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구의 '생각 줍기'

흐린 봄날, 오늘도 점심을 먹고 탄천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하늘은 잔뜩 흐려 햇빛도 나질 않고 바람마저 불어 기온은 높이 올라갔는지 몰라도 쌀쌀한 날입니다. 탄천에 핀 야생화들을 보면서 생각나는 바가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어느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비단 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은 우리 인간들이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자연 속에서 차별 없는 그저 똑같은 들풀이나 나무였는데 인간들이 이름을 붙이고 분별을 하면서부터 자연에도 차별이 생긴 거 같습니다.

한낱 몸짓에 지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태초부터 들풀들은 자연 속에는 아무런 차별 없이 잘 지내왔는데 말씀입니다. 그런 결과 인간들이 들판을 걸어갈 때도 예쁜꽃은 밟힐까봐 피해서 조심스럽게 걸으며 꽃이 아닌 들풀들은 예쁘지 않다고 짓밟고 가는 거 같습니다.

꽃이 아닌 들풀의 입장에서는 자연에는 아무런 차별도 없었는데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차별로 인하여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불평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는 크거나 작거나, 예쁘거나 밉거나 같은 차별이 없는 그저 서로에 대해 알 필요도 없는 자연 속의 풀과 나무였는데 말입니다.

모든 게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분별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고 그런 인간들은 인간사에 대해서는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데 그런 주장을 하는 인간들은 먼저 남이네 북이네, 좌파네 우파네, 진보네 보수네, 영남이네 호남이네 하는 차별부터 없애고 그런 주장들을 해야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들 스스로가 자신만이 선(善)이고 상대방은 악(惡)이란 분별심에 사로잡혀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허공 속의 메아리와 같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에서 살다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부터 선과 악을 분별하기 시작하였고 부끄러움이 생겼다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 에덴동산에는 선도 없었고 악도 없는 차별 없는 중도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선악과를 먹고 나서부터 에덴동산은 분별심에 빠져 참고 인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바세계가 된 겁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분별이 무명(無明)에서 생겨난다고 합니다. 

 /글·사진=이화구(금융인ㆍCPA 국제공인회계사ㆍ임실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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