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코드와 종교경관-최진성(전주고등학교 교사·문화지리학 박사)

시작하며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는 과거의 층위가 쌓여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과거를 아는 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는 글들은 지역 지리적 관점에서 주로 종교를 대상으로 지역성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먼저, 전주시 승암산 일대를 대상으로 특정 장소가 후백제시대부터 현재까지 여러 종교들에 의해 선호되는 이유를 지리 코드의 하나인 ‘장소 관성’을 통해 살펴본다.
또한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전라도의 도시들(전주, 군산, 목포)에 전래된 그리스도교의 선교거점들을 대상으로 확장된 지리 코드들(장소 관성, 장소 전용, 장소 응집성, 장소 권력)을 적용할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일본 종교인 신도(神道)를 통해 한반도를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과정을 조선신사(朝鮮神社)를 통해 살펴보겠다. 이러한 장소성과는 별개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1872년 지방지도』에 나타난 제사시설 관련 지명들을 대상으로 유교 관련 지명의 도별 특징을 알아볼 것이다. 이와 함께 천주교 초대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쓴『뮈텔주교 일기』를 분석하여 나타난 프랑스 선교사의 지리 인식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으로 인천에 위치한 박문여자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학교 부지 선정과 입지 이동에 근현대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이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추적할 것이다. 이 외에도 지역 지리적 관점의 글들을 몇 편 소개하려고 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글감들은 필자가 살고 있는 공간 너머 다른 지역에도 적용 가능한 사례들이라고 생각한다.
지리적 현상을 해석하는 지리코드란?
한국은 다종교사회라고 흔히 말한다. 그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 사회문화에서 주도적인 공인종교의 위치를 차지해왔다. 예를 들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 조선시대에는 유교, 일제강점기에는 신도와 불교 및 그리스도교,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종교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의 주도권 경쟁은 가시적으로 이전의 공인종교가 차지했던 종교적 장소를 다시 점유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으로는 신도안(新都內)이 새로운 왕조의 국도로 거론되다가 불교 및 다양한 유형의 종교적 장소로 이용되었던 것이나, 소수서원처럼 이전에 사찰이 세워졌던 장소가 서원으로 계승된 경우, 또는 사찰이나 서원이 있었던 장소에 그리스도교경관이 세워지는 경우의 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사회문화적 주체들이 선점한 장소들을 다른 종교들이 전용(轉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종교지리적 현상을 이해하려면 종교별 장소가 갖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적 의미를 알아야 하며, 이와 관련된 사회적 주체들의 의도 또는 이해관계가 파악되어야 한다. 역사가 유물과 유적을 통해 과거의 사회문화적 주체들의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단서를 발견한다면, 지리는 경관과 장소 및 이들과 관계를 맺었던 주체들의 상호 이해관계를 추정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관과 장소는 일종의 지리적 현상을 해석하는 지리코드(geographical code)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경관과 장소는 개별적으로 기능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지리적 현상을 해석하는 지리코드들이다.
이와 같이 시대가 바뀔 때마다 어떤 특정 장소가 새로운 이념을 반영한 경관들을 통해 계속 주목받으며 선호되는 현상을 ‘장소의 관성’이라는 용어로 정의한다면, 종교적 관점을 강조한 ‘장소의 종교적 관성’ 역시 지리적 현상을 이해하는 일종의 지리코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코드를 통해서 종교적 장소가 갖고 있는 지리적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주시 남동부에 위치한 승암산(僧岩山) 일대를 사례지역으로 삼았다. 이 산 일대는 후백제 시대에 견훤(甄萱)이 전주성(全州城)을 쌓으면서 역사적 조명을 받았던 왕도(王都)가 세워진 장소였다. 또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불교와 유교 및 천주교 등과 관련된 종교경관들이 집중되어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례지역을 대상으로 먼저 왕조가 교체되면서 주도권을 장악한 공인종교들마다 승암산 일대에 지속적으로 그들만의 종교경관들이 배치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문헌자료와 고지도 및 답사를 통해 얻은 자료들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승암산 일대가 다른 장소들보다 주목을 받았던 이유를 장소의 종교적 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찾아보았다. 그것은 승암산 일대에 내재된 장소적 의미 또는 장소성을 알아보려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경관의 해석
종교학에서는 종교 경험의 독특함을 ‘현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현상이란 의식의 내면 깊숙한 층위에서 발생하는 비가시적 경험의 총체를 말한다. 이 종교현상이 내면적 의식현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외적 표현형식은 상징이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종교적 상징을 통해 종교경험을 이해할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정한 종교공동체에 속한 신자들은 대체로 한 종교가 제공하는 경험의 범주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교 현상의 집단적 공유와 역사성 때문에 종교마다 서로 다른 종교경험이 유지 및 발전되며, 외적 표현의 상징물인 종교경관도 다를 수밖에 없다.
