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무참히 짓밟은 비극, 그 출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일어난 바람에 청나라와 일본 등 외세가 한반도 문제에 개입했다고 배웠어요. 동학농민군 때문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고 가르쳤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보면 앞뒤가 완전히 뒤바뀐 말이었어요.

그때 화근은 고종에게 있었어요. 그 점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해요. 고종과 그 측근들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조정이 자신들의 군대로는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할 자신이 없어서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다는 말씀입니다.

고종이 외세를 빌렸기 때문에 여러 가지 역사적 비극이 연출되었어요. 동학농민군이 진압된 뒤에도 또 한 차례의 참극이 있었어요. 1895년의 일이었지요. 일본은 조선의 궁궐로 자객을 들여보내서 명성황후를 시해했어요. 아주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제거했어요. ‘여우사냥’이라는 작전 명칭이 붙은 국제적인 테러였습니다.

애초 고종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나라 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왜 외세를 끌어들인다는 말씀입니까. 동학 농민군을 막지 못하면 자신이 왕위에서 내려가야지요!

나중에 우금치에서 일본군은 관군을 동원해 가면서 동학농민군을 물리쳤어요. 그런다음에도 일본군은 관군을 사냥개처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전국을 이잡듯 뒤져 동학농민군을 학살했어요. 어떤 분의 주장으로는 말이지요. 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30만 명쯤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희생자는 모두가 동학과 관계가 있어 보이는 선량한 우리 백성이었지요.

쓸만한 조선 사람은 그때 다 죽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정도였어요. 일본군은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끝끝내 죽였을까요? 이미 동학농민군의 주력인 전봉준과 김개남과 손화중의 부대가 다 흩어졌는데도 말입니다.

얼마든지 유추해볼 수 있는 일이지만요. 일본은 동학농민군뿐 아니라 조선이란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키고야 말 야욕을 품었어요. 그래서 말입니다. 장차 한반도 안에서 일본의 지배에 저항할 세력을 아예 씨앗까지 다 없앨 작정이었던 게지요. 조선 안에서 외세에 저항할만큼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것은 동학농민군밖에 없었겠지요. 그런 이유로, 일본군은 관군을 사냥개처럼 부리며 심산 궁곡의 마을까지 찾아다니면서 미래의 적을 몽땅 제거했었어요.

이후 조선에는 무력으로 외세에 저항할 세력이 사실상 거의 사라졌어요. 1910년에 저들이 강제로 우리나라를 병탄했을 적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너졌던가 생각해 보세요. 의병의 저항이 없지는 않았으나 과거의 동학농민군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일본은 우리를 아주 쉬운 상대로 간주했어요. 그들이 조선을 얼마나 대놓고 무시했으면, 제2차 세계대전 때 10만 명도 넘는 여성을 ‘위안부’로 끌고 가서 성노예로 착취했을까요. 저들은 수십만 명의 한국 사람들 징용으로 동원하고, 또 수만 명을 전쟁터로 끌고 가서 총알받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고종이 처음부터 외세에 제대로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 이런 비극을 낳고야 말았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온다고 합니다. 바이든이든지 트럼프든지 기본적으로는 무엇이 다를까 싶습니다. 윤석열 씨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미국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미국 대통령의 손목을 잡고 아부하는 꼴을 보이는 대신에, 바이든 대통령을 서울로 초치하였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이번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에는 엄청난 뒷거래가 숨어 있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프랑스도 세계 어떤 나라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해야지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의존적이다 못해서 지나치게 굴종적인 태도를 취하면 안됩니다. 윤 대통령은 역사의 교훈을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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