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비 내리다가 멎은 뒤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그것도 쌍 무지개가. 그리고 금세 사라졌다. 아름다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추억들이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하나의 사건이 우리들의 추억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먼 과거지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추억의 그리움이 다시 포착될 수 없을 만큼 되려면 얼마나 먼 과거지사가 되어야만 합니까? 대개의 사람들이 이점에 관해서는 하나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적으로 너무 가까운 것도 회상할 수가 없고, 또 너무 먼 것도 회상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한계를 모릅니다. 어제의 체험도 나는 천 년 전의 과거지사로 밀어버릴 수가 있고, 또 그것을 마치 어제의 체험같이 회상할 수가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 <유혹자의 일기>에 실린 글입니다. 그렇습니다, 추억이라는 것이 아스라한 것도 있고, 금세라도 손을 내밀면 손에 잡힐 것 같은 추억들이 있습니다.

그 추억들 중에서도, 어찌 그리 아련한 것들만 떠오르는지요. 바람 부는 강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던 옛 사람이나, 날은 어두워지고 바람은 더 세차게 부는데, 막차가 오지 않아 안절부절 하던 그 기억들, 그것들이 어느 새 과거가 되어 내 의식의 저편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더 가슴이 아릿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순간도 금세 지나고 나면 과거가 되고, 어느 날 또 다시 지금 이 시절을 나는 그리워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떠날 것을 생각하니 더 더욱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물밀듯이 달려오는지도 모릅니다.
나도 오늘 밤엔 다시 과거 속에서 누군가 대상도 없는 사람을 기다리던 그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가 고향마을의 기울어져 가는 모정에 기대어 당신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밤은 깊은데, 창문을 스치는 바람소리도 없는 이 고요한 밤에, 그리움은 알 수 없는 그리움은 어느 텅 빈 허공을 날아다닐까요?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