종교경관을 상징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상징을 하나의 텍스트로 상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물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은 문학 이론에서 텍스트를 어떻게 읽는지에 대한 언어적 전환의 작업에 대한 정보가 많이 이용되어 왔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이미 기호학과 해석학에서는 언어를 중심으로 사진과 광고, 및 조형물들을 분석 및 해석의 텍스트로 삼아 접근하였다. 이것은 법칙을 찾기 위한 실험적 과학이 아닌 의미를 찾아내는 것으로 일종의 해석적 과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지리학에서는 스리랑카의 캔디안(Kandian) 왕국을 연구한 던칸(J. Duncan)이 국가권력과 종교간의 관계를 해석한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해석은 역사적, 사회적 특정 담론에 의한 사회적 맥락의 산물이다. 해석은 해석하는 집단에 의해 이루어지며, 빈번하게 헤게모니적 가치체계를 반영한다.”고 함으로써 캔디안 왕국의 사례를 통해 코드화된 경관을 해석하면서 담론 분석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경관과 경쟁적 담론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였으며, 이를 통해 캔디안 왕국의 정치는 경관 해석의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캔디안에서 불교의 카리스마적 왕권의 중요한 부분이 도시의 창조와 유지였다. 그러나 그동안 이와 관련된 전문가들이 여러 다른 방법에 의해 도시의 창조와 유지를 위한 지침서(텍스트)를 해석해 왔기 때문에 자의적인 해석의 정치학이 발달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정적을 누르고 왕권을 차지한 다른 귀족(Ahalepola)은 자신의 왕권 차지를 정당화하기 위한 담론을 창출하였다. 이를 위해 이전 왕이 전통에 입각해 해석한 텍스트 모델에 따라 변형시킨 도시를 부인함으로써 또 다른 해석을 통해 그 정당성을 인정하는 담론을 형성하였다.
또한 던칸은 특정 경관을 독립된 ‘물질화된 담론들’로 보고 담론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이데올로기인 공유된 의미’로 정의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에서의 국가권력과 종교는 스리랑카와 큰 차이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던칸은 같은 불교 세력권 내에서의 주도권 경쟁에서 물질화된 담론 또는 경관을 가지고 권력관계를 해석하였다면, 이 글에서는 국가권력의 교체와 관련된 서로 다른 종교들끼리의 주도권 경쟁에서 물질화된 담론을 가지고 권력관계를 해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경관은 해석하는 대상으로서의 텍스트(text)라고 할 수 있다. 즉 종교경관(기표)에 투입된 주체세력(저자)의 의도(기의)를 해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물론,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내용도 살펴볼 수 있는 점까지도 포괄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경관을 이용하고 바라보는 입장(독자)의 새로운 해석에 의한 텍스트를 만든다는 점에서 해석적 방법의 유용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전라북도의 무주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던 적상산에 안국사(安國寺)와 호국사(護國寺)라는 사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적상산이라는 중요한 군사전략적 장소에 불교사찰을 세워놓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임무를 수행하는 주체들은 바로 승려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경관으로 포장된 채 숨겨져 있던 유교적 권력주체들의 정치적 의도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종교의 사회적 목적 때문에 이용된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순수한 종교적 목적의 장소의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의 장소는 종교적으로 혼돈의 세계에 대한 고별을 의미하며 종착점 또는 절대적인 의지처를 제시하기 위한 장소가 형성된다. 예를 들어 사찰을 비롯한 교회들은 더 높은 세계로의 출발점이자 신들의 세계와의 교섭을 보증해준다. 따라서 그 장소는 어떤 징표만으로도 장소의 거룩함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그 징표는 풍수지리적 관점일 수도 있고, 불교적 이상향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일수도 있다. 종교적 인간은 성화된 세계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종교경관이 배치된 장소에는 순수한 종교적 목적과 사회적(정치, 사회, 문화, 역사 등의 의미를 포함) 목적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통합해서 ‘종교・사회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대마다 달라지는 사회문화적 변화와 더불어 그 주체세력들은 정치에 종교를 이용하였으며, 그 결과 공인종교로서의 위상 역시 뒤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 융성하였던 불교는 조선시대에 거의 민속종교의 수준으로 위상이 격하됨으로써 민속종교와 습합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한 쇠퇴해버린 위상 때문에 그 경관의 장소를 유교에 넘겨주는 것은 물론, 심지어 사찰의 재산이 빼앗기거나 사찰의 목재가 서원이나 향교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는 성당과 교회의 목재로 사용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장소의 점유과정을 ‘장소의 전용’이라고 한다면, 종교들 사이의 장소의 전용 현상은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잘 나타난다.
