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구의 '생각 줍기'

도(道)와 깨달음(覺) 그리고 죽지 않고 사는 삶에 관심이 많은 분과 의견을 교환하다보니 옛 성현들께서는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살다가 가셨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 봅니다. 그런데 유사 이래로 돈 많은 부자나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나 다 죽었고, 또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도 모두 육체적인 죽음을 피한 사람은 없는 거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게 죽음인 셈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인간들은 육체적인 인간과 다른 영혼이라는 정신적인 인간을 가정하여 영혼만은 영생의 삶을 살고자 했던 거 같습니다. 장자는 죽음을 미워함은 고향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인간은 죽어서 모두 극락이나 천당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극락이나 천당에 가라고 하면 가지 않고 현생에서 복락을 천수까지 다 누리고 그때서야 가려는 게 인간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살면서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하여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우스갯소리로 대부분 병원 분만실에서 나와서 다시 병원 영안실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1,400년전 화엄학의 대가 의상대사께서 말씀하신 “行行到處(행행도처)요, 至至發處(지지발처)"라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으로 돌아갔으니 결국 우리의 인생이란 것도 ”걷고 걸어도 그 자리, 가도 가도 떠난 그 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간다간다 했지만 가서 보니 본래 그 자리요(行行本處), 왔다왔다 했지만 와서 보니 바로 떠난 그 자리(至至發處)라는 겁니다. 옛날부터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신(神)을 내세워서 종교를 만들기도 하고, 또는 죽음의 문제를 깨달음으로 해결하려는 종교가 생겼는가 하면, 어느 종교에서는 늙지 않고 오래살기 위하여 장생술(長生術)을 개발한 종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도교에서는 죽지 않기 위해 불로초(不老草)를 찾아 나서기도 하며, 또는 기운을 닦는다고 ‘탄하복기(呑霞服氣)’라는 “노을을 머금고, 해와 달의 기운을 단전에 모으는 방법”을 썼어도 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아쉽게도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죽지 않은 분은 없는 거 같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예수님처럼 부활(復活)하여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분들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모두 하늘나라에 올라가 영생을 얻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제가 본 책자 중에는 “죽음이란 하나님의 뜻이며 죽으면 무덤에서 썩고 영혼이 하늘나라로 간다는 어리석은 지혜를 참 지혜인 것처럼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글귀가 눈에 띕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영혼이나 불러올리는 염라대왕이 아니라니 영생을 얻고자 하시는 분들은 제대로 믿어서 부활의 과정을 거쳐 하늘나라로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자님은 제자가 죽음에 대하여 묻자 "삶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현생의 삶을 바르게 살면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류역사상 생로병사의 문제에 대하여 가장 깊이 고민하신 분이 부처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왕자의 자리도 버리고 출가하시게 된 동기가 바로 고통을 없애고,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하여 도를 닦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결국 8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죽음의 문제를 죽지 않는 것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없음"을 깨달음으로 해결을 하신 겁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인데 깨달음으로 보면 죽는 그대로가 죽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 깨닫지 못하여 이런 심오한 도의 경지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꿈인 줄 알고 그 꿈에서 깨고 나면 나고 죽는 것도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라는데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행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은 것이랍니다. 장자에 나오는 나비의 꿈인 호접몽(胡蝶夢)과 비슷한 이야기 같습니다.
호접몽(胡蝶夢)에 보면 우리네 인생살이는 일장춘몽이며, 우리가 "나비의 꿈이 나의 꿈이며, 나의 꿈이 나비의 꿈이 되는" 차별 없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현상을 체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역학에서 얘기하는 선천이네 후천개벽이네 하는 것은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거라기보다는 죽음을 연장하는 수준으로 도(道)를 닦는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깨달음(覺)의 측면에서 공사상(空思想)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는 겁니다.
신흥종교의 대가이신 이강오 선생이 쓰신 ‘한국신흥종교총람’에 보면 “세상에 나보다 더 많은 도인(道人)을 만나본 사람은 없을 거요. 내놓으라는 도인이 있단 말만 들으면 어디고 찾아가서 만나보았소,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모두가 거짓말쟁이였소.”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신흥종교단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교주들을 직접 만났는데 자신들이 말세의 구세주나 재림예수 또는 미륵불이나 최수운의 환생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하며 같이 사진까지 촬영한 사람만 200여명에 이르는데 나이가 드니 다 죽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황당무계하고 허황된 교리로 많은 교인들을 속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강오 선생은 대학에서 종교를 학문으로 연구했던 학자이셨고, 종교는 학문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니 어느 종교가 됐던 신심(信心)을 갖고 열심히 믿는 게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또한 육십이 넘은 분들에게는 죽음을 철학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세상을 잘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글·사진=이화구(CPA 국제공인회계사·임실문협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