26연대의 중대장 김 대위(당시 24세)는 장안산 포위 공격 중에 장안산 남쪽 지지계곡에서 오양수(당시 20세)라는 빨치산을 체포했다. 오양수는 미군 야전파카의 내피를 뒤집어 쓴 채 눈밭에 쓰러져 있는 상태에서 발견되었는데, 전북고녀 출신의 전북여맹 부위원장으로 아버지가 면장으로 반동의 굴레를 벗으라는 권유에 따라 빨치산이 되었다고 한다. 김 대위는 군인가족증을 만들어 주고 목포에 있던 자신의 본가로 보냈다. 그러나 김 대위는 3기 작전(52년 1월 초)을 마치고 지리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방첩대에 체포되어 남원 감방에 수감되었고,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단장이었던 송요찬의 특사를 받아 다시 원대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심문을 받던 부인 오양수는 남편과 시댁에 부담을 주는 것이 싫어 심문 중 카빈 소총으로 자결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장안산과 지지계곡에서의 국군과 빨치산의 대치 상황은 <남부군, 1988, 이태>, <실록 지리산, 1992, 백선엽>, <군과 나, 1989, 백선엽> 등에 기록되어 있다.

지지리와 지지계곡은 산간오지라서 역사와는 무관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특히 6.25 당시에는 빨치산의 주요 이동로였던 백두대간이 통과하고 있다는 점과 진안 운장산에서 장수 장안산으로 이동해서 활동했던 전북도당의 빨치산과 이를 격퇴해야 했던 국군 사이에 많은 전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6.25 이후 빨치산이 토벌될 때까지 당시 이곳 주민들은 낮에는 마을에 올라가서 농사를 짓고, 밤에는 아래 마을로 내려오는 생활을 했었다.

백두대간과 중재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이 나누어지는 영취산(1,076m)과 남쪽으로 이어지는 백운산(1,279m) 구간에는 큰 고갯길이 없으나, 백운산에서 월경산(980m) 구간에는 중고개재(번암면 지지리 삼거리 마을 ~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재마을)와 중재(번암면 지지리 중재마을 ~ 함양군 백전면 중재마을)라는 2개의 고개가 백두대간을 동서로 연결하고 있다. 특히 650m의 중재(중치)를 경계로 장수 번암면의 중재마을(일명 남원 중재, 과거 이 지역은 남원군이었다가 1906년 장수군으로 행정구역이 변했기 때문에)과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재마을(함양 중재)이 백두대간을 경계로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두 마을 사이의 거리는 약 1.8km 정도이다.

고개이름을 ‘중고개재’와 ‘중재’로 부른 것은 중간에 위치한다는 의미인데, 함양에서 장계 사이의 중간이어서 중재로 불렸다는 설(함양군지)과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와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의 중간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중재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두 가지 설은 큰 지역 규모에서의 중간인가, 아니면 지지리와 운산리 두 지역 간의 중간인가의 측면에서 지역 스케일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백두대간 구간종주 코스 총 29구간 중에서, 중재(650m)를 기점으로 제 3구간(여원재 - 고남산 - 사치재 - 복성이재 - 치재 - 봉화산 - 월경산 – 중재)과 제 4구간(중재 - 백운산 - 무령고개 - 깃대봉 – 육십령)이 나누어지는데, 이런 이유로 함양 중재마을에는 민박집도 있다.

두 개의 중재마을

이 지역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지금은 사라진 마을이지만 백두대간의 가장 가까이에 위치했었던 남원 중재마을이다.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지만, 정자나무가 남아있고, 과거 사람들이 거주했던 집터 그리고 경작지의 형태가 남아있다. 지지리에 위치하는 마을이 모두 백운천의 서쪽 완사면에 위치하는데 비해서, 중재마을은 유일하게 백운천 동쪽 백두대간 가까이에 위치한 마을이다(해발고도 640m). 남원 중재마을에서 평평한 고갯길인 중재(백두대간)를 동쪽으로 넘어 완만한 길을 가다보면 약 1.8km의 지점에 또 다른 중재마을(또는 중기마을, 해발고도 520m,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이 있고, 이 마을은 지금도 존재한다. 두 마을 모두 중재마을이라고 불리웠고, 주민들은 남원 중재마을과 함양 중재마을로 구분하여 불렀으며, 두 마을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두 개의 중재마을 중 어느 마을이 먼저 형성되었을까? 남원 중재마을(640m)은 함양 중재마을(520m) 보다 해발고도가 높고, 지지리 쪽이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서 함양 쪽이 완경사를 이루는 측면을 고려하면, 주민들은 함양방면에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함양 중재마을이 먼저 형성되고, 남원 중재마을이 나중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마을은 같이 함양 백전장의 생활권이었는데, 이 후 교통조건의 변화에 따라 백두대간을 경계로 장수군과 함양군,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큰 구분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남원 중재마을에서 함양 중재마을 사이는 약 1.8km의 비교적 완만한 길로 연결되는데 비하여, 남원 중재마을에서 지지리 방향(지지계곡)으로는 약 700~800m로 거리는 짧지만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남원 중재마을 사람들은 행정구역은 번암면 지지리이지만, 생활권은 백두대간을 넘어 함양 백전장이었다.