이러한 종교들끼리의 장소의 전용이라는 과정에 숨어 있는 주도권 경쟁을 이해하려고 이 글에서는 ‘장소의 종교적 관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그 의미는 종교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시대에 따라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어 선택되는 경관의 장소’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에서 경관과 장소는 개별적으로 기능한다기보다는, 종교를 예로 들면, 종교경관이 세워진 장소라는 형태로 구성되며, 이 장소에는 또한 당시의 사회문화적 주체들의 이해관계가 내재되어 있음까지 포괄하고 있는 의미로 한정한다. 지리적 관점에서 특정 장소가 주목받는 이유 및 그 과정을 알아보는 것은 종교뿐 아니라 다른 유형의 경관의 장소에 대한 해석을 위해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적 장소라고 하지 않고, 종교경관의 장소라는 용어를 선호하여 사용하였다.
한반도에서 대부분의 종교경관의 장소들은 이전 시대의 공인종교가 헤게모니를 장악하면 그 장소를 전용하거나 아니면 다른 적절한 장소를 찾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국가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는 데는 새로운 종교권력의 창출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기존의 종교경관의 장소를 전용하는 것은 일종의 주도권 경쟁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의 하나였다고 추정된다. 이 글에서 사례로 삼은 승암산 일대 역시 역사적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서로 다른 종교경관들이 형성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즉 후백제부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 및 현재까지 공인종교들이 등장하면서 서로 다른 유형의 종교경관들이 승암산 일대에 구성되었을 것이며, 이들 사이에 또는 다른 종교들과의 사회적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장소의 종교적 관성’이라는 지리코드를 통해 승암산 일대가 공인종교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주목받았던 이유를 살펴보았고, 이를 통해 특정 장소의 이미지가 순환적으로 새롭게 재구성되는 과정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왕궁과 불교경관의 장소, 승암산

승암산의 종교적 장소로서의 관심은 후백제시대부터 현재까지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쓰는 편의상 불교경관이 세워졌던 후백제와 고려시대, 유교경관이 세워졌던 조선시대, 그리고 천주교경관이 세워졌던 일제강점기 등으로 구분해 그 장소적 의미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승암산은 해발고도 약 306m 정도의 바위산으로, 전주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산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지도들에도 ‘승암산’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더욱이 과거 조선시대의 읍치경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 가운데 가장 높고 웅장하게 그려졌으며, 현재에도 정상 부근은 규암 성분의 바위들이 여기저기 노출되어 멀리서도 관측된다. 이 산으로부터 기린봉(麒麟峰, 260m)과 발산(鉢山)이 산세를 이루는데, 기린봉은 전주팔경의 하나이고 발산에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상징경관인 오목대와 이목대가 위치하고 있다.
