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구의 '생각 줍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벌써 3년째 명절이 돌아와도 고향엘 내려가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지난 3년을 뒤돌아보니 조상님 제사 때나 한 번씩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군산에 사는 처남이 설날이라고 고속버스로 선물을 보냈다기에 찾으로 오랜만에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왔습니다. 터미널에서 버스의 도착을 기다리다 보니 옛 시절이 떠올라 몇 자 적어봅니다.

지금이야 다들 자가용이 있고, KTX라는 고속철이 있어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별로 없어 버스 회사의 경영이 어려울 정도지만 옛날에는 고향에 내려갈 때 가장 많이 애용했던 게 고속버스였습니다.

저는 1979년 2월 서울에 올라와서 고속버스로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항상 시선을 차창 밖으로 두고 "언제나 나도 야간 대학이라도 들어가 대학생의 모습으로 고향에 내려갈 수 있을까" 하며 슬픈 생각에 잠겼던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안따깝게도 서울에 상경하고 3년이 되어 군 복무를 위해 익산 17경비대로 방위 받으러 갈 때까지 저에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1년 2개월의 방위병 복무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직장에 복직을 하고 나서는 나는 대학과 인연이 없는 것 같아 포기하고 살다가 우연히 직장 선배님께서 여분으로 구입한 방송대 입시 원서 한 장을 저에게 주시며 지원해 보라고 하셔서 서류를 준비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지원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우편물이 도착하자 방송대를 지원한 다른 직원들은 합격통지가 도착하였다고들 하는데 제 것은 없었습니다. 그 날은 토요일로 고향에 내려갈 일이 있어 고속버스를 탔는데 그날따라 '나는 대학과 정말로 인연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못 간 것도 아니고 사범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도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의 길로 들어선 저에게 운명은 방송대 가는 것까지 막을 정도로 가혹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운명의 장난은 다행히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다음주 월요일에 출근해서 도착한 우편물을 찾아보니 합격 통지서가 도착하였는데, 그때 기분은 대학 진학에 대한 꿈이 간절했기 때문에 명문 대학에 합격한 것 못지않게 기뻤습니다. 그 이후 주경야독하면서 힘들긴 했어도 방송대 졸업장이 있어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CPA(국제공인회계사)에도 도전하는 등 많은 걸 이룰 수 있었습니다.

터미널에서 버스의 도착을 기다리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봅니다. 지난 삶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승에서 남은 생을 착하고 선하게 살면서 선업을 많이 쌓아 다음 생에서는 폼나는 삶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모든 분들, 설을 맞이하여 가족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사진=이화구(금융인ㆍCPA 국제공인회계사ㆍ임실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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