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세상이 그렇듯이 예정된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문득’ ‘우연히,’ ‘느닷없이,’ ‘불현듯이’ 그렇게 ‘갑자기’ 오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오전까지만 내리고 갤 줄 알았는데, 오후를 지났는데도 주줄, 주줄 내리는 봄비.

우리들의 생 역시 우리가 미리 알았던 것도 아니고 예정되어 있던 것도 아닌데도, 나고 살고 계속되는 중이고 오늘의 일진 역시 우리가 알 수 없는 가운데에서 전개 되고있는 중일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지상의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은 없이 그때 그때 결정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비가 그치면 계절의 순서대로 봄꽃들이 피어나고 나무들마다 연둣빛 잎들이 피어날 테지요. 봄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봄날,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냘프게 흐르는 피아노 선율 속에서 책을 읽는 사이, 문득 지난 날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걷던 시절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내일의 꿈은 하나의 기쁨이다. 그러나 내일의 기쁨은 그와는 다른 또 하나의 기쁨인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자기가 품었던 꿈과 비슷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마다 제 각기 ‘다른’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어떠한 기쁨도 미리 준비하지 말라.“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의 일부입니다. 어떠한 기쁨도 어떠한 슬픔도 준비하지 않고 그날 그날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어느 꽃피고 바람 몹시 부는 날 세상을 영원히 떠난다고 해도 서운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 생을 산다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운 것은 그 무슨 연유인지요. 오늘 문득 지나간 추억들이 가슴이 서늘하게 떠오르며, 내가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