승암산 일대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던 것은 후백제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견훤에 의해 무진주(光州)에서 완산(全州)으로 후백제의 도읍지가 천도된 다음에 도성을 쌓은 곳이 바로 승암산 일대로 현재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이 전주성의 형태와 규모를 발굴한 결과에 의하면 승암산의 산지에서 평지의 토성(전주고등학교와 동초등학교를 연결하는 성곽)까지 이어지는 내・중・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토성의 총 길이는 약 18km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그림 1 참고)
또한 승암산의 정상 부근에는 동고산성(東固山城)이 있으며, 여기에서 나온 기와편의 명문에 ‘全州城’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기와에 성의 이름을 새긴 예는 경주 월성에서 나온 것 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와당은 불교사찰과 왕궁성 건물 이외에는 쓰이지 않는 신라말~고려조의 연꽃무늬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와에 새겨진 명문이나 연꽃무늬, 또는 토성의 흔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후백제시대의 전주성은 왕궁이었음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정황들로 미루어 승암산 일대는 후백제의 왕궁인 전주성이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려던 거점이었다고 보인다. 또한 이 전주성은 연꽃무늬의 와당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종교적으로 불토국가를 이루려던 이상향, 즉 聖地로서 기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주성의 거점이었던 승암산 일대는 신라의 경주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통일국가를 달성하려던 본거지이자 불교의 성지였다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승암산 일대에 전주성이 세워진 지리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전주라는 도시의 발생 기원지를 승암산 일대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주성이 승암산을 배경으로 산지에서 평지까지의 토성 안에 왕궁과 일반 민가들이 배치되었기 때문에 토성 밖에도 자연스럽게 일반 촌락들이 분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대상으로 종교적 서비스를 수행할 수 있는 불교경관들 역시 승암산 일대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배치되었을 것이다. 둘째, 도읍지로서의 전주는 이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백제시대의 한성, 공주 및 부여와 같은 차원의 도읍지로서의 상징적 이미지가 부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도는 국가의 명운을 결정한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차원에서 전주가 갖고 있었던 마지막 도읍지라는 인식들이 이 지역민들에게 계승되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승암산 일대의 장소적 의미는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지 정치적 차원에서 전라도는 점차 배재된 지역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종교와 관련된 부분의 역할이 더 요구되었다고 여겨진다.
고려시대의 승암산 일대는 대부분 불교 도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고산성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는 동고사라는 절을 포함해서 일제강점기의 지도에도 승암사(僧岩寺), 보석사(普石寺), 성불사(成佛寺), 일고아암(日光庵), 동고암(東固庵), 수도암(修道庵) 등의 불교 사찰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찰들은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승암산(중바우)’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고려시대에 주요한 사찰이 있었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승암산’이라는 지명은 이 산의 정상에 있는 바위들이 마치 스님들이 염불을 하는 모양을 닮았다 하여 생긴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불교 신자들의 눈에 승암산의 회백색 규암 바위들이 스님들의 모습으로 보였다는 것은 이들에게 승암산이 일종의 상징기호로 해석되었음을 말해준다. 즉 성불을 염원하던 독자들에게 승암산은 해탈을 가져다주는 성스러운 산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상징경관이었다. 달리 말해서 승암산 정상의 노출된 바위들이 스님들의 머리 모습을 연상시켰고, 노출된 바위들의 무리는 스님들이 무리지어 사는 불교도량을, 그리고 이 도량은 결국 부처님이 계시는 장소이자 성역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승암산 자체가 불자들에게는 불교도량이자 일종의 룸비니 동산을 연상케 하였던 상징경관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의 주요 종교경관들은 비록 없어졌거나 그 위상이 약화되었더라도 대부분 지명을 통해서 그 장소의 종교적 의미가 전달되곤 한다. 전주의 경우를 예로 들면, 성황사(서낭당이), 향교(교동), 경기전(전동), 진북사(진북동), 서원(서원로) 등의 지명들에서 종교경관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종교경관들이 세워져 있었던 장소와 연관된 지명이 잔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당시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시각적 또는 청각적으로 탁월한 종교경관의 이미지가 상징적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명의 회자는 종교경관과 함께 그 장소적 의미를 이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승암산이라는 지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종교 지명과 관련해서는 다른 지면을 빌려 따로 설명할 기회를 마련할 것이다.
