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 칼럼'

오늘날에는 누구나 역사의 중층성을 말합니다. 도대체 중층성이란 무엇인가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서술에 반영되어야 하는 것인가요? "위안부" 문제를 예로 들어봅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문제에 관한 논의 구도는 너무 단순했지요. 둘 밖에 없었으니까요.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일본군국주의의 책임이다."라는 것이었어요. 또 다른 하나는요, "글쎄다. 일본의 책임이라고만 말할 뚜렷한 증거가 없지 않는가"라는 주장이었어요.

앞의 주장은 한국인들의 대변하는 관점이었지요. 그 반면에 후자는 일본 우파들의 생각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근년에 와서는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분화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국가지상주의를 비판하는 흐름이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시민들도, 역사 속에 내재하는 "다양한 음성" 또는 역사의 "분절적이고 교란된 지층"에 점차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연구경향은 특히 진보적인 학자들에게서 나타났다고 하겠습니다.

저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한 사람의 역사가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요, 근년에 진보를 자처하면서 한국근현대사를 새롭게 연구하자는 주장이 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점도 있습니다.

첫째, 일부 학자들은 이른바 중립적인 입장을 택하겠다고 말하는데요. 사실 그런 입장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연구자가 여러 가지 상반된 입장 사이에서 그 "경계" 또는 "사이"에 선다는 것은 말로는 가능해 보여도 실제로는 불가능한 선택입니다.

더구나 연구자가 진보적이라면요, 그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맞는 일입니다. 어떻게 그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중간에 설 수가 있습니까? 진보적인 역사가는 어중간한 중립지대가 아니라, 피해자의 편에 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제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역사가가 사건의 다양성과 중층성을 탐구한다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하는 것이겠습니까?

그의 임무는 명백합니다. 진보적 역사가는 강자의 폭력성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와 동시에 표면적으로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보이기 쉬운 약자의 생각과 행위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중립성과 다양성을 표방하면서 한 사람의 진보적 역사가가, 이토히로부미나 박정희의 친절과 인간미를 발견하는데 노력한다는 것은 사기적 행각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미시사가(Micro-historian)입니다. 역사가 객관적 학문이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강자의 폭력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태도와 시각은 역사의 중층성을 탐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신행위이며, 권력에 대한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보적 역사가가 취할 수 있는 입장과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연전에 국제적 관심을 끌었던 박유하 씨의 연구 같은 것이 전형적인 예라고 봅니다. 그이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항간의 논의를 제법 새로운 관점에서 다루는 듯 하였으나, 실은 제국주의자를 옹호한 것입니다. 쉬운 이야기를 애써 복잡하게 만들고, 약자의 편을 드는 척하면서 결국에는 강자의 주장과 행동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은연중에 자임한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진보적 사고와는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동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이었던 헤겔을 비판한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헤겔은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애둘러서 어려운, 인공적인 언사로 포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을 교묘하게 둘러대는 것은 누군가를 속이려는 사람들이 흔히 써먹는 수법입니다.

중층성에 대한 탐구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사물에 대한 인식을 일부러 흐릿하게 만드는 것인가요? 아닐 것입니다. 문화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이들이 지나치게 단순화한 "역사적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이 곧 중층성에 대한 탐구입니다. 제가 이순신의 신화를 넘어서 원균의 억울함을 풀어보려는 것도 실은 이와 같습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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