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백승종 역사학자.
백승종 역사학자.

상속 제도가 확립돼 있었기 때문에, 부자들은 대대로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토지의 생산성이 향상될수록 그들의 재산은 더욱 빠르게 늘어났다. 17세기에는 이른바 부호에 의한 ‘겸병(兼倂)’, 즉 부자들의 사유지 확대가 사회 문제로 부상했다. 실학자 유형원은 처음부터 이 문제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겸병이 확대되자 다수의 농민이 자기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그들에게는 경제적 보상이 없었다. 소작농들은 의욕을 상실한 채 지력을 고갈시켜 결과적으로 겸병된 경작지가 차츰 황폐해졌다. 이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큰 손실이었다. 겸병을 통해 부호에게 예속된 소작농들은 부호의 권력을 이용해 군역에서 빠져나갔고, 국가의 요역과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았다. 

정전제와 경제정의 

17세기 조선 왕조는 세금감면 정책을 통해 자영농을 기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조세 감면의 실질적인 혜택은 대농장을 소유한 부호들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유형원은 토지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이 해답이라고 보았다. 모든 경작지의 소유권을 국가가 보유함으로써, 고대 유가의 이상인 정전제를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정전제란 일정한 규모의 토지를 9개로 구획해 그중 8개는 농부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중앙의 1개는 국가 몫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맹자’도 이상으로 삼았던 고대의 토지제도였다. 유형원의 개혁 사상을 계승한 이는 실학자 이익이었다. 그는 정전제의 이상은 당대의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익은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이미 방대한 경작지를 독점하고 있는 부호들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점진적으로 경제정의를 구현할 방법이 무엇인지 궁리했다.

이익의 생각은 영업전(永業田)에 미쳤다. 농가가 자립적으로 생활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해, 거래를 금지함으로써 점차 자영농을 기르자는 것이었다. 또 겸병으로 비대해진 부호의 농장은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분할되도록 유도해 여러 대가 지나면 저절로 해체되는 방법을 쓰자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박지원과 정약용 등 조선 후기의 여러 실학자가 부의 집중을 막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대다수 농민을 구제할 방안을 다각적으로 연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견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 가지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부와 가난의 대물림 

첫째, 실학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법적으로 보장된 조선의 상속 제도 자체를 인위적으로 변경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속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부의 집중을 완화할 방법을 찾았다. 둘째, 소작농 또는 빈농층의 경제적 자립을 핵심 과제로 인식했다. 요즘말로 ‘중산층 육성’이 국가의 과제라고 보았다. 

물론 조선의 지배층은 이러한 실학자들의 주장을 잘 알고 있었다. 영조와 정조를 비롯해 역대 국왕들도 부의 과도한 집중으로 생기는 문제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현대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부와 가난의 대물림, 부동산 폭리 등의 문제도 본질은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세금을 매기면 될 일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부자들의 앙심이 무서워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러고서야 백년하청(百年河淸, 아무리 기다려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이 아닌가.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저작권자 © 전북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