승암산 일대에 배치되었던 고려시대 불교경관들의 종교적 성격은 대부분 진표계(眞表系)의 미륵신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라도가 백제시대부터 미륵사를 포함해 금산사로 이어지는 미륵신앙의 본산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전주 역시 같은 지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후백제의 왕도였다는 점과, 고려에 복속된 초기에 고토(古土)의 수복을 희망하는 지역민들의 민중 신앙적 기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또한 현재에도 전라도 일대에 유난히 많은 미륵신앙의 흔적들이 찾아지는 연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부흥의 꿈이 후백제까지 이어지다가 좌절된 후, 그 염원이 미륵신앙으로 이어짐으로써 승암산의 종교적 역할은 고려시대에도 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라시대에 조성된 동고사(승암산)를 포함해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세 군데의 사찰들, 즉 北固寺(鎭北寺, 완산), 南固寺(남고산), 西固寺(황방산) 등은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 가운데 북고사를 진북사라고 불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비보풍수적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해서 이 사찰들의 성격을 비보사찰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전주의 지세로 볼 때 북쪽이 허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숲을 조성했다는 숲정이(현 전주시 진북동 소재)와 덕진 연못(현 전주시 덕진동 소재) 등은 앞의 사찰들과 더불어 전주에 존재하였던 비보경관들로서 그 역할이 중요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발달한 비보풍수라는 관점에서 사방에 세워진 사찰들은 전주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한 일종의 비보경관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승암산 일대는 불교도량이자 비보풍수적 기능이 중첩된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후백제의 전주성은 승암산을 배경으로 형성됨으로써 전주의 발생 기원지를 승암산 일대라고 추정 가능한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이에 따라 이 일대의 거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불교사찰들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주가 후백제의 도읍지였다는 사실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중앙의 권력에서 배제됨으로써 종교적 장소로서의 특성만 강조되었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이것은 한양이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사회적 이념은 바뀌어도 수도로서의 장소성은 그대로 계승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유교경관의 장소
조선시대에는 승암산에서 이어지는 발산(鉢山 또는 發李山이라고도 함)의 산기슭에 오목대와 이목대가 세워졌고, 여기에서 조선왕조 창업의 전설 및 설화들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다양한 경관들이 배치되었다. 먼저 이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李安社)가 살았다는 발산 기슭으로 자만동(滋滿洞)이라고 하며, 목조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에 나오는 경관으로는 장군수와 호운석이 대표적이며, 이들 모두 목조가 전주에서 거주하던 어린 시절의 풍모를 묘사한 것이다. 예를 들면, 장군수는 발산 남쪽에 있는데, 목조가 어려서 놀이를 하면서 여러 아이들을 모아서 이 나무 밑에서 진법을 배웠다고 하여 그 나무를 장군수라 불렀다든지, 또는 목조가 어릴 때 여러 아이들과 발산 남쪽 산록에서 폭풍을 만나 바위 밑에 피하였는데,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러자 목조가 각자 옷을 던져서 호랑이가 무는 옷의 주인이 희생을 하자고 제안하였고, 이에 모두 옷을 던졌는데 공교롭게도 호랑이가 문 옷의 주인이 목조였다.
그래서 목조가 밖으로 나오자 호랑이는 달아나고 바위 벼랑이 갑자기 무너져서 모두 죽고 목조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호원석에 관한 설화 등이다. 이들 설화와 관련해 고종(高宗)은 1900년에 「穆祖大王舊居遺址(목조대왕구거유지)」라고 적은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이 설화들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발산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이 내용들을 사실로 보기는 어렵고 단지 목조의 세거지가 발산 아래 자만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던 의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오목대는 약 70m 정도의 구릉(언덕)으로 이목대와 연결된 일종의 돈대(墩臺)라고 할 수 있다. 조선 건국 12년 전인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이성계가 전라도 운봉 전투에서 뛰어난 활솜씨로 왜적의 장수를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전주에 들러 일가들을 만나 축연을 벌였다는 전설 등이 용비어천가에 수록되어 있다. 