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 칼럼'
서애 유성룡이 이순신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니, 잘 협력해 공훈을 이루기를 기원하노라고 썼다(<서애선생 별집> 제3권). 진린은 명나라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동안 당진에 정박했다. 그러다가 남쪽으로 가서 이순신과 함께 지낼 예정이었다.
진린은 포악하고 교만했다. 선조가 멀리 양주(청파)까지 가서 전송할 때도 그는 조선의 관리를 폭행했다. 유성룡은 친구 이순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헤아린 이순신은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진린 일행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하지만 얼마 후 명나라 수군은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우리 백성을 함부로 약탈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식량과 의복을 가지고 배에 오르며, 진린을 나무랐다.
“명나라 군사들의 행패 때문에 우리 군사가 다 흩어졌다. 대장인 나만 홀로 여기 있을 수 없어, 다른 섬으로 간다.”
그제야 진린이 사과하며 이순신을 붙들었다(김육, <잠곡유고> 제13권 ‘통제사 이 충무공의 신도비명’). 명나라 수군은 전투도 잘하지 못했으나 이순신은 연합군인 그들을 우대했다. 녹도만호 송여종이 명나라 수군과 함께 왜적을 상대했을 때였다. 우리 수군은 적 70명의 목을 베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전과도 없었다. 진린이 화를 내며 소동을 피우자 이순신은 왜적의 머리를 모두 그에게 양보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부하를 위로했다.
“왜적의 머리는 썩은 살덩이에 불과하다. 그대의 공은 내가 임금께 사실대로 모두 아뢰었노라.”
선조 31년(1598) 9월21일자 <난중일기>에서도 이순신은 왜적의 배와 여러 물건을 빼앗아 진린에게 주었다고 했다. 그해 10월3일, 진린은 왜군과의 접전 끝에 평저선(沙船)과 전선(虎船)을 40척이나 잃었다. 이순신은 “도독(진린)이 엎어지고 자빠지는 꼴을 이루 형언할 수 없다”고 <난중일기>에 적었다. 진린의 부하들은 전투에 능숙하지 못해 후미에서 기세를 돋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명나라 군대의 말썽은 끝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왜군의 뇌물을 받아 챙기며 전투를 회피했다.
선조 31년 10월 초순, 이순신은 명군과 함께 수륙 양면에서 왜장 소서행장을 공격하기로 약속했으나, 명나라 장수들이 뇌물에 매수되어 전투가 불발에 그친 적도 있었다. 그러자 이순신은 나뭇조각(木片)에 글을 적어 진린을 조용히 꾸짖었다. 명군의 기강은 상상할 수도 없이 무너져 있었다. 전쟁 말기 남해의 왜적은 식량 부족으로 쩔쩔맸는데, 명나라 사람들이 그들에게 식량을 팔아서 이익을 챙겼다(이식, <택당선생 별집> 제10권).
노량해전이 임박했을 때도 진린의 도독부로 몰래 왜장이 들어와서 돼지 2마리와 술 2통을 바쳤다(<난중일기> 무술년 11월14일). 그 이튿날도 왜선 두 척이 몰래 두세 차례나 진린을 방문했다. 노량해전이 일어나기 하루 전(11월16일)에는 왜선 3척이 진린을 몰래 찾아와서 말과 창칼 등 뇌물을 바쳤다. 그런데 중·일 간의 모든 비밀거래를 이순신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탐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다. 왜장 소서행장은 사천 지역에 주둔하던 살마주(薩摩州) 출신의 정예병까지 총동원했다. 그때 이순신은 적과 내통한 진린과 함께 노량바다에서 적선 500여척을 맞아 싸웠다.
적선 200여척을 불태우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끝내 그는 적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진린은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했다고 전하는데, 곧이어 그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버렸다. 다행히 왜군의 재침은 없었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명나라 황제는 진린의 공을 기리어 땅까지 떼어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린의 공이었는가, 아니면 이순신의 공이었는가(윤기, <무명자집문고> 제10책). 세상에는 앞뒤가 전도된 일도 없지 않으나 역사는 침묵하지 않는다.
과거에 제가 쓴 짧은 글 하나입니다. 제 글의 논지는 이순신의 눈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만,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철저히 이순신의 눈길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명나라 장수 진린은 횡포하고, 무례하며, 무능하고도 비겁합니다. 하필 진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순신은 자신과 장기간 협력 관계에 있던 모든 장수들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어요. 원균, 이억기, 권율, 권준 등도 이순신의 눈에는 그다지 유능하지도 미덥지도 못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순신의 양심과 이순신의 눈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명장 이순신이 남긴 기록이기 때문에 모두 옳은 것일까요. 그의 기록은 순금과도 같이 오염되지 않은 역사의 진실로 가득할까요.
이제라도 우리는 조금 불편한 질문 앞에 이순신과 우리 자신을 세워야되지 않을까 합니다. 시공을 초월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서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파악하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생사가 엇갈린 전장터의 장수의 판단은 더더욱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순신에게는 진실인 것도, 진린에게는 좀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원균과 이억기와 권율과 권준에게도 이순신과는 얼마든지 다른 판단이 성립할 수 있겠지요. 남쪽의 전선을 바라보는 임금과 대신들의 시각도 당연히 이순신과는 다를 수 있었고, 실제로 상반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순신만 옳다'는 관점은 사물을 입체적으로, 정확히 이해하는데 때로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가 남긴 기록을 비판적으로 살펴야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사가 다 그러할 것입니다. 미국의 눈으로만, 또는 중국과 러시아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안일한 처사입니다. 우리는 한국이란 나라의 눈으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옳습니다. 과연 우리의 대통령과 참모들은 누구의 안경으로 21세기의 위기상황을 판단하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마드리드를 모의 패션쇼 쯤으로 여기는 듯한 대통령 부부에게 대한민국의 국익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평저선(沙船)과 전선(虎船)을 40척이나 잃었다]
라구 쓰셨군요.
근디여
지가 잘 몰라서 여쭤보것는디여..
혹시나 한짜가 틀린 기 아닌가 혀서여.
虎船이 아니구 唬船이 올곧은 표기가 아닌가 혀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