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구의 '생각 줍기'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난 여름날의 찌는 듯한 무더위도 사라지고 이제는 시원한 바람의 계절 가을입니다. 도시는 고층빌딩과 성냥갑 같은 아파트 숲, 지나는 많은 사람들, 아스팔트에서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수많은 차량들로 인하여 삭막해 보일지 몰라도 도심을 조금만 빗겨나면 자연 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곳임을 일깨워주는 거 같습니다.
점심을 먹고 사는 곳 인근 야산을 넘어 도심 외곽으로 나가보니 자연 속에서 피는 꽃들의 세상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자연에 피는 같은 꽃이라도, 봄꽃은 봄빛을 닮아 화사하고, 여름꽃은 태양만큼이나 강렬한 화려함이 묻어나는 반면, 가을꽃에는 화사한 봄꽃이나 정열적인 여름꽃과는 달리 수수함이 배어있어 차분한 기운을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제일 먼저 마주한 해바라기는 가을이 되자 지난 여름날의 작열하는 태양의 뜨거운 햇살에 눌려 이제는 지쳤는지 고개를 떨구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여름 노란꽃을 활짝 피웠던 호박꽃도 호박을 노랗게 익히느라 힘겨웠는지 이제는 꽃을 접으며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피는 꽃들 중에 호박꽃만큼 푸대접을 받은 꽃도 없을 겁니다. 흔히 예쁘지 않은 여성에게 “호박꽃도 꽃이냐!”며 멀쩡한 호박꽃을 못생긴 여성에 비유하며 비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양적인 측면에서 호박은 잎, 줄기, 씨 등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영양분이 풍부한 식품으로 건강효과도 뛰어나 각광을 받고 있으며 항암효과에도 뛰어납니다.

비록 호박꽃이 양귀비나 장미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양귀비처럼 나쁜 약의 원료로 쓰여 사람을 마약중독에 빠트리거나 장미처럼 가시로 사람을 찔러 상처를 주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호박꽃도 자세히 바라보면 노랗고 예쁜 게 다른 꽃들 못지 않습니다.
만일 호박잎이나 줄기, 호박이 맛이 없어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호박꽃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연인들의 세레나데를 상징하는 꽃으로 인기를 누렸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영양가가 많아 인간들에게 식용으로 애용되다 보니 오히려 이기고도 진 승자의 저주처럼 역차별을 당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겁니다.

또한 연못 속에서 지난 여름 예쁜 꽃을 피웠던 연꽃도 이제는 꽃을 지우고 연인인 부들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거 같습니다. 예로부터 땅위에서 자라는 소나무나 대나무가 절개를 상징하는 남성으로 표현한다면 부드러운 버들잎이나 예쁜 매화는 여성을 상징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이나 동물에만 음양의 조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나 나무, 꽃 등 자연 속에서도 음양의 조화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연못에 연꽃만 심는 게 아니라 부들과 함께 심었습니다. 음양의 조화를 살린 겁니다.

연못 속에도 핫도그 모양의 부들은 아름다운 연꽃과 함께하며 음양의 조화를 맞춘 셈입니다 이렇게 잎이 부들부들한 부들과 아름다운 연꽃을 같이 심게 된 것은 중국의 고전 시경(詩經)에서 유래하였으며, 시경에서는 같은 연못 속에 사는 부들을 남성에, 그리고 연꽃을 여성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울밑에서 처량하게 서있던 봉선화는 이제 세상이 변하면서 산업화와 함께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어여쁜 꽃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꽃이 되었습니다.

숲에서는 아직은 조금 이르지만 밤송이들은 입을 벌리기 시작하였고, 갈가에선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며 이렇게 가을은 무르익어 가는 거 같습니다. 가을이 사뭇 반겨지는 것은 신선한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앞으로 찬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오색 단풍의 향연은 무심한 우리들의 마음까지 설레게 만들 겁니다.
오늘 지금은 우리에게 다시 오지도, 다시 올 수도 없는 우리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입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후회 없는 삶의 열매를 알알이 채워가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사진=이화구(CPA 국제공인회계사·임실문협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