고종은 이목대와 마찬가지로 오목대에도 1900년에 「太祖高皇帝駐蹕遺址(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석을 세워 전주의 왕조 발상지로서의 장소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조선시대의 승암산 일대는 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목조 거주지의 설화, 이성계의 황산대첩 후 오목대에서 열린 연회 등의 설화를 용비어천가에 수록한 장소로서의 의미가 중요하였다. 그리고 이 장소 설화를 증명하기 위한 경관들이 역대 왕 또는 신하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며, 특히 이 경관들이 세워지는 장소가 발산의 산기슭에 위치한 오목대와 이목대에 집중되어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발산 기슭의 오목대와 이목대는 일종의 구릉으로서 자만동 역시 승암산 일대에 형성되었던 주요 촌락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전주읍성이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평지 중심으로 세워졌다. 이러한 평지 중심의 체제에서는 자만동과 같은 구릉입지형 촌락들이 지배계층의 세거지(世居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서야 전주읍성이 본격적인 체제를 갖추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지의 토성에서 평지성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구릉들은 아직까지 지배계층의 세거지로서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에서 발산은 조선시대의 왕조를 위한 발상지이자 성역으로서의 장소적 의미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자만동은 배산임수로서의 명당(明堂)이라는 점 또한 고려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전주읍치경관은 경기전이 그 무게 중심점을 차지하였으며, 이러한 경기전의 위상은 이태조의 영정으로 말미암아 강조된 정치권력의 상징적 장소였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경기전의 사회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유생들은 스스로를 오목대에서 경기전을 바라보며 완연한 봄의 풍류를 즐기는 주인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은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권력자의 모습으로 그리도록 또는 보이도록 하였던 것이다. 즉 지배권력의 담론이 물질화된 그림에도 작용한 것이다.
또한 그림을 바라보는 해석가(독자)는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유생들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오목대와 경기전이 연결되다가 전주읍치를 모두 조망하는 단계에서는 그림에서 가장 짙은 색으로 강조된 산, 즉 승암산에서 조망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이 경기전과 오목대 및 이목대는 승암산과 연결되며, 결국 승암산을 통해 경기전을 강조하고자 하는 화가(저자 또는 관리와 유생들)의 의도 역시 읽을 수 있다. 특히, 경기전 주변을 에워싼 숲에는 백로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경기전을 성역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는 정권창출의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전국적 차원에서 전주라는 도시를 왕조의 발상지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따라서 유교이념에 입각한 유교경관들이 승암산 일대, 특히 발산 주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으며, 경기전을 비롯한 오목대와 이목대 또는 설화 및 고지도들에서 잘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전주가 후백제 시대의 왕도였다는 장소성이 조선시대에 왕조의 발상지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었던 조건을 충족시켰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으로써 전주는 왕조의 기원지로서 확실한 장소적 의미를 획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의 행정 중심지로서 부각되었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보인다. 이와 함께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에 거주하던 사대부들을 비롯한 지배계층들의 유대강화라는 부수적인 효과 또한 얻음으로써 정권유지를 위한 배후세력으로서의 토대가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전주의 승암산 일대에 배치된 유교경관들은 통치이념에 따른 정치적 생산물들이자, 지배계층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성된 일종의 종교적 상징경관으로서 권력의 효과를 높이는데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후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승암산 일대가 갖는 장소적 특성의 변화과정을 살펴보았다. 즉 산지에서 평지로 전주의 도시체계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왕조 및 종교사회적 주체의 등장에 따라 승암산 일대는 왕국에서 불교의 도량으로, 또는 새로운 왕조의 발상지로 변하면서 장소의 종교사회적 의미 또한 순환적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경관의 장소
