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아침에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한용 시인의 시집 <천 년 동안 내리는 비>(여우난골, 2021)을 읽었어요. 그러다가 바로 이 시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함께 읽어보시겠어요.
오늘은 주일입니다. 요크 거리를 걷다 하루짜리 일회용 신자가 되어 성당(영국의 요크 민스터) 미사에 갔습니다. 어젯밤 속세의 광란을 들뜬 눈으로 지켜본 눈알을 오늘 성스러운 기운으로 씻어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미사가 진행되는 한 시간 남짓 나를 감싼 엄숙하고도 평화로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세세히는 잘 모르지만, 그 소리가 적시하는 바는 쉽게 감지되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기도를 올리는 짧은 순서가 됐을 때, 이런 것에 익숙지 않은 나는 기도 대신 몇 개의 질문을 두서없이 던졌습니다.
성당 옆에 노숙자가 개 한 마리와 잠들어 있던데 그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나요? 세상엔 개도 많지만 개보다 못한 인간이 왜 이리 많은 걸까요? 죄 없는 사람은 일찍가고, 누가 봐도 '그네'스런 새끼들은 어쩜 이리도 염병과 지랄을 그치지 않나요? 잘못을 아는 사람은 늘 가난하고, 염치를 버린 자들이 늘 떵떵거리는 이유는요? 과연 당신께선 어떤 위대한 설계도를 갖고 계시기에 우리 사는 세상이 이리 험한가요? 제 질문이 너무 세속적이고 낯서시죠? 모든 진실은 세속화에서 나온다고 믿는 저는 어떤 죄를 짓게 되는 건가요?
언제나 보르헤스가 그 옆에서 눈웃음 짓고 있는 것 같은...
정한용 시인을 만날 때마다 감탄해요. 물론 시로서 만나는 것인데요, 사실 우리에게도 인연이란 게 깊다면 깊어요. 아득한 천 년 전, 그 까마득한 옛날 군대 시절 한 내무반에서 생활한 분이지요. 그때는 그이가 시인이란 사실도 몰랐어요. 그저 사람이 순수하고 글씨도 예쁘게 잘 쓰는 청년으로만 생각했어요. 그의 가슴속에 용광로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은 하참 시간이 흘러서였어요. 저 같이 무디고 어리석은 사람은 사람을 겉모양으로만 보기 때문에, 보물이 곁에 있어도 모르고 지날 때가 대부분이지요.
<불편한 기도>를 제가 굳이 해설할 이유는 없겠습니다. 읽으면 누구나 다 알게 되는 사실이니까요. 죄란 무엇이며, 잘못은 도대체 누가 평가하는 건가요. '세속에서 진실을 찾는다'는 시인의 말씀이 참 아름답지 않아요. 정 시인의 시어 "세속"은 참 세속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정 시인을 만날 때면 언제나 보르헤스가 그 옆에서 눈웃음 짓고 있는 것 같아요.
염병과 지랄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므로 '불편한 기도'는...
보르헤스의 친구 정한용, '그네'는 갔어도 새로운 '그네'가 어느덧 다시 와 있고요. 개와 함께 잠을 자던 그 노숙자는 이미 세상을 작별하였을지라도, 또다른 노숙자가 또다른 개와 함께 잠을 청하는 오늘이겠지요. 염병과 지랄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므로, 이 <불편한 기도>는 과거형이 절대 아닌 것이죠.
이런 시가 과거로 떠내려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마는 백년이 가도 천년이 가도 변치 않을 세상일 것입니다. 인생은 짧으나 예술은 과연 무지무지하게 길겠군요!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