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정유년(선조 30년, 1597) 7월에 있었던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전투가 있었어요.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전이었습니다. 우리가 ‘칠천량 해전’이라고 알고 있는 싸움입니다. 원균 장군에게 패장(敗將)이란 불명예가 뒤집어 씌워진 사건이었지요. 이 해전에 관하여 여러 말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제가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도 대개는 여러분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는 원균 장군이 무능하고 비겁해서 그렇게 큰 실패를 하였다며, 이순신 장군이라면 절대로 이런 일이 없었다는 추측성 비난이고요. 또 하나는 권율 도원수 책임론입니다. 수륙병진(水陸竝進, 수군과 육군의 연합 진출)이 아니면 전투를 벌여보았자 손해만 본다는 원균 장군의 평소 지론을 권율이 무리하게 꺾어버렸기 때문에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즉, 이순신이라면 그래도 이겼을 것이라는 추측은 하나의 소망 사항일 뿐입니다. 비현실적인 가정으로 원균 장군을 비방하다니요. 이런 주장은 검증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서 거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세종 대왕이 지금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면’과 같은 반(反)역사적 가정법이니까요.
두 번째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권율 도원수는 직권을 남용하였다고 볼 수 있어요. 수군의 사정을 도외시한 무리한 강요로, 통제사 원균 장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니 책임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과연 권율의 강요로 원균 장군은 무리한 출격을 감행하였을까요? 이 역시 충분히 검증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릅니다. 권율은 정말로 원 장군에게 곤장을 치면서까지 왜적 토벌을 요구하였을까요?
제가 존경하는 조선 후기의 역사가 한치윤은 이 문제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해동역사>> 제63권에서 <정유재란>에 관한 대목을 읽다가 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한치윤은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위대한 역사가였어요. 그는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사료까지도 두루 섭렵하였습니다. 생각이 정치(精緻, 정교하고 치밀함)하기로 따를 자가 없었어요.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칠천량 전투의 패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이때는 주사(舟師, 수군)가 (전쟁에) 편리하였고 보병과 기병이 불편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수영(水營)의 장관(將官, 통제사)인 원균(元均)이 한산도(閑山島)에 있으면서 몰래 거병하기로 모의하여, 중국 군사와 만나서 부산에 있는 왜적의 소굴을 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김응서(金應瑞)가 의령(宜寧)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육로(陸路)에서 허세를 부리다가, 원균이 중국 군사와 함께 (왜적의) 소굴을 유린하기로 약속한 날짜를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누설하였다.
소서행장은 남원을 공격하려고 준비하면서 (행여) 원균이 자신의 뒤를 습격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던 참이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서 속으로 계략을 꾸몄다. 풍무수(豐茂守) 등을 파견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원균의 수군을 습격하게 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왜군이) 한산도를 빼앗았다.
한산도가 함락되자 서울 서쪽의 바닷길에 왜적이 통행하지 못할 곳이 없어졌다. 이에 왜적들이 수로와 육로로 한꺼번에 나왔다. 왜선이 2, 3일도 지나지 않아 광양(光陽)의 두치진(豆耻津)에 정박하였는데, 두치진은 남원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또, 부산과 서산(西山)의 왜적들이 또 경상우로(慶尙右路)를 통해서 모두 남원으로 몰려들었다.
권율(權慄)과 이원익(李元翼) 등은 군사 형편상 이들을 막을 수가 없어,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왜적은 더욱더 거리낌 없이 멋대로 날뛰었다.
양원(楊元)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8월 10일에 우선 가정(家丁)을 시켜서 짐꾸러미 두 상자를 평양으로 실어 보냈다. - 평양과 남원은 1000여 리 거리인데 그 사이에는 대동강(大同江), 한강(漢江), 금강(錦江) 등 여러 강이 있다.”

짐작하건대 한치윤은 이런 내용을 중국측 기록에서 찾은 것 같습니다. 제가 인용한 글의 마지막에 중국 장수 양원(楊元)이 나옵니다. 그가 가솔(家率)을 보내 평양으로 후퇴할 준비를 하였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양원 또는 그의 측근이 쓴 기록일 것으로 짐작합니다.
명나라 장수들이 보기에, 칠천량의 패전은 일차적으로 김응서에게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가 중요 정보를 누설하였기 때문입니다. 원균 장군은 그때 명나라 측과 “수륙병진”을 약속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민감한 정보였습니다. 그런데 김응서가 그 비밀첩보를 적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군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원균 장군만 출동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일본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우리 쪽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대 작전을 구상하였습니다. 적은 헛되이 시간을 소모하고 기지로 귀항(歸港)하는 원균 장군의 부대를 후미에서 습격하여 큰 성과를 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우리 수군은 패배를 떠안았습니다. 원균 장군은 끝까지 싸우다 순국하였고요.
지금까지 칠천량 해전을 논의한 글은 많아요.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한치윤의 위와 같은 기록을 인용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알고서 그랬는지 모르고서 그랬는지는, 제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한치윤의 <<해동역사>>를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비사(祕史) !
괄호열구 굳이 한자루 써놓기 까지 하셨길레, 증말루 뭔가 비밀스런 기 있나부다 하구, 부푼 가슴에 기대하구 열심히 읽어 봤네여.
근디... ...
아~ 짜증
백승종 필사 슨상님.
와 구라시나여?
해동역사에 이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져서 원균 옹호론자덜에 단골 메뉴자나여.
더군다나 다른 사료들과는 전혀 교차검증이 안된다구 이미 판정이 난 내용이자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