남원 중재마을에 거주했던 O씨 집안의 경우 1750년경 집안의 둘째 아들이 함양군 지곡면에서 남원 중재마을로 이주하여 1900년 초기까지 살았다. 이 후 큰 아들은 번암면 죽림리로 이주하고, 이후 후손들은 임실, 전주, 군산 등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함양 중재마을로 이주한 후 함양군 서하면으로 다시 이주하고, 후손들은 거창과 부산으로 이주했다.

이와 같이 남원 중재마을 사람들은 장수군 번암면으로 이주한 경우와 함양 백전면으로 이동한 경우가 있는데, 어디로 이주했는가에 따라 전라도 사람이 되기도 했고, 경상도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집안 사람들이었다.

이 지역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시기부터 1954년 빨치산이 완전히 소탕될 때까지 약 60년 동안 역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로 인한 이농현상과 교통과 교육시설 등 열악한 삶의 조건은 주민들을 지역 밖으로 이동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결국 남원 중재마을의 폐쇄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 마을이 폐쇄에 이르게 한 요인들은 정치적・역사적 요인(동학농민운동, 한말의병, 여순사건, 6.25때의 빨치산), 경제적 요인(1960년대 화전정리, 한계농업, 교통조건의 어려움), 사회적 요인(이촌향도, 교육 및 의료 문제, 행정구역과 생활권의 불일치)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지역은 함양 중재마을(520m), 중고개재(730m), 지지리 삼거리(610m) 그리고 번암 중재마을(640m) 등으로 전반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이지만, 지역 내에서의 상대적인 고도차는 그렇게 크지 않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에게 백두대간은 그렇게 큰 장벽으로 인식되지는 않았고,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번암면 지지리 쪽에는 1919년에 개교한 번암 초등학교가 있었고, 지지리 바로 남쪽에는 동화 초등학교(1943년)가 있었으며, 지지리 삼거리에 지지분교가 세워진 것은 1968년(1995년 폐교, 지지리 184번지 일대)이었다. 그리고 백두대간을 넘어 함양 백전 쪽으로는 운산리의 대방 초등학교가 1946년에 개교되었기 때문에(1996년 폐교, 현재는 함양학생야영수련원), 남원 중재마을 사람들은 1968년 지지분교가 개교되기 이전에는 길이 편하고 그래도 가까운 함양 운산리의 대방 초등학교에 다녔다. 남원 중재마을에서 백전면의 대방 초등학교까지는 약 3km, 번암면의 동화 초등학교까지는 약 8km, 그리고 지지리의 지지분교까지는 약 2km의 거리이다. 남원 중재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완경사 지역으로 갈 수 있는 운산리의 대방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68년 지지리 삼거리 마을에 지지분교가 개설되면서 급경사이지만 거리가 짧은 지지분교를 다녔다.

지지리 사람들의 생활권은 백두대간이라는 산줄기를 넘기보다는 물길인 백운천을 따라 번암 및 남원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조석필, 1997, 태백산맥은 없다)이 일반적이지만, 지지리 중에서도 삼거리를 포함한 북쪽의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 사람들은 백두대간을 넘어 동서 교류를 많이 했다. 지지리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하는 원지지 마을과 광대동 마을 주민들은 약 10km 정도의 백운천을 따라가 번암장을 많이 이용했지만, 지지계곡의 북쪽에 위치했던 삼거리 마을은 번암장 보다는 함양 백전장을 많이 이용했다. 광대동 주민들도 백전장을 이용했다. 그러나 운산리(중재마을)와 지지리(삼거리 마을)에 각각 버스가 들어오면서 양쪽으로의 흡수력이 더 강해졌고, 주민의 이동행태에 영향을 주어 생활권이 재정립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백두대간은 처음에는 교통 장애물이라기보다는 고갯길로 연결의 역할을 했었지만, 버스와 같은 새로운 교통수단의 도입과 교통로 개설은 백두대간을 경계로 번암면과 백전면을 분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끝 지점에 위치했던 남원 중재마을은 사라지게 되었다.

함양 중재마을은 함양군 백전면 버스 노선의 최말단 지역으로 백전면과의 거리가 약 8km 정도이다. 그리고 번암면 지지리의 남원 중재마을은 번암면과의 거리가 약 12km이고, 남원 중재마을(640m)에서 지지계곡의 백운천(510m)은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어서 번암면과의 버스 노선 개설이 어려운 지역이다.

남원 중재마을은 백두대간의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마을이었으나, 마을 앞의 고갯길이었던 백두대간이 도와 군 단위의 행정구역 경계로 작동하였고, 마을의 위치와 지형조건으로 인하여 교통로 개설이 어려워, 결국 마을 폐쇄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두대간 상에 실제 존재했던 남원 중재마을이 지금도 유지되어 백두대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면, 마을입지를 잘 살린 사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는 아쉬움이 있다. 백두대간은 외부사람에게는 험하고 큰 장벽으로 생각되지만,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다른 마을로 가는 마을 어귀의 작은 고갯길일 뿐이었다. 

/조성욱(전북대 지리교육과 교수) / <사람과언론> 11호(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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