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구의 '생각 줍기'

조선시대 개혁의 아이콘 조광조 선생에 대한 책을 소개합니다. 이 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을 외치는 거 같습니다. 개혁을 한자로 ' 改革'이라고 쓰는 걸 보면 개혁이란 사람의 가죽을 생으로 벗길만큼 어려운 일인 가 봅니다.

개혁을 외치던 정권도 말미에 가면 흐지부지 되면서 끝나는 게 한국식 개혁인 거 같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세상이 민주화되고 개방화된 사회에서 개혁은 생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거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개혁대상이 되는 쪽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의 주체가 상대방에게 도덕적으로 헛점이나 틈을 보이면 개혁은 물 건너간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게 개혁의 주체가 “깨끗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개혁에 대한 국민 여론과 언론도 힘을 실어줘야 하고, 입법부인 국회와 그리고 청와대 및 행정부서의 도움도 당연히 있어야 하고요.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것을 가지고 학자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들고 있지만 이 책의 저자인 조성일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임금인 중종이 처음부터 조광조를 비롯하여 사림파를 대거 등용한 이유가 개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중종반정을 일으켰던 공신 출신 기득력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면서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왕권을 강화하며 자기만의 통치를 해보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의 개혁시도는 결실을 맺을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개혁의 정점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정국공신에 책봉된 사람 가운데는 공이 없는데도 인맥으로 공신이 된 인물이 많았으나, 중종은 자신의 정통성과도 연관된 정국공신 개정에 반대했지만, 조광조를 비롯한 신하들의 뜻에 밀려 마침내 정국공신 가운데 무려 3분의 2를 공신에서 삭제하기로 해놓고, 변덕스런 중종은 정국공신 개정을 선언한 지 불과 4일 뒤에 갑자기 조광조 일당이 붕당을 만들어 자기 세력을 형성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며, 자기들만 요직을 차지했다는 명목으로 조광조 세력을 전격적으로 체포해서 귀양을 보냅니다.

조광조 선생은 귀양간지 1개월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결국 조광조의 개혁을 두려워했던 훈구파와 중종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제거했지만, 역사는 조광조를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들어 개혁을 외치던 주체세력들이 도덕적으로 흠집을 보이자 '강남 좌파'란 신조어가 나왔고, 최근 일부 학자들이 그걸 빗대어 조광조 선생을 붕당을 만들어 자기 편에게는 높은 벼슬을 주고, 상대방은 배척하는 '강남 좌파'의 원조요, '내로남불'의 원조라고 비하하고 있으나 그런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조식, 이황, 이이는 거의 공통적으로 조광조 선생에 대해 깊은 존경을 표시했고, 그의 학문을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역사에는 항상 보수와 개혁 사이의 진통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조광조 선생이 등장한 시기 조선 사회도 보수와 개혁의 기운이 서로 충돌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를 돌파하기 위하여 개성이 강하고 젊었던 관료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하고 원칙에 충실하면서 급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했으나 개혁의 급진성과 과격성은 이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들을 결집시켰고, 개혁은 미완인 채로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의 좌절은 역사에서 개혁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책이 두껍지도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일독을 권합니다. 

/글·사진=이화구(금융인ㆍCPA 국제공인회계사ㆍ임실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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