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서평'

1.

러셀(1872-1970)은 평화주의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을 반대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로 말하면 탁월한 수학자요 철학자이기도 하였으나, 평생 한 번도 제대로 된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그가 기독교회와 불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지식인이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살까요? 러셀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양인을 위한 다양한 강의를 제공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에게는 온 세상이 바로 대학 강단이었습니다. 강의를 바탕으로, 러셀은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요, 세계 시민을 상대로한 다양한 주제의 인문 서적이 그의 펜 끝에서 탄생했습니다.

다행히도 그의 강의와 저술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 덕분에 러셀은 곤궁하게 산 적이 없었다고 전합니다.

2.

기독교와 러셀의 불화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요? 여러분도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러셀은 어떤 이념이나 종교가 "광신"에 흐르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저나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광신적인 주의와 주장은 환영할 수가 없지요.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광신에 빠지면 인간은 행복하고 자유롭게 되지 못합니다. 광신주의의 덫에 갇힌 인간이란 종교와 이념에 노예처럼 매달리게 되어 무한한 착취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러셀은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그런데요, 러셀의 눈에 비친 19세기 서구의 기독교회는 바로 그 전형이었습니다.

기독교회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비인간적이다 못해 광신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회와 러셀이 충돌하는 사태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러셀의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한 구절을 소개할까 합니다.

“(...) 종교(=기독교)가 지닌 세 가지 (...) 자극제는, 공포와 자만과 증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독교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변명할지도 모른다. 교회가 이런 감정들을 다루는 것은, 바로 교회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성(性)의 충동을 취급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 성 충동을 결혼이란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색욕이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

이러한 (신학적) 항변에 대해 두 가지 (나의) 답변이 있다. 첫째, 피상적인 차원의 답이 있고, 둘째 근본적인 답변도 있다.

피상적 답변이란 정의에 관한 교회의 관념이 최상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근본적 답변은, 증오와 공포는 오늘날 우리의 심리학적 지식과 과학적 기술로써 온전히 제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종교(=기독교)는 아이들이 이성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으며, 우리가 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데 방해가 된다.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묵은 죄와 벌의 괴성 대신에 과학적 협동의 윤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다.

인류는 이제 황금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 이 문을 가로막고 있는 괴물을 우선 제거해야할 필요가 있을 텐데, 이 괴물이 바로 종교이다.”

3.

19세기 말부터 젊은 러셀은 그 나름으로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추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는 인간의 이성이 마음껏 발휘되는 자유주의를 지지하였습니다. 과학적 합리성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이 불평등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러셀은 꿈꾼 것입니다. 20세기의 인류사회가 제발 평등하고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운영되기를 러셀은 진정으로 바랐습니다.

그런데 당시 기독교회는 어떠하였던지요? 여전히 '중세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러셀을 비롯한 지식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19세기 서구의 기독교회는 인간의 공포심을 증폭시켰고, 그러면서도 서구사회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선민의식을 부채질하여 일종의 자만심을 키웠습니다. 기독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교도와 비(非) 서구적인 이질적 문화에 대해 증오심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지요. 그들은 서구사회를 선동하여 “야만”에 대한 전쟁과 침략의 길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침략적 ‘오리엔탈리즘’으로 서구사회를 물들여놓았습니다.

조용히 앉아 러셀의 이 책을 읽노라면 러셀의 신념이 어디에 뿌리를 두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그가 비판한 것은 성경책 자체였을 것도 같습니다. 러셀이 분노한 것은 단지 기독교회의 퇴폐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근본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점을 현대의 신학자들은 수긍할지는 의문입니다.

4.

누구든 인간의 공포심을 충동질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열심히 외쳐대는 일부 선교자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번번이 되풀이되는 극우 정당의 "안보 쑈"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핵발전소의 위기를 강조하며 생태주의의 길로 시민을 마구 떠미는 것도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포심을 이용한 선전 선동은 어떤 경우에도 금물이라는 것이 러셀의 믿음이었고요, 그것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적 자만감도 위험하기는 아마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재벌을 비롯해 한국의 법원과 검찰, 언론매체 및 각종 전문가 집단으로 형성된 한국의 기득권층의 오만도 문제입니다. 그들의 전횡에도 결국에는 끝날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편향적인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는 세계전쟁과 무모한 침략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히틀러가 독일인의 위대함을 내세워 세계전쟁을 일으킨 사실을 누구나 기억할 것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감히 "천손"이라 주장하며 “대동아공영권”을 강요한 사실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인간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관용"은 인간사회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가치라고 봅니다. 하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회는 어떤 모습인지요? 많은 사람이 오늘날의 기독교회를 "개독교"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5.

러셀이 그러하였듯 저는 공포심도, 자만심도 그리고 증오심도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소망합니다. 어찌 러셀 한 사람만이 그런 희망을 품었다고 말할까요.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마호메트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아니, 무수히도 많은 어질고 현명한 시민들도 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줄로 믿습니다.

공포가 사라진 평화로운 세상, 자만심을 내려놓은 보다 정의로운 세상, 증오심이 사라진 사랑의 세상이야말로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참 세상일 것입니다. 그러면 러셀이 공격한 기독교도 실은 러셀과 한 편이 아닌가요. 모두의 소망은 참 평화요,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세상일 것입니다.

윤석열 정부도 편 가르기와 대중 선동으로 한국사회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지 말고, 평화와 공존의 길을 따라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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