전주에서 천주교 경관들이 입지한 장소들은 일종의 종교담론에 의해 재구성된 경관들이 차지하고 있다. 먼저 전라도 천주교 교우촌들은 종교자유가 없던 조선 후기(1784년 - 1886년)에 지배계층의 정치․종교적 헤게모니가 끼어들 여지가 적었던 전라도 산간벽지에 세워졌기 때문에 전주에는 아예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종교자유를 얻은 이후에 세워진 한옥성당들 역시 기존의 교우촌 중심지에 세워졌다. 유생들의 담론에 의해 전주읍성 안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가지도 못한 것은 물론, 서양식 전동성당은 그 읍성 밖에 겨우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전주읍성의 성벽이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된 뒤에도 읍성 안에 성당을 세우지는 못하였다. 다른 성당을 세울만한 경제적 여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 비해 유달리 강한 유교담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891년에 전주 담임 신부였던 보두네(尹, X. Baudounet) 신부가 읍내로 진출하면서 전동성당을 세우려고 할 때 읍성의 안쪽이 아닌 차선책이 바로 오목대였다. 오목대는 읍성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약 70m 정도의 언덕으로 전망이 좋은 장소였다. 따라서 보두네 신부에게 성당의 입지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유럽 개념의 맥락에서 아크로폴리스적 전통과, 전망이 좋은 언덕에 성당을 세우면, 그 자체가 천주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그리스도교 승리의 상징으로 선포(Kerigma)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오목대에 성당이 세워졌다면, 읍성 안팎에 거주하던 모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성당을 보면서 생활해야만 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자 유생들의 반발이 매우 심하였다. 대표적인 이유로는 성당이 세워지면 전주읍성과 경기전이 모두 노출된다는 점, 국유지인 오목대를 천주교에 빼앗긴다는 점 등이다. 이를 감안한 전라감영의 관리들은 1900년에 앞에서 언급한 목조와 태조에 관한 고종의 친필 비석과 정각 등의 왕조경관을 오목대와 이목대에 세움으로써 오목대의 성당건축은 자연스럽게 좌절되었다. 이를 통해 유교와 천주교는 당시에 같은 장소를 놓고 주도권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 보두네 신부는 전주교구(全州敎區)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프랑스 선교사들 및 한국인 신부들의 묘역을 승암산 중턱에 조성하였다. 그는 또한 1914년에 전라도에 천주교를 처음 전파하다가 신유박해 때 죽은 유항검과 그의 일가족 7명을 승암산 정상에 묘역을 조성해 묻었다. 물론 전주성이 있던 곳과는 떨어졌지만 동고사(東古寺)라는 절과는 바로 이웃하고 있다. 이미 선교사들의 묘역이 있었기 때문에 순교자 일가족의 묘역도 조성했겠지만, 직접적 이유는 상징적이면서 종교적인 이유들이 작용했다. 즉 이 순교자들을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상징성과 함께 산을 오르는 고통을 통해 죽음의 고통을 체험시키려던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보두네 신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승암산 정상은 전주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였다. 따라서 신자들을 역적으로 죽인 주체들이 살던 곳을 내려다보는 위치가 가져오는 상징성이 있었다. 결국 승암산 묘지경관은 천주교의 위상이 복권되었음과 아울러, 유교담론의 효력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시대가 왔음을 알려주기 위한 상징경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84년은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된지 200주년이 되며, 1987년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전주교구가 자치교구로 설정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따라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준비로 한국인 성인들의 배출과 아울러, 이들이 묻혀 있던 성지들의 조성과 관리가 중요하였다. 이에 따라서 전주교구에서도 성지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승암산은 전주교구의 신앙의 메카로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에서 성지순례의 행렬들이 이어지고 있다.
천주교재단은 1990년대 중반에 이목대 바로 옆에 위치한 대학교(전주공업전문대학교로, 현재는 비전대학교로 바뀜) 부지를 구입하여 교구청을 이전하였다. 대학교의 넓은 부지에 비해 토지 매입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였고, 기린로의 대로변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며, 승암산의 순교자 묘역과 전동성당 등의 성지와 관련된 주요 경관들이 집중되어 있고, 또한 발산의 쾌적한 자연환경 역시 교구청의 입지 결정에 유리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의 중앙성당 부근에 위치하던 구교구청은 주차장이 비좁고 건물이 노후화되어서 다양한 대응 방안을 모색한 결과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목대(엄밀히 말하면 이목대 옆 간납대) 일대가 천주교에 의해 다시 주목받았다는 점이다. 즉 보두네 신부에 의해 전동성당의 입지 장소로 결정되었다가 실패한지 약 100년 후에 오목대와 이웃한 이목대 일대가 다시 교구청이 설립된 장소가 되었다. 그럼으로써 전라북도 천주교의 선교 중심지로서 전동성당과 더불어 천주교 전주교구청의 역할이 주목된다.
