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구한말 시인이자 우국지사 매천 황현의 시에서 지리산 천은사를 만났습니다. 그 일부만 잠깐 소개하렵니다. 고찰(古刹)에 낭랑하게 들려오는 매미 울음소리에 느끼신 바 있어서 쓴 것이랍니다.
“오래된 절에 들리는 소리는 골짜기마다 쏟아지는 샘물 소리뿐 古寺惟聞百道泉
등나무 덩굴, 천 길이나 되는 돌다리에 걸쳐 있구나 藤蘿千尺石梁懸
울음 한 번으로 이 몸 실은 나귀는 명산에 접어들었네 一聲驢入名山路
오색구름은 부처님 계신 여러 하늘을 나르오. 五色雲飛諸佛天”
과연 천은사에서 듣는 계곡물 소리는 일품이지요. 엊그제 그곳에 갔을 때도 제일 먼저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물소리였어요. 지금은 절간으로 안내하는 돌다리야 별 의미도 없지마는 19세기의 선비에게는 썩 달랐던 모양입니다.
황현의 이 시는 <<매천집>>(제3권)에 <무술고(戊戌稿)>란 이름으로 묶여 있어요. 1898년 광무 2년에 지은 시만 따로 엮은 것이겠지요. 이 시가 탄생한 배경을 황 매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더랍니다.
“6월 20일, 금사 성주가 천은사에 술을 준비해서 초청하였더라. 내가 병든 몸을 이기고 수레를 타고 찾아갔었다. 그 자리에는 이산도 해학도 소천도 모두 왔다. 다들 함께 시를 지었다.(六月二十日錦士城主置酒泉隱寺見招余輿疾赴之二山海鶴小川亦至共賦)”
황현을 비롯해 명사들이 모였더란 이야기입니다. 누가 누군지 잘 모르실 것 같아서 간단히 소개합니다. “금사(錦士) 성주(城主)”는 그 당시 구례군수였던 박항래(朴恒來, 1853~1933)입니다. 금사는 물론 그의 호였고요, 1897년(광무1) 말부터 1899년 6월까지 구례를 다스렸지요. 구례군수의 초청으로 그날 한자리에 모인 선비들은 유명인사들이었어요. “이산(二山)”이라면 구례 운조루의 주인이었던 유제양(柳濟陽, 1846~1922)입니다.
인근에서 제일가는 명문가의 주인장이었어요. 또, “해학(海鶴)”이라면 이름난 선비 이기(李沂, 1848~1909)였어요. 《이해학유서(李海鶴遺書)》의 저자로, 애국 계몽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어요. 끝으로, “소천(小川)”은 구례 명가의 후예 왕사찬(王師瓚, 1846~1912)이었습니다. 매천과는 평소에 왕래가 잦았던 다정한 벗들이었어요.
그런데 성주님(박항래)이 주문한 술이 제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했나 봅니다. 술이 오기를 기다리며 황 매천은 아래와 같이 붓을 끄적여요.
“강 언덕에 술이 오지 않아 스님은 나가서 기다리시고 江郭酒遲僧出望
영단에 꽃잎은 쌓여가는데 길손은 졸음에 겨워라 靈壇花積客登眠
늦여름 매미 울음소리에 가을 기운도 차갑구나 晩蟬已有新凉意
세상일 돌아보니 지난 세월 부질없다 回首人間感歲年”
시절은 아직 여름이나 지리산 심산유곡에 자리한 천은사라서 오후가 되자 서늘한 가을 기운이 느껴졌던가 합니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매천은 삶(生)의 덧없음을 잠시 성찰하고 있었습니다.
“한껏 높아진 매미 소리에 푸른 구름이 되돌아오네 一聲聲戞碧雲迴
내가 귀먹어 못 알아들을까 봐 걱정해 주는 것일까 似患痴聾未盡開
지는 해 서늘하여라, 귀밑머리를 재촉하는 듯 落照泠然催鬢髮
한 많은 이 사람, 이제 다시는 누대에 오르지 않으려네 恨人從此廢樓臺”(하략)

앞의 석 줄은 그럭저럭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매미 울음소리와 흘러가는 계절과 인생의 덧없음이 우리에게 익숙한 구도로 배치되고 있어서요. 그런데요, 마지막 한 구절이 제 마음을 흔듭니다. 매천이 타고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평생에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였으니 “한 많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요. ‘이제 다시는 누대에 오르지 않으련다’는 말씀은 또 무엇일는지요.

“누대에 올라가”는 행위의 다중적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구절입니다. 올라가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애써 올라갈 것도 없다는 깨침이 소중합니다. 우리는 굳이 올라가려 애쓰기보다는 내려갈 줄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낮은 자리에 있어 도리어 평안할 줄을 알기가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요. 며칠 전, 식구들과 함께 천은사를 찾아가 인우 스님에게서 향기로운 차를 얻어 마신 기억을 떠올리며 이 글을 올립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