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18세기 이후 전국 어디서나 유명한 양반들이 경쟁적으로 서당(書堂)을 지었다. 그중에는 규모가 번듯하고, 장서도 넉넉히 갖춘 곳도 많았다. 조선 후기 서당의 기능과 규모를 통틀어서 말하기는 곤란하다. 관련된 통계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어 주목하게 된다. 곳곳에 서당이 들어섬에 따라 선비 집안의 청소년뿐만 아니라 중류층의 청소년들도 교육 혜택을 골고루 입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성리학적 지식은 지배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전국의 여러 서당 가운데서도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대구의 농연서당(聾淵書堂)이었다. 1766년(영조 42), 영남의 큰선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농연서당의 유래를 서술했다. 「농연서당기(聾淵書堂記)」인데, 그 글에 따르면 17세기 중반에 최씨 집안의 조상인 최동집(崔東㠎)이 서당을 세웠다. 최동집은 효종(봉림대군)이 왕자 시절 스승이었고, 1640년(인조 18)에는 봉림대군을 모시고 심양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향리로 물러났다. 그는 마을에서 강학(講學)에 힘썼고, 사람들은 그를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불렀다.

세월이 흐르자 그 서당이 퇴락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심은 최동집의 5대손 최흥원(崔興遠)이었다. 그가 이 서당을 중건하였다(1754년, 영조 30) 새로 지은농연서당은 모두 세 칸이었다. 동쪽 두 칸은 (공부하는) 방으로 만들어 ‘세심재(洗心齋)’라 하였고, 서쪽 한 칸은 마루를 놓아 ‘탁청헌(濯淸軒)’이라 불렀다. 그 뒤편에 몇 개의 기둥을 세워 절간의 승방처럼 따로 공간을 만들었다.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화단을 꾸며 국화를 심었다. 매화, 대나무, 모란, 해당화와 여러 가지 기이한 화초도 심었다.

이상정은 농연서당을 재건한 최흥원과 평소 가까운 사이였다. 이상정은 최씨 일가의 자제들이 장차 이 서당에서 ‘명성(明誠)’ 공부에 힘써, ‘지행(知行)’이 모두 진보하기를 기원했다. 그들의 존양(存養)과 성찰(省察) 공부가 효과를 발휘하기를 바랐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명성’인데, 본래는 『중용』에 나오는 것이다. “밝으면 성실해진다(明則誠)”는 뜻이다.

조선에서는 일두 정여창이 가장 강조한 개념이었다. 최씨의 선조는 정여창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고 한다. 농연서당을 통해 최동집의 자손이 대대로 정여창의 학문적 이상을 계승하고 성리학의 정수를 체득하기를, 이상정은 소망하였다.

이상정의 문집을 읽어보면, 18세기 후반 경상도 각지에 서당 건립의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가령 영양에는 월록서당(현재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이 들어섰고, 안동에도 모산서당이 자리를 잡았다. 이상정은 「모산서당기(茅山書堂記)」에서 서당 공부의 목적과 방향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혀놓았다.

“과거시험 공부는 학자가 정신을 쏟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 국가가 인재를 뽑는 방법이 이 한 길뿐이지 않은가. 완급과 선후의 분별을 잘 살펴서 과거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 하찮은 외부의 욕망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작은 유혹 때문에 소중한 것을 변치 않을 수만 있다면, 과거시험 준비에 매달리더라도 선비들 자신에게는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당이라면 초보적인 문리(文理)나 깨치는 곳쯤으로 지레짐작한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단정할 일이 아니었다. 서당의 수준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모산서당처럼 과거시험 공부를 위주로 한 곳도 있었고, 농연서당과 같이 심오한 성리 철학의 이치를 탐구하는 곳도 있었다. 서당의 학문적 위상과 시설 규모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심지어 서당 중에는 당쟁의 전초기지가 된 곳 있었다. 홍여하의 산양서당(山陽書堂)과 박세채의 남계서당(南溪書堂)이 그러했다. 조정의 당파 싸움이 심해지자 각 당파는 지방에 정치적 발판을 구축하려고 애썼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개의 정치적 서당이 건립되었다. 서당은 곧 당파의 소굴이기도 했다.

홍여하의 문집 『목재집(木齋集)』을 읽어 내려가다, 그가 산양서당의 유생들을 대신하여 지은 「산양서당에 사당을 세우면서 관청에 보낸 글(山陽書堂立社呈文)」이라는 글에서 내 시선이 멈춰섰다. 글의 요점은, 관청에서 사당의 건립에 요구되는 노동력을 제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청원이었다.

“저희의 간절한 마을을 헤아리시어, 우리 고을의 한 면(面)을 지정하여 마을마다 각각 정부(丁夫: 일꾼) 몇 명을 보내어 (사당의 건축자재) 운반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마음 깊이 감사할 것이며, (사당의) 준공도 빨라질 것입니다. 길이 후세에 칭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조선 시대 서당에는 사당의 기능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많으나,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산양서당의 경우에서 보듯, 서당 중에는 서원과 체제와 격식이 유사한 예도 있었다. 훗날 산양서당은 근암서원(近嵒書院,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으로 바뀌었다. 이름난 도산서원도 이황이 생존하던 당시에는 도산서당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한 마디로 서당은 선비들의 정치적·문화적 활동 거점이자 서원의 모체이기도 하였다. 그곳은 성리학을 연구하는 장소이자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공간이었다. 물론 이와는 달리 규모가 영세한 초보적인 서당도 많았다.

19세기 후반에는 다종다양한 서당들이 전국 어디에나 있었다. 그와 같은 시기 서구의 여러 근대국가와 달리, 조선왕조에서는 의무교육을 시행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국가 재정이 너무도 빈약했다. 그 대신에 민간이 운영하는 서당이 마을마다 존재하였으므로, 대다수 남성은 최소한의 교육 기회를 누렸다. 조선의 서당 교육은 이웃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못하지 않았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조선의 교육 여건은 유럽의 대다수 국가에 견주어 보아도 뒤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당은 한국의 문화적 저력을 증명했다.

어디에나 많은 서당이 있어서 조선 사회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자랑하는 성리학 국가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통속소설들도 충, 효, 열의 도덕적 가치를 선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무속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온 서사무가조차도 성리학적 가치에 어긋난 것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조선 사회는 이념화되었다.

서당을 통해 많은 사람이 고급문화를 체험한 경험은 소중한 자신이었다. 그것은 훗날 교육열로 다시 꽃을 피웠다. 일제의 압제에서 풀려난 한국은 세계 역사상 최고의 교육열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현대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견인한 주된 동력이었다. 조선 후기에 목격한 서당 교육의 열기가 되살아나 한국의 근대화를 선도한 셈이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오늘날 한국의 교육은 입시지옥을 낳았고, 우리를 무한경쟁으로 몰아넣는다. 그에 비하면 조선의 서당은 경쟁과 갈등을 부추기는 점보다는 조화로운 인간의 삶에 이바지하는 바가 훨씬 컸다. 사회적 통합을 가져왔고, 도덕적 삶의 가치를 앙양하는 등 사회문화적 순기능을 강화하는 토대가 서당이었다. 현대 한국은 서당의 역사적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학습공동체가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적폐와 모순의 함정에서 탈출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서 새로운 서당을 살리자. 요즘 뜻있는 사람들은 일련의 대학 비리를 겪은 나머지 “박사학위”를 “복사학위”라고 비웃는다. 그들은 “국민대학교”를 “국민 학교”라고 부르자며, 그 영문 명칭도 University가 아니라 “Ujiversity”라고 바꾸라고 촉구한다. 참으로 씁쓸하지 않은가.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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