이처럼 천주교의 주요 경관들이 승암산 일대에 재배치되는 것은 기존의 불교와 유교경관들 또는 왕궁이나 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정체성을 위한 경관들이 형성되었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천주교 역시 승암산 일대의 장소성을 계승하고 있기에 승암산이 성지로서 이용되는 ‘장소의 관성’에서 예외적이지 않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승암산 일대의 장소 관성은 계속 진행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승암산과 계룡산(鷄龍山)의 장소 관성
전주의 승암산 일대는 후백제의 왕도였다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그리고 일제시대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성지 또는 성역으로서 재구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소의 전용이라는 이러한 지리적 현상은 전주의 승암산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계룡산의 신도안(新都內) 역시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신도안 역시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선정되어 1년간 공사를 진행하다가 결국 한양으로 천도함으로써 도읍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가 후대에 오히려 전국적인 종교의 성지로 성장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일단 왕도로 주목된 두 장소들은 그 장소의 자연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관련된 사회적 구성원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새로운 종교사회적 의미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두 장소에서 발견되는 종교사회적 의미의 유사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풍수담론과 사회적 관계의 유사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두 장소들은 각각 특정 왕조의 도읍지 또는 그 가능성이 확보되었던 장소였다가 비교적 빠른 시기에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도읍지 기능의 불가항력적인 상실감에서 오는 무기력증이 장소의 종교적 의미를 획득함에 따라 점차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장소의 종교사회적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같은 종교적 장소로의 전환이었다 하더라도 승암산은 미륵신앙의 불교도량이었다면, 계룡산은 신흥종교의 메카로 그 성격이 달랐다. 또한 승암산은 비보풍수적 담론에 따라 형성되는 자연 인식 체계의 일부를 담당했던 반면, 계룡산은 명당으로서 또는 풍수도참적 이상향으로 장소의 의미가 변화되었다.
이처럼 장소의 전용 과정은 결국 두 장소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두 장소와 관련된 의미 구성의 주체세력들에 따라 그 의미는 다양하게 생산되었던 것이다. 특히, 승암산의 경우에는 왕궁(후백제 시대) → 비보풍수적 불교 도량이자 성지(고려시대) →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성지(조선 시대) → 천주교 성지 및 선교 중심지(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등으로 장소 의미가 변모했다. 결국 승암산의 종교경관을 시대를 초월해 반복적으로 구성해주었던 지리코드가 장소 관성이라고 한다면 그 코드가 전달해준 지리적 메시지는 바로 ‘성지로서의 승암산’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계룡산처럼 전국적인 차원의 종교 성지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지방적 차원의 종교 성지로서의 승암산은 앞으로도 그 장소의 의미가 계승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주시 남쪽에 위치하는 승암산 일대를 대상으로 사회문화적 주체들이 바뀜에 따라 종교경관이 재구성됨으로써 장소의 의미가 생산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사회문화의 구성원들에게 시대를 초월해 반복적으로 전달되었던 승암산 일대의 장소가 함의하고 있는 지리적 메시지가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승암산 일대는 후백제 시대의 왕궁으로부터 시작하여 고려시대의 비보풍수적 불교경관, 조선시대의 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유교경관, 그리고 일제시대 초기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천주교경관 등 그 장소적 의미가 종교사회적으로 재생산되어 왔다. 따라서 승암산 일대는 국가 권력의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이념을 반영한 종교경관의 장소로 주목받으며 되풀이되어 선택되었던 대표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현상은 장소 관성이라는 지리코드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며, 이 코드를 통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전달한 지리적 메시지는 바로 ‘승암산 일대 = 聖地’였다. 따라서 시대를 초월해 계승되어 온 성지로서의 승암산 일대는 사회문화적 주체들의 변동과 더불어 종교경관의 형태는 달랐지만, 성지라는 장소의 메시지가 동일하게 작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즉 장소 관성이라는 지리코드는 승암산 일대가 종교경관의 장소가 지속되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성지라는 메시지를 통해 사회문화적 주체들이 의도한 종교사회적 목적을 달성시켜준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종교경관의 장소들을 포함한 다른 사회문화적 맥락의 장소들도 장소 관성이라는 지리코드를 통해 해석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볼 것이다. 필요하면 다양한 지리 코드들을 동원해서라도. /<사람과 언론> 제7호(2019 겨울).
/최진성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지리교육과 졸업(박사, 2003년), 현)전주고등학교 교사, 전)김제고교·정천중·남원여고·이리공고·무주고·전주공고·한별고 교사로 재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