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론
비상계엄이 있던 그날 밤 이후로 황당하고 뜬금없는 일들이 주변에서 자주 발생하고 있다. 수많은 법꾸라지와 법비들이 들끓는 어두운 사회를 비웃기라도 하듯 항공기 참사에 이어 각종 화재·붕괴 등의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자고 나면 터지는 사고에 치솟는 물가와 환율, 나락으로 추락하는 국가 신뢰도와 끝 모를 주가 하락 등으로 서민들은 고통 속에서 연일 신음하고 있다.
1862년 발표된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소설 속 주인공인 '장발장'(Jean Valjean)이 150년이 훨씬 지나 대한민국의 탄핵 정국 사회로 호출돼 ‘냉혹한 법과 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듯하다. 가난과 배고픔, 가엾은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징역을 산 평범한 노동자의 기구한 삶과 기득권층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약자와 서민층에게는 문턱이 높은 법, 여기에다 기울어진 정의의 시대를 잘 조명한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의 주인공 '장발장'의 잦은 호출과 등장이 심상치 않다.
18세기 ‘장발장’,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 자주 '호출'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죄수'로 낙인 찍혀 누구에게는 관대하지만 누구에게는 냉혹한 종이 한 장 차이의 법 경계에 갇혀 무려 20여년간 '영어의 신세'가 된 '장발장'의 기구한 운명을 잘 그려낸 작품이 바로 '레미제라블'이다. 이미 오래 전 우리에게는 소설과 뮤지컬 등으로도 잘 알려진 이 작품의 메시지는 정의를 갈망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역과 계층, 세대를 관통하며 전달되고 있다. 그런데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사회의 빈곤과 정의, 선과 악을 다룬 작품의 주인공인 '장발장'이 21세기 우리 사회에 자주 등장하며 법과 정의의 언저리를 맴도는 이유는 뭘까?
지난해 인천에서는 신원미등록자인 60대 노숙인이 배고픔 때문에 국밥을 먹고도 밥값을 내지 않아 기소된 사건에서 검사·판사·변호인 모두가 합심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피고인을 위로한 사례가 있었다. 이른바 ‘장발장 사건’으로 지칭돼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인천지법의 한 판사는 지난해 7월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60대 노숙인 이모 씨에게 형 면제 판결을 내렸다. 형 면제 판결은 ‘범죄가 성립해 형벌권은 발생했으나 일정한 사유로 인해 판사의 재량에 따라 형벌을 부과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 이씨의 삶은 장발장보다 기구하다. 출생 때부터 부모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며, 첫 세상은 부모의 품이 아닌 보육원이었다고 한다. 부모를 비롯해 일가친척 모두가 사망하고 맡겨진 보육원도 제대로 된 시설이 아닌 낡고 허름한 곳이었다. 출생 신고부터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주민등록마저도 하지 못한 그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국민이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양육을 받지 못한 탓에 발달장애를 앓았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더구나 긴 노숙생활을 이어간 탓에 굶주림을 극복하고자 음식점에서 500원 동전을 7만원어치 훔친 혐의로 징역 1년의 실형을 받고 출소한 이씨는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또 범죄를 저질렀다. 1만원 상당의 국밥을 시키고도 밥값을 지불하지 않은 혐의(사기)로 고소 당한 이씨의 사건을 대리하게 된 국선전담변호사는 이씨가 자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의견서를 통해 지속적인 감형을 주장했고, 이 사건을 담당한 판사도 이 같은 취지에 공감해 이씨의 형을 면제해 줬다. 당시 판사는 “피해금액이 경미하고,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태에서 이뤄진 생계형 범죄”라고 이유를 밝혔다. 이를 두고 ‘전형적인 장발장 사건’이라고 법조계 안팎에서 불렀다.
'민생' 무너지면 '인권'도 무너진다

