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가을 산천에 나가도 그렇지만 여름 산천도 눈만 바로 뜨면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렸다. 가난한 처갓집 가는 것보다 낫다. 더워도 길을 나서야 하는 이유다. 피고 지는 꽃 아래서 익어가는 산 딸기를 보며 행복과 불행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사람들에게 ‘왜 사는가?’ 하고 물으면 여러 가지 답이 나온다. 

“사람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

스테바에오스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말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최대의 행복은 소망을 이룬 행위로 실력에서 생기는 작용이다.” 라고 말한 뒤에 다시 “인간의 행복은 자기의 뛰어난 능력을 거리낌 없이 행사할 수 있는데서 이루어진다.” 라고 말한다.

“행복의 첫째 조건은 역시 지혜이다.”

<안티고네>에 실린 글이다. 아이아스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생활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다. 볼테르는 “행복은 꿈에 지나지 않으며 고통은 현실이다.” 고 말했는데, 인간의 행복과 근심을 두고 논한 사람이 쇼펜하우어였다. 

“인간이라는 덧없는 존재가 교체되는 점에 중점을 두고 고찰하며 인간의 삶이 얼마나 희극적인지 세밀히 살펴보라. 그러면 마치 현미경으로 세균이 우글거리는 물방울이자 치즈에 곰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이 미물들이 웅성거리며 악착같이 싸우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때의 기분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비좁은 공간 속에, 저기서는 짧은 시간 속에 활발히 활동하지만 우습기 이를 데 없다."

생존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한 점과 같은데, 우리는 생존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렌즈로 확대시킨 엄청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지난날 이러저러 한 행운과 쾌락을 놓쳐버렸음을 한탄하는 것은 가장 미련한 짓이다.

비록 그 행운이라는 것을 속에 넣었다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기억 속에 오직 껍데기 같은 미라만 남을게 아닌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건 모두 이렇게 되는 것이다.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사물이 허망함을 깨닫게 한다.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더 중요하다. 행복이나 근심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서로 다가오려 하는데, 행복을 보고 끌어안는 사람이 있고 습관이 되어 슬픔이나 근심을 먼저 보고 끌어안는 사람이 있다. 

지금이라도 행복이라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나마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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