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쪽소리'라고 불렀던 도토리를 아는가? 가을이 물씬 무르익은 아침녘이면 온 동네가 부산했다. 아이들은 학교를 가고 마을 어른들이 산으로 들어가기 때문인데, 그때가 도토리를 따기가 가장 좋은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만 해도 부모님과 삼촌 고모 그리고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까지 총 출동되어 산으로 들어갔다.
그런 날이면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와 어른들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은 왜 그리 길기만 할까? 어둠이 슬슬 마을에 내릴 무렵 지게에 가득 짊어지고 머리에 이고 온 보따리를 마당 가운데 펴놓은 멍석에 내려놓고 하나씩 푼다. 아! 지금도 그 기억 속의 도토리, 쪽소리, 상수리의 그 푸르고 누르던 빛깔, 마치 황금알이 쏟아져 나오듯 그 속에서 내 눈에 띄는 것은 다래와 머루 그리고 으름들 속에 오미자도 더러 보였다.

모양은 머루 같지만, 새빨간 그 열매는 다섯 가지 맛을 낸다고 해서 오미자라고 불렀지만, 입에 들어가는 순간 어찌나 시던지, 눈이 사르르르 감기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모과와 비슷한 새파란 배, 독배라 불리는 돌배였다.
겉은 모과처럼 무지막지하게 단단하지만 그 속은 그렇게 신맛과 단맛이 조화된 것이 없을 듯 싶은 그 배 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따온 도토리는 묵을 쑤어 먹기도 했지만 시장에 나가 팔기도 하고 솥내라고 불리던 송정마을의 옹기점에 가서 옹기와 바꾸어 오기도 하였다. 그 담당이 우리 어머니였다.

도토리묵을 쑤어 열두어 개의 묵을 넓은 그릇 뚜껑에 담아 이고 가는 그 길은 장장 시오리 남짓했다. 그곳에 가서 묵을 주면 옹기점에선 잘 만들어진 완성품이 아니고 조금은 비뚤어진 못난 옹기그릇을 머리에 이고 갈수 있을 만큼 주는 것이었다. 그 그릇을 이고 다시 오는 시오리 길, 그렇게 서너 번 해서 장독대의 빈 도가지들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도토리는 묵을 쑨 뒤 시장에 가서 팔아 생필품으로 바꿔오기도 했지만 더 긴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부족한 쌀을 대용하기도 했다. 도토리를 잘 말려서 절구통에 넣고 찧어서 잘게 부순 뒤 물에 며칠씩 불려 그 향을 우려낸다. 그렇게 우려내면 도토리만이 지닌 그 특유의 향이 어느 정도는 사라진다. 그 불린 도토리에다 쌀을 조금 넣고 지은 밥이 이름 그대로 도토리 밥이다. 동생은 아직 어리니까 쌀을 많이 넣은 밥을 주고 나부터는 공평하게 도토리 밥을 주었다.

“개밥의 도토리라"는 말, 그 말처럼 아무리 먹어도 밥 그릇에서 줄어들지 않고 남아 있던 도토리, 도토리가 아닌 쌀만 넣은 고봉밥을 언제나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바라보았던 그 밥, 지금도 도토리만 생각하면 도토리의 그 특유의 향이 내 입안을 확 휘젓고 지나간다. 그 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나는 도토리밥을 먹지 않는다. 결혼 초에 아내는 도토리묵을 잘 안 먹는 내게 가끔씩 물었다.
“왜 건강에 좋은 도토리묵을 안 먹어?“
달리 할 말이 없는 나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갔고, 나는 또 그 비좁고 습기 찬 문간을 지나야 했다.”라고 노래한 이성복 시인의 <세월에 대하여>라는 시 구절처럼 세월은 그렇게 내 앞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나갔다.

그리고 그 때 그 시절을 부끄러움 없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 뒤였다. 구룡령을 걷다가 길에서 발견한 쪽소리, 이렇게 추억들이 길가에 떨어져 있구나. 그러고 보면 나는 추억을 수집하러 다니는 골동 수집가인가?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