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성탄절입니다. 아침에 19세기 조선 실학자 이규경의 글 하나를 읽습니다. 그는 청장관 이덕무 손자로 실로 박식한 학자였어요. 그의 저서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경사편 3, 서학西學)를 펼쳐봅니다.
<사교(邪敎, 천주교)의 배척에 관한 변증설>이란 긴 글이 나옵니다. 명나라 말기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판토하(Pantoja, 중국명 龐廸我, 1571-1618, 스페인) 신부의 저서도 간단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책 《칠극(七克)》이죠. 이규경은 판토하의 주장을 이렇게 인용합니다.
“인생의 모든 일은 없애거나(消) 쌓는 것(積)의 두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성현의 가르침은 모두 악(惡)을 없애고[消] 덕(德)을 쌓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악한 일이란 욕심에서 비롯되는데, 욕심 자체는 본래 악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을 간직하여 영신(靈神)을 보호하는 것이 욕심이거늘, 사람이 이 욕심에 빠져 사사로이 행동함으로써 죄와 허물이 비로소 생기고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겠다. 이 뿌리가 마음속에 깊이 박히면 부자가 되고자 하고, 귀(貴)하게 되고자 하고, 편히 살고자 기를 쓰게 된다.
이 세 가지 큰 악의 뿌리가 겉으로 드러나 악의 꽃이 피어나고, 그 뿌리가 다시 가지를 낳으면 더 큰 문제이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탐심을 낳고, 귀(貴)히 되고자 하는 마음이 오만을 일으키며, 편안히 지내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스럽고 음란하고 게으른 마음을 일으킨다.
또 부귀와 편안함(逸樂)이 자기보다 나은 이를 보면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며, 그것을 자기에게서 빼앗아가면 분노(忿怒)하는 마음이 생기나니. 이상이 악의 가지라 하겠다.
탐내는 마음은 꽉 움켜쥔 마음이라 은혜로써 풀어야 한다. 오만한 마음은 사자(獅子)의 사나움과 같은 것이니 겸양(謙讓)으로써 굴복하자. 욕심내는 마음은 깊은 골짜기와 같은 것이니 절도(節度)로써 메우자. 음란한 마음은 넘쳐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니 정조(貞操)로 막아보자. 게으른 마음은 피곤한 말과 같은 것이니 채찍으로 다루어야겠다. 질투하는 마음은 성난 물결과 같은 것이니 용서로써 가라앉히자. 분노하는 마음은 무서운 불길과 같은 것이니 인내로 삭이면 어떠할까.”
듣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씀이 아닌가 한다. 이규경도 겉으로는 천주교(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척하였으나, 실은 호감을 품었다. 그는 <<칠극>>의 아름다운 내용을 위와 같이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에 말한 “일곱 가지” 마음에 관하여 자세한 설명이 있다고 말하면서 “질서도 있고 비유도 적절하다”고 호평하였다. 그러면서 이 책은 한 마디로, “극기(克己)를 설명한 책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아울러, 이규경은 천주교의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그 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도들끼리는 서로 벗(敎友)이라 할 뿐 스승으로 섬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耶蘇)를 스승으로 섬겼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구교인 가톨릭교회든 신교인 개신교회든 별로 신망이 높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시민은 16-17세기에 판토하 신부가 <<칠극>>에서 지적한 일곱 가지 문제가 한국 교회 안에도 고질이 되어 있지 않은가 염려한다. 지나친 탐욕과 오만, 무절제와 성적 일탈, 태만과 질투심 그리고 걸핏하면 화를 터뜨리며 대중을 선동하는 잘못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판토하 신부님의 말씀처럼 인간의 욕망이란 본래 그릇되고 사악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다행히도 욕망이란 것이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육신을 유지 보호할 수도 있고, 남 못지 않게 정신적 수양에 정진할 수도 있다. 고요한 성탄절 아침에 실학자 이규경의 글을 읽으며, 내 안의 욕망 자체를 긍정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이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고 통제할지를 궁리한다.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지라도 이런 다짐을 되풀이하노라면, 상태가 크게 나빠지는 일은 피할 수 있으리라. 오늘 아침, 내 마음에 희망의 작은 등불이 켜진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