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조정에서는 수군을 없애려고 했다. 신립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급히 글을 올려 수군이 중요한 이유를 조목조목 진술했다. 대신들은 그 글을 읽고 생각을 바꾸었다. 윤휴의 <백호전서>(제23권)에 기록된 바이다.
윤휴는 충무공 이순신의 삶을 깊이 연구했고, 그 결과 ‘통제사 이충무공의 유사’라는 글이 탄생하였다. (평소에도 저는 윤휴를 조선 제일의 개성적인 학자로 여기며 그 학덕을 존경해왔습니다! ) 사실 윤휴는 누구보다도 이순신의 생애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윤휴의 서모(庶母)가 이순신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윤휴는 이순신을 곁에서 직접 모신 여러 부하와 집사 및 하인을 만나서 여러 가지 증언을 수집하였다. 말하자면 비공식적인 역사 자료까지 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윤휴가 쓴 ‘유사’는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 많고 신빙성도 높다고 생각한다.
후세에는 이순신의 최후에 관해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장군이 그때 노량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는 황당한 주장도 꺼냈다. 그럼 그날 현장에 있던 이순신의 측근들은 무어라고 증언했을까. 궁금한 마음이 일어, 나는 윤휴가 쓴 ‘유사’를 꺼내 읽었다. 최후의 일전을 치르기 전날 밤, 이순신은 배 위에 올라 향을 피우고 축원했다.
“하늘이시여, 이 도적들을 물리치게 도와주소서. 도적들이 물러가는 날, 저는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고, 이 광경을 지켜본 부하들은 이를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단다. 그 다음날 전투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이순신은 선봉장으로 나서 왜선을 추격했다. 이순신의 배가 남해현 근처에 이르렀을 때, 장군은 뱃전에 우뚝 선 채 화살과 돌멩이가 쏟아지는데도 피하지 않고 군사들을 격려했다.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측근들이 한사코 말렸으나, 이순신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가 갑자기 날아온 흉탄에 맞았다.
과거에도 이순신은 뱃전에 서서 싸움을 독려한 적이 많았다. 순천 예교(망해대)에서 싸울 때도 우리 편의 전세가 위급했다. 그러자 장군이 뱃머리에 나섰다. 적의 표적이 되는 일이라서 측근들이 극구 말렸으나 이순신은 요지부동이었다.
“적을 없앨 수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 왜적이 물러가게 되면 설사 내가 죽더라도 너희는 편안할 것이다.”
이순신의 이 말을 전하며, 윤휴는 잠시 붓을 멈추고 깊은 뜻을 찾았다.
“공은 진실로 뱀과 독사(왜적과 간신배)가 세상을 해치고 어지럽히는 일(毒亂)에 분개하였다. 그와 동시에, 고래(이순신)는 작은 도랑(세상)에 오래 머물 수가 없다는 것을 아셨으니, 아 참으로 슬프다!”(<백호전서> 제23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세상을 작별할 때가 되었다고, 마음속으로 느꼈다는 것이 윤휴의 해석이다. 윤휴의 추론이 아마 옳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적이 물러가는 날,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이순신의 맹세는 조금도 빈말이 아니었다. 그날이 오기 오래 전부터 이순신은 전쟁이 끝나고 자신에게 닥쳐올 불길한 일을 미리 헤아렸다. 그러면서 그는 무엇보다도 부하들의 안위를 염려한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죽더라도 너희(부하)는 편안할 것이다!”
이 한 마디에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는 자신과 사랑하는 부하들이 애매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 이순신은 전란의 막바지에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임금이 똑똑하지 못하여 조정이 불안하면, 충신은 몸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누구보다 속이 깊은 이순신이었다. 그래서 끝끝내 그를 잊지 못하는 부하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옥형이라는 스님이 그러하였다. 스님은 일찍이 이순신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고, 장군의 사랑을 받았다. 이순신 장군이 숨을 거두자, 옥형 스님은 장군의 넋이 깃든 노량 바닷가의 충민사를 평생토록 떠나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바다에 나쁜 일이 생길 양이면, 통제사(이순신)가 어김없이 꿈에 미리 나타난다고, 옥형 스님은 증언했다. 이순신은 죽어서도 국가를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얼마나 강했으면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까 싶다. 윤휴는 스님의 그런 증언까지도 ‘유사’에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
알다시피 이순신을 깊이 의지하고 따른 이는 많았다. 장군의 부음이 전해지자 남도(전라도) 백성들은 모두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큰소리로 통곡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모셨다. 백성이 목놓아 통곡하는 광경은 전라도 어느 고을에서나 똑같았다고, 백사 이항복이 글로 기록하였다(<백사집> 제4권). 또, 장군이 별세한지 49일이 되던 날, 호남의 모든 사찰에서 약속이나 한듯이 49재를 올렸다고 한다.
정치 지도자가 진심으로 시민을 위하면 결국에는 누구나가 저절로 알게 된다. 이순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게 우리의 구질한 삶이겠지만, 누가 우리를 위해 일하는지는 정확히 알기 마련이다. 유교의 고전에 적혀 있듯,시민(民)은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새로 대통령으로 뽑힌 사람은, 부디 시민을 존중하고 사랑하기를 이순신 장군에게서 배우면 좋겠습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