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로마에서는 로마인들이 하는 대로 하라.”

이 서양 격언을 언제 처음 들었는가? 아마도 중학교 시절 영어 공부 시간이었다고 답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Do in Rome as the Romans do”라는 영어 문장을 열심히 외웠던 사람이라면 말이다. 관습의 중요성을 말한 이 격언의 기원은 초대 기독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가 서기 383년 아프리카에서 로마로 이사해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로마의 기독교도들이 토요일에 금식을 하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밀라노에 철학교수 자리를 얻어 이사한 뒤 밀라노 사람들은 토요일에 금식을 하지 않는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런 궁금증에 대해 밀라노의 주교인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어스(Aurelius Ambrosius, 340–397)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게 이 격언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식으로 살고, 다른 곳에 가면 그곳 사람들이 사는 식으로 사는 법이다.” 

습관과 관습 

누구나 다 인정하겠지만, 습관은 독재자다. 이성적으론 자신의 어떤 습관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느낀 사람일지라도 그걸 바꾸는 건 정말 어렵다. “습관이 관습이 되었고, 관습이 법칙이 되었고, 법칙이 사회조직의 조절 장치이자 도덕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습관은 개인적인 것인 반면, 관습은 사회적인 것이다. 습관이 모여 관습이 된다. ‘습관의 독재’처럼 ‘관습의 독재’ 역시 우리를 지배하는 굴레이지만, 관습은 습관에 비해 비교적 더 긍정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아마도 사회의 안정성을 중요하게 여긴 동시에 개인이 그걸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관습은 인생의 최고 지도자다”고 했고,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관습은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지침이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관습에 도전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건 아니다. 영국 역사가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1608~1661)는 “관습은 현명한 사람에겐 재앙이요 어리석은 사람에겐 우상이다”고 했고, 프랑스 계몽 사상가 장 작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사회적 관습의 위력에서 아이의 창의성과 용기를 보호하라”고 외쳤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자유론](1859)에서 “관습의 전제(專制)가 곳곳에서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로 등장하면서, 관습보다 더 나은 것을 지향하는 기질을 끊임없이 박해하고 있다”고 했다. 밀은 “지금 이 시대에서는 획일성을 거부하는 파격, 그리고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인류에게 크게 봉사하는 셈이 된다”며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에는 무언가 남과 다른 것을 일절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여론의 전제(專制)가 심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색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그러한 전제를 부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강한 성격이 충만할 때 거기에서 남다른 개성이 꽃핀다. 그리고 한 사회 속에서 남다른 개성이 자유롭게 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그 사회가 보여주는 탁월한 재능과 정신적 활력 그리고 도덕적 용기와 비례한다.”

좋은 관습과 나쁜 관습

 미국은 영국에 비해 관습에 대한 존중심이 약했던 신생국가였지만, ‘관습의 독재’에 대해선 유럽 못지 않게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미국 역사가이자 언어학자인 존 러셀 바트렛(John Russell Bartlett, 1805-1886)은 “관습을 세상을 지배한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과 행동양식의 압제자이며 폭군처럼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이다”고 했고, 미국 정치인 로버트 그린 잉거솔(Robert Green Ingersoll, 1833~1899)은 “관습은 요람에서부터 시작돼 무덤에 가서야 우리를 놓아준다”고 했다. 

관습의 독재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는 가끔 산발적으로 나오긴 했지만, 이마저 세상을 폭군처럼 다스리는 관습의 힘에 대한 증언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관습을 어기는 건 사회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로 인한 불이익은 매우 컸다. 그래서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비인습적으로 성공하는 것보다 인습적으로 실패하는 편이 더 나은 평판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1960년대의 반문화(counter culture) 운동은 관습에 대한 대대적인 도전이었다. 이 운동을 지지한 사람들은 기존 관습을 미심쩍게 여겼으며, 이런 관습이 사람들 사이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이고 친밀한 만남을 억압한다고 해석했다. 이런 생각과 운동이 미친 영향을 사회학적으로 다룬 책이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 1943-)의 [공적 인간의 몰락](1977)이다.

공적 인간은 공적 영역에서 정해진 관습에 따라 행동하던, 옛 금기문화에서 살던 사람들을 말한다. 공적 인간은 다른 사람 앞에서 감정을 내보이며 진정성 있게 행동하기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는 가면을 쓴다. 그런데 감성과 진정성을 좇는 현대 사회에서는 친밀함의 과대평가로 인한 ‘친밀함의 독재(tyranny of intimacy)’ 현상이 일어나면서 이런 공손한 사회적 관습이 사라져 가고 있다. 가면을 쓰는 것이 정중함의 본질임에도 가면을 쓰는 행동은 진실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행동이라고 오해하는 일이 벌어진 탓이다.

습관의 경우처럼, 어떤 관습이냐가 중요한 문제일 게다. 나쁜 관습도 있고, 좋은 관습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떤 관습이 좋으냐 나쁘냐를 판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을 불러오곤 했으며, 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관습을 대상으로 한 투쟁은 계속될지라도,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에서 세상을 폭군처럼 다스리는 게 여전히 관습이라는 걸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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