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다들 당신 욕을 하지. 솔직히 나만은 당신을 변호하고 싶다. 이력을 훑어보니 당신은 제법 싹수 있는 청년이었더군. 1882년 그 어려운 문과시험도 보란 듯 무사통과했지. 당시 나이 25세. 워낙 이름이 많이 팔린 매국노라서 그렇지 당신의 서예 솜씨며, 빛나는 양반 뼈대를 남몰래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적잖은 눈치야.
그야 그렇다 치고, 당신은 문과에 급제한 지 4년 지난 1886년 갓 설립된 육영공원育英公園(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에서 영어까지 완전 정복했더군. 그러고는 완전히 미국통이 되어버렸다지. 중간에 잠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당신은 3년간이나 워싱턴의 외교가를 어슬렁거렸어(1887∼90). 그 시절에 연미복 차림으로 날마다 와인 잔을 기울이셨다니! 상상만 해도 당신은 정말 멋쟁이였어.
그러나 미국이 별로 돈이 될 것 같지 않았어. 적어도 한반도 문제에 있어 그들의 영향력은 확실히 일본이나 러시아보다 한 수 아래였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당신은 학부대신에서 물러나 미국공사관 서기관 H. N. 알렌(安連, 1858∼1932)의 도움으로 잠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했지. 1896년 당신은 이범진李範晉(1852∼1910) 등과 함께 러시아의 품으로 옮겨갔던 거야. 러시아 대사관으로 고종을 모셔갔고, 그 대가로 외무대신(외교부 장관) 자리를 따냈더군. 얼마 후 고종이 환궁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참고 봐줄 만했지.
이건 곁가지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이범진 같은 분은 당신과는 한참 달랐지. 당신에게 밀려난 그분은 외교관이 되어 미국과 유럽에서 맹활약했고, 1907년에는 헤이그로 파견된 밀사들을 얼마나 성심껏 도왔는가. 그분의 자제 이위종李瑋鍾(1887∼?)도 밀사의 일원이 아니었던가. 밀사의 활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고종이 강제 퇴위되더니 1910년에는 나라가 아주 망했지. 이범진 대감은 분을 이기지 못해 권총으로 자결했어. 그처럼 훌륭한 부친의 장례를 엄수한 뒤 그 자제 이위종은 연해주로 옮겨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셨지. 당신이 걸어간 길과는 너무도 달랐어.
1904년에 시작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이미 친일파로 변신한 당신에게 큰 행운이 찾아왔어. 을사늑약(1905)에, 고종의 강제 퇴위(1907), 심지어 일제의 강제통합(1910)까지도 출세와 축재의 기회가 됐다니! 여간한 배짱과 소신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네. 당신은 1919년 3·1운동 때도 만세를 비웃는 경고문을 연달아 내놓았더군. 이제 와서는 또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을지 모르겠네만, 당신의 진심이 뭐 그리 중요하겠나. 그 공로로 당신은 후작侯爵까지 일사천리로 승진했으니 말이야. 팔아먹을 조선 민족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 당신에게 더 큰 축복이 어디 또 있겠나.
날마다 주판알 튀기느라 그때 당신의 손끝에 불이 났겠지. 한-일 강제합병으로 당신은 2012년 현재의 화폐로 환산하면 최소 400억 원을 벌어들였다고들 말하지. 덕분에 당신은 경성 제일의 현금 부자가 됐단 말이야. 총 재산이 요즘 돈으로 무려 600억 원이었어. 강제합병 때만도 200억 원을 벌었고, 고종을 퇴위시킨 공로금도 자그만치 20억 원이었다고 듣고 있네. 1904년 서울에 설립된 한미전기회사를 위해서는 옥새까지 위조해 80억 원을 착복했더군. 당신의 파렴치한 영웅담은 정말 끝이 없네.
할 짓 못할 짓을 가리지 않고 나라야 망하거나 말거나 돈만 벌어댔지. 그리하여 집안에 금고란 금고는 모두 꽉 찼건만 자제의 학교 납입금이 비싸다고 납입을 거부해 장안 최고의 노랑이 소리를 들었더군. 그것이 1924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에까지 났어. 사람들이 다 입을 비죽거렸겠지. 당신 부인도 마름 자리를 구실로 거액을 갈취한 적이 있어 신문에 대서특필됐더군.
그런가 하면 또 당신의 손자 이병희(李丙喜)는 일본의 교토(京都)에 유학을 갔다가 ‘백골단’이라는 이상한 단체에 가입하여 절도행각을 벌이다가 붙잡히는 바람에 세상의 빈축을 샀지(『동아일보』 1924년 7월 3일자). 정말 알면 알수록 당신 가문은 대단하지 뭐야! 그런데 말이야, 당신같이 파렴치한 인간을 저승으로 보내고자 했던 이재명(李在明, 1890∼1910) 의사는 도리어 교수형을 받고 저세상으로 떠났지. 참 멋진 세상이었어.
지금 세상에도 당신을 뒤따르는 영리한 인간들이 많지. 한일 국교정상화를 한다면서 불과 수만 달러에 식민통치 기간의 모든 아픔을 팔아먹은 놈들도 있었지. 그게 다 미국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구질구질한 변명도 있지마는 위안부고 징용이고 보상은 그렇게 다 끝났다는 것이 일본 사람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야. 수년 전부터는 또 공항이건 철도건 농업이든 군사 정보든 다 팔아치울 속셈으로 혈안이 된 못된 자들이 정부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앉아서 호령을 하지.
지난 이명박 대통령 때는 퇴임 뒤에 살게 될 저택 부지를 매입하면서 그게 나랏돈인지 개인의 사적인 돈인지를 도무지 구별을 못하고 시민들을 헷갈리게 만든 일도 있었다네. 당신도 아마 요즘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거야. 그때보다 훨씬 더 큰돈을 더 쉽게 움켜쥘 수가 있었을지 누가 알겠어. 어때 배 많이 아프지 않나.
아주 오래 전에 쓴 글입니다. 이완용은 사라지지 않는 욕망의 화신인가 봅니다. 지금도 있고, 내일도, 모레도 아마 영원히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우리 위에서 존재할 영원한 불멸의 인간상인지도 모르겠어요.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이범진이 권총으로 자결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범진은 러시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저택 거실에서 자결하였습니다.
당시 이 공사의 자결 소식을 전한 현지 일간지 '상트페테르부르크스카야 베도모스티'는 "밧줄로 목을 맨 상태에서 권총으로 자신을 향해 3발을 쐈으나 탄환이 벽과 천장을 향해 빗나갔다"고 기사를 썼다고 하니
이범진은 권총이 아니고 목을 메달아 자결한 것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