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나이는 젊어도 손화중은 누구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태를 인식하였다. 그는 혁명의 열기에 들떠 국내 정세를 오판하는 일이 없었다고 본다. 고종 30년(1894) 8월 25일에 그의 동지 김개남은 남원에서 전라 좌도의 동학농민군을 7만 명이나 모아놓고 군중대회를 열었다.
장차 남원을 거점 삼아서 전면적인 제2차 봉기를 꿈꾸었던 것인데, 전봉준은 이를 반대하였다. 손화중도 마찬가지로 반대하였다. 그는 남원으로 달려가서 이렇게 말했다.
"높은 선비도 기꺼이 뜻을 모아 함께 하는 혁명이 소원"
“우리가 일어선지 반년이 되었다. 전라도가 모두 호응하고 있지만 명망 있는 사족(士族)이 지지하지 않고, 부유한 백성이 응원하지 않으며, 학식이 높은 선비도 찬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가 접장(接長)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리석고 천박하다. 그들은 화(禍)를 즐기며 표절(剽竊, 남을 겁박하여 물건을 훔침)을 일삼고 있으니, 인심이 어찌 될는지 모르겠다.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황현(黃玹)의 「(오하기문)梧下記聞」(『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 제1권, 210-211쪽) 참고)
동학 지도층의 자기 반성이 담긴, 뼈 아픈 분석이었다. 손화중의 말을 헤아려 보면, 그가 동학농민 혁명을 통해서 이루고자 한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명망있는 사족도 함께 하는 혁명, 부유한 백성도 응원하는 혁명, 지식이 높은 선비도 기꺼이 뜻을 모아 함께 하는 혁명이 소원이었다. 접장이 유능하고 현명하며, 남을 겁주지 않고 평화롭게 함께 사는 세상이 와야만 하였다.
그런 점에서 손화중이 동학농민혁명을 하나의 총체적인 ‘문화운동’으로 보았다고 생한다. 그것을 필자는 ‘문화운동’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가르침은 하늘이 하늘을 돕고 보살피는 것을 당연한 일로 만들었다.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이치가 실천되는 세상을, 손화중은 꿈꾸었다고 하겠다.
가진 사람과 없어서 못사는 사람, 무식한 사람과 유식한 사람, 명망이 있는 집안 사람이 내세울 것이 조금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과 서로 어울려 기쁘게 사는 공동체를 추구하였다고 본다. 이것이 새로운 문화운동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가진 사람[有]과 가지지 못한 사람[無]이 서로서로[相] 도우며 산다[資]는 것은, 모두가 상생(相生)함을 뜻하였다.
동학의 큰 스승들은 낡은 세상의 질서는 인간을 공멸로 이끄는 잘못된 체제라고 보았다. 그와는 반대로 장차 밝아올 새 세상은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어야겠다고 믿었다. 그러려면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모두 없애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를 인격적으로, 기능적으로 보완하자는 것이었다. 모두가 어깨를 펴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새 세상을 개척하는 동학농민의 혁명은 그런 것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구어낸 귀중한 성과
손화중은 그런 믿음을 가졌기에,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현실에 관하여 깊은 우려와 불만을 쏟아냈다고 볼 수 있다.어엿이 현존하는 빈부의 차이를 단번에 완전히 제거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손화중은 농지의 평균분배와 같은 급진적 혁명과는 좀 거리를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장에 토지를 분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공존하는 것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동학농민의 삶에는 실제로도 상호 존중의 태도가 뚜렷히 나타났다. 교도끼리는 서로를 높여서 ‘접장(接長)’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노비와 주인이 함께 입도하면 서로를 접장이라고 부르며, 마치 벗들이 서로 사귀기라도 하는 모습”(황현의 『번역 오하기문』(129쪽)을 참고)이었다는 증언도 보인다. 신분의 귀천 때문에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그 때문에 사회적 약자들이 동학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가진 이와 없는 이들이 서로서로 돕기(‘유무상자’)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기뻐한다.” (구한말에 작성한 「도남서원(道南書院, 상주) 통문(通文)」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는 사회적 현상은 동학농민혁명이 일구어낸 귀중한 성과였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