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기묘당'이란 중종 14년(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희생된 정치세력을 일컫습니다. 그들이 조정에서 활동한 것은 햇수로 4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에도 기묘당 내부에는 분파작용이 활발했고, 결국은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지요. 우리가 잘 모르고 지나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주목할 점은 기준(1492-1521년) 등 약관의 젊은층이 기묘당의 주축으로 급속히 부상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들 소장층이 조광조의 친위세력을 형성하면서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역사가들은 기묘당을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는데요. 사화로 희생된 선비들의 출신과 처벌 수준에 따라서 대개 7~8가지로 구별하였어요.

기묘당을 망라한 ≪기묘제현전≫이라는 책이 눈길을 끕니다. 이 책에는 총 218명이 기묘당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기묘당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책자가 아니라, 그 뜻을 높이고 추모하려는 뜻에서 편집된 것이었습니다.

(1) 그에 따르면 기묘당의 중심에는 사화로 숨진 "8현(八賢)"이 위치했습니다.

(2) 이어서 김구(金絿, 1488-1534) 등 유찬(流竄, 유배)된 선비들이 수록되었고요.

(3) 문근(文瑾, 1471-?) 등 사화로 말미암아 파직되었거나 또는 영구히 조정에서 쫓겨난 선비들을 손꼽았습니다.

(4) 또, 성세창(成世昌, 1481-1548)을 비롯해서 실무가 없는 산반(散班, 직무가 없는 관직)으로 좌천된 선비들을 수록하였고요.

(5) 나아가 왕실에 속한 인사로 기묘사화에 연루된 몇몇 종친을 열거하였습니다.

(6) 그리고 기묘당이 시행한 현량과에 급제한 이연경(李延慶, 1484-1548) 등도 실었어요. 그들은 파방(과거 시험 자체가 무효로 됨)으로 피해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7) 아울러, 서경덕(徐敬德, 1489-1546) 등 기묘당이 관직에 추천한 인사들도 수록하였고요.

끝으로는, 박광우(朴光祐, 1495-1545)처럼 사화가 일어나자 기묘당의 무죄를 호소한 선비들까지 포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화의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평가한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기묘당의 실체가 좀 달랐습니다. 저는 기묘당을 다음의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봅니다.

(1) 당의 중심세력인데요. 김정과 김식 등 조광조의 최측근을 손꼽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2) 안당과 정광필 등 기묘당의 외연을 형성한 조정 관리들이지요.

(3) 김안국 등 소극적인 동조세력을 말하고 싶고요.

(4) 기준을 비롯한 급진과격파를 빠뜨리면 안 되겠습니다.

(5) 끝으로, 박광우 등 재야지지층도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통념과는 달리, 기묘당을 사회적 배경만 가지고 보면 전통적인 훈구파가 상당수였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공신이었던 선비가 다수 기묘당 안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와 전통적인 훈구파가 서로 다퉜다는 식의 설명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중종을 추대한 정국공신과 그들에 대항하는 세력이 정치적으로 갈등하였다고 봐야 옳은 설명일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조광조 등을 영남 사림파의 후예라고 합니다. 이런 설명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기묘당의 출신지역을 살펴보면 영남출신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경기도와 충청도 출신이 대분분이었고, 상당수는 전라도 출신이었습니다.

학연으로 보더라도, 그 뿌리는 경기도에 집중되었습니다. 조광조의 제자들과 김안국(金安國, 1478-1543) 및 김정국 형제에게서 수학한 이가 많았어요. 그들은 김굉필의 문인이었지요. 지레짐작하기 쉬운 영남사림파와는 일단 거리가 좀 있었습니다.

제가 새롭게 발견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요, 기묘당의 위기를 앞당긴 것이 기묘당 내부의 급진과격파였다는 점입니다. 기준을 비롯한 소장파가 조광조의 친위그룹을 형성하고 나서, 조광조의 절친인 김정 등 중심세력과도 상당한 거리가 생겼습니다. 나중에는 조광조조차 급진파를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급진파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해 정국공신의 7할 이상을 공신 명부에서 삭제하였습니다. 또, 도교식 제사를 철폐하자며 소격서 폐지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우유부단한 중종을 격분하게 만들어 중종 14년에 사화가 일어났지요.

알다시피 남곤과 심정 및 홍경주라는 대신이 중중과 힘을 합쳐서 기묘당에 대한 박해운동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벌어지기 불과 4년 전에, 중종은 기묘당을 전격적으로 등용하기로 결심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4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중종은 조광조 등이 벌이는 개혁정치가 자신에게는 실익이 전혀 없는 정치 활동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날에는 골치 아픈 존재로 여겼던 정국공신들과 힘을 합쳐,기묘당을 일시에 쫓아냈던 것이지요. 우왕좌왕한 중종도 문제였으나, 과격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채 정적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던 조광조의 리더십도 사실은 문제 투성이였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의 당권투쟁을 멀리서 지켜보며,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역사를 읽어보면 위기의 순간에 진정한 리더십이 태어나는 법이더군요. 민주당에 과연 새별이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겠습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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