‘장발장’이 호출된 사례는 이 뿐만이 아니다. 생계 곤란 등의 이유로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 할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여사업을 진행하는 인권단체가 있다. 바로 그 단체의 명칭이 ‘장발장은행’이다. 올 2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장발장은행 10주년 기념 정책토론회'에서는 그동안 민생고가 인권을 덮치지 못하도록 노력해온 '장발장은행'이 주목을 받았다.
벌금 대신 노역을 하는 ‘환형유치’ 사례가 2022년 약 2만 6,000명에서 2023년 5만 7,000여명으로 2배 이상 급증하는 등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으로 빈곤·취약 계층이 최소한의 인권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른바 생계형 범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벌금 낼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가는 사례가 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민생이 무너지면 인권도 무너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단면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민생고가 인권마저 덮치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방파제를 만드는 일을 지난 10년간 '장발장은행'이 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같은 '장발장'의 이름을 붙인 선행 사례와 달리 전북지역에서는 최근 가뜩이나 불안하고 우울한 탄핵 정국에서 악행의 사례들이 회자됨으로써 민심을 더욱 분노케 하고 있다. 기득권층은 자신의 인맥·학맥·단체 외에 비싼 변호사 등의 도움을 받으며 법망의 테두리 안에서 본인들의 권리와 명예를 지키거나 미꾸라지처럼 교묘하게 법의 그물을 빠져나가지만 그렇지 못한 서민과 약자들은 법망의 사각지대에 놓이거나 낭떠러지로 떠밀리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함상훈 헌법재판관 후보자 지명 철회 목소리, 전북에서 유독 거센 이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대통령 몫의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한 함상훈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과거 판결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한 권한대행은 지난 8일 함상훈 후보자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이완규 법제처장을 대통령 몫의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해 공분을 사고 있다.
특히 한 권한대행이 지명한 함상훈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북지역에서 유독 거세다. 그 이유는 바로 함 후보자가 8년 전인 2017년 광주고등법원 전주재판부 민사1부 재판장이었던 시절에 내린 ‘장발장 판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지난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승객 4명이 현금으로 낸 탑승료 6,400원 중 2,4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전주지역 한 버스기사가 낸 해고 무효 소송 2심에서 회사의 손을 들어준 것이 논란이 됐다.
당시 함 판사는 버스 요금 2,400원 횡령을 두고 "주요 수입원인 요금을 횡령한 것은 직원인 운전기사와 회사 간의 신뢰 관계를 훼손하는 심각한 비위"라고 판시했다. 앞서 버스회사는 2014년 4월 이씨가 '승차요금을 횡령했다'며 해고시켰다. 그러나 이 회사를 20년 가까이 다닌 이씨는 이 일로 직장을 잃게 되자 “운전기사로 일한 17년간 한 번도 돈을 잘못 입금한 적이 없고, 성인요금을 학생요금으로 잘못 계산해 단순 실수로 2400원을 부족하게 입금했는데 해고는 과도하다”며 해고 무효 소송을 냈다.
이에 1심 재판부는 이씨의 손을 들어줬지만 2심에서 내려진 해고 판결은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당시 판결은 재벌 총수들의 횡령 사건과 대비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러한 판사를 한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하자 전북지역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법조계에서는 일시에 "반노동 판사"라는 비판에 이어 "실질적 평등이라는 헌법 가치를 실현할 수 있겠냐"며 "즉각 지명을 철회하라"고 한목소리로 촉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쓴소리와 비난은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돼 들끓고 있다. 사회적 약자에게 더 엄중한 잣대를 적용하는 판사를 다른 곳도 아닌 헌법재판관에 지명하는 행위는 여전히 우리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행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8년 전에도 “전주 버스기사의 1심 해고 무효 판결을 뒤집은 항소심 판결은 한 노동자의 생명줄을 가차 없이 끊어버린 파렴치한 판결”이란 비판이 거셌을 뿐만 아니라 “악질 자본인 시내버스 회사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전형적인 유전무죄 무전유죄 판결을 내린 사례”란 오명을 낳았다. 더욱이 당시 판결은 재벌 총수들의 횡령 사건과 대비돼 “법원이 약자에게만 가혹하게 판결한다”며 “장발장 판결”이란 비판을 받았다.
‘2,400원 해고 판결’ 앞서 ‘800원 해고 판결’도 전북에서…버스업체 손만 들어주는 판사들, 왜?

전북에서는 이 외에도 잔돈 800원 횡령으로 해임 처분을 받은 8년 차 버스 운전기사 판결 사례도 있다. 이 역시 ‘장발장 재판’이란 별칭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그 판결을 내렸던 장본인도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명한 오석준 대법관이란 점에서 예사롭지 않았다. 오 대법관은 2011년 12월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 재판장 재직 당시 전주의 버스회사 측이 내린 기사의 해임 결정이 '정당한 판단'이라고 판결했다. 그런데 11년 후 이 판결은 그의 국회 인사청문회장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으로 떠올랐다.
이 사건은 2010년 전주지역 버스기사가 400원씩 두 번에 걸쳐 버스 요금 800원을 빼돌렸다는 이유로 해고된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3년 한 검사가 사건 관계 변호사로부터 85만원어치 접대를 받아 면직 당한데 대해 “처분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면서 징계를 취소하는 판결을 내려 대조를 이뤄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다. 이 역시 전형적이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란 비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어떤 사건에서는 금액이 적어도 원칙을 꺼내 들어 단호한 처벌을 주장하다가 다른 사건에서는 처벌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논리를 전개하며 사회 통념을 꺼내 드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 대법관 후보자는 버스기사의 800원에는 엄격하고, 검사의 85만원에는 관대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대한 맹공이 이어지자 자신의 이중적인 판결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 유념하겠다'는 등의 표현으로 변명했지만 이러한 변명에 대해 당시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한 야당 국회의원은 “이 사건이 이렇게 논란이 된 이후에도 (청문회 당일까지) 버스기사가 판결 이후 어떻게 살아갔는지, 부양해야 할 자식은 몇 명인지 등에 대해 전혀 알아 본 흔적조차 없다”며 직격했다.
법은 물 흐르듯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게 만인에게 평등해야...그러나 현실은?

더구나 당시 법원 판결에 앞서 전북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는 같은 해 4월과 7월에 연달아 부당해고 판정을 내린 사건이다. 법원과 정반대의 결정이다. "해고는 가혹하다"는 판단이었다. 이 모두 전북에서 발생한 기이하고도 기구한 '장발장 재판'과 같은 재판들이다. 과연 정의란 무엇이며,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가?란 물음을 절로 던지게 한 사례들이다.
법(法)은 글자 그대로 물수(氵)자에 갈거(去)자가 합쳐진 말이다. 물이 흐르듯 가야 하고, 상식적으로 또는 이치에 맞게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법이 돈과 권력 쪽으로만 흐르거나, 법의 관대한 문이 돈과 권력 쪽으로만 열려 있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서민들은 하루하루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으니 통탄할 일 아닌가.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도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를 보면 아마 전혀 상상 못했던 상황이라며 깜짝 놀랄 것이다. 특히 800원과 2,400원 때문에 8년 또는 17년 다녔던 직장에서 해고 당한 노동자들의 현실과 그들을 판결했던 판사들의 삶을 보면서 '장발장'은 더욱 놀라 기절할 테다.
/박주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