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한국에선 열등감이 없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판검사, 의사, 교수도 예외가 아니다. 끝없는 경쟁의 수직적 위계 속에서 언제나 누군가가 ‘내 위에’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오만과 모멸의 구조’(김우창)는 바로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김누리(1960-)가 '경쟁, 야만의 다른 이름'이라는 제목의 <한겨레>(2018년 9월 10일) 칼럼에서 한 말이다. 그는 “지구상 어디에도 우리처럼 가혹한 경쟁이 어린 학생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곳은 없다”고 개탄한다. 

한국과 독일의 '경쟁' 

김누리는 2020년 3월에 출간한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라는 책에서도 “저는 ‘경쟁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국도 독일처럼 학교에서 경쟁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얼마 전엔 어느 신문 칼럼을 통해 대학입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상당히 많은 비난성 댓글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먹물, 현실성 없는 꿈만 꾸는 이상주의자라는 식의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경쟁 교육을 하지 않는 것, 대학입시를 폐지하는 것은 사실 비현실적인 구상도, 이상적인 꿈도 아닙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그런 정신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입시 제도가 시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누리의 선의와 취지엔 동의할 뿐만 아니라 경의를 표하면서도 나 역시 그가 ‘이상주의자’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부정적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다.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는 공존해야 할 가치이지, 어떤 게 더 우월하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나는 그가 독일을 너무 좋게만 보면서 한국을 필요 이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1989년 4월에 독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독일에서 만난 것은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건 엄청난 충격이었지요. ‘내가 바라보던 하늘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제가 우리 사회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아마도 이때부터인 것 같습니다....오랫동안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많은 것들이, 그러나 우리가 마치 ‘자연의 이치’인 양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것들이, 독일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의 경쟁도, 등수도 없었고, 죽도록 매달리는 대학 입학시험도, 학비도, 서열도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존재하지 않지요.”

김누리는 ‘경쟁’을 보는 독일 정치인과 한국 정치인의 시각 차이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한국 정치인 중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경쟁력’을 말합니다. 국가 경쟁력, 기업 경쟁력, 교육 경쟁력 등 온통 외치는 것이 경쟁력입니다. 그런데 독일 정치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 정의’를 중시하고, 사회적 정의를 이루기 위한 경쟁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지요.”

다르긴 하지만, 그 이유가 거쳐가야 할 과정을 누가 더 빨리 졸업했느냐의 차이로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과연 독일 사회가 김누리가 말하는 것처럼 경쟁의 무풍지대인지도 의문이다. 한국보다 경쟁이 덜 치열하다고 말하는 게 더 옳지 않을까? 스위스 경제학자 마티아스 빈스방거(Mathias Binswanger, 1962-)의 [죽은 경제학자의 망할 아이디어](2010)라는 책에 따르면, 독일 역시 과도한 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빈스방거에 따르면, 경쟁 이데올로기가 만연하기 직전인 1985년만 해도 독일의 학술위원회는 “경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혔지만, 이제 독일의 대학과 연구소들은 이 말을 까맣게 잊은 채 경쟁력 향상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무엇으로 경쟁하는지, 왜 경쟁하는지는 따지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합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사람들은 내용을 점점 더 소홀히 하게 된다. 경쟁력만 높일 수 있으면 무엇을 생산하든, 무엇을 연구하든 상관없다. 형식이 내용을 몰아내고, 누구도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오직 경쟁에서 이기는 요인만이 인정받는다. 그리하여 지수로 평가할 수 없는 일의 질을 높이는데 꼭 필요한 많은 자질들이 죽어버리고, 아울러 학문, 교육 등의 분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성공의 진정한 효용가치도 떨어진다.” 

경쟁을 전면 부정하기 보다는...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2007년 12월 28일자는 “전 세계가 동참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최고의 유망주를 발굴해야 하고, 그들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훈련시켜야 한다”며 “그 어디에도 경쟁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성적시장에서도, 유망주시장에서도”라고 역설했다는 것도 밝혀두기로 하자. 

“아이들은 경쟁을 해야 하지만, 경쟁적인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학교는 겉으로는 협력을 ‘증진’하고, 은밀하게는 경쟁을 ‘묵인’함으로써 이러한 딜레마에 대처한다.” 미국 사회학자 존 실리(John R. Seeley, 1913-2007)가 1956년에 한 말이다. 나는 김누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일에서 겉으로 잘 드러나는 그런 ‘증진’의 모습에만 주목했던 게 아닌가 싶다.

영국 저널리스트 다니엘 튜더(Daniel Tudor, 1982-)는 '한국: 있을 수 없는 나라(Korea: The Impossible Country)'(2012)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는데,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2013)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이 책의 핵심 주장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건 바로 “한국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마침내 우뚝 서게 한 그 경쟁의 힘이, 오늘날 한국인을 괴롭히는 심리적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쟁을 전면 부정하기보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원리에 부합하는 선에서 인정하는 타협을 해보는 건 어떨까? 행여 정답이나 모범답안을 찾지는 말자. <시사인>의 2019년 조사에서 “경쟁은 개인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라는 설문에 대해 20대 남자의 60.8%가 동의한 반면 20대 여자는 47.6%만 동의했다. 이 조사 결과가 시사하듯이, 경쟁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공존케 하는 게 어